우연히 알게된 조부의 삶, 손주의 인생을 바꿨다
체포 뒤 징역 10개월형 선고 옥고 치러
출소 후 신간회 활동 등 국권회복 노력
1970~80년대 독립유공자 포상제 도입
최근중씨 조부 기록 발굴 12년 소요
외로운 사투 끝 신문자료 확보 후 제출
1992년 건국포장 추서 독립유공자 인정
“내 나이 벌써 아흔살을 넘겼지만
항일독립운동 자료 수집 지속할 것”
광복 80주년 잃어버린 영웅을 찾아서 - 9. 독립운동가 후손의 숙명
청포(淸浦) 최선재(崔善在) 지사는 1895년 10월 4일 강릉군 성남면 유산리 425번지(현 강릉시 섬석)에서 태어났다. 한학자이자 유학자였던 그는 1919년 4월 2일 강릉에서 독립만세 시위운동을 계획했다. 동지들과 함께 100여 매의 태극기를 창호지와 곶감꼬지로 만들어 장터에 모인 시위군중에게 배포하면서 수백명의 군중과 함께 태극기를 높이 들고 대한독립만세를 고창, 시위운동을 전개하던 중 일경에 체포됐다.
최선재 지사의 손주인 최근중 전 광복회 강원지부장은 수십년에 걸쳐 조부의 행적을 조사, 12년여만에 조부의 공적을 국가로부터 인정받은 경험이 있다. 일제강점기 때인 1934년 태어난 그는 아흔을 넘긴 지금까지도 ‘관동 항일독립운동사 연구회’를 운영하며 강원 영동지역의 항일운동사 정리에 몰두하고 있다. 그가 도와 유공자로 등재된 지사만 해도 십여명이 넘어간다.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도 유공자 발굴을 위해 스스로를 바치겠다는 최근중 전 지부장을 강릉에 위치한 그의 사무실에서 만났다.
■시대의 엘리트 애국지사 청포 최선재
최선재(1895~1953) 지사는 전국에서 항일독립운동이 전개되던 당시 자신의 고향인 강릉에서 동료들과 함께 독립만세운동을 준비했다.
1919년 고종이 서거했다는 소식이 강릉이 전해지자 강릉 지역 유림들은 유도진흥동지회를 소집해 만세운동 계획 수립에 착수했다. 강릉감리교회, 강릉청년회, 초당의 창동회 등도 함께하기로 결정되면서 최선재 지사 외에도 조대현(曺大鉉)·김진숙(金振淑)·최선근(崔善根)·최돈옥(崔燉玉)·최선호(崔善浩)·정식화(鄭軾和) 선생 등이 만세운동 준비를 맡았다.
준비 과정에서 강릉보통학교 학생 지도자들이 체포되는 등 일제의 감시가 삼엄해졌으나 이들은 굴하지 않고 태극기와 독립선언문을 만들어 1919년 4월 2일 오후 4시쯤 장날에 모인 군중 수백명과 함께 독립만세운동을 진행했다.
이로 인해 최선재 지사는 일제에 체포된 뒤 같은 해 4월 14일 함흥지방법원 강릉지청에서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0월형을 선고받고 원산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2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했다.
최선재 지사 등의 독립만세운동은 지역 사회에 큰 파란을 몰고 왔다. 이들의 만세운동을 시작으로 이후 강릉에서는 4월부터 5월까지 한달여간 1만여 명이 독립만세운동에 참가해 조국을 되찾고자 격렬한 시위를 전개했다.
이들의 헌신을 기리고자 지난1998년 8월 14일 강릉 3·1독립만세운동 기념탑 건립위원회가 구성됐고, 이듬해인 1999년 4월 13일 상해임시정부수립기념일에 맞춰 강릉시 저동 144-4(경포호수 가시연습지 입구)에 ‘강릉 3.1독립만세운동 기념탑’이 조성됐다. 이에 대해 최근중 전 지부장은 “당시 강릉은 유림의 활동이 활발한 지역이었다. 강릉 향교를 중심으로 유림철학이 강하게 뿌리내려 있었다”면서 “4월 2일 만세운동을 시작으로 일주일가량 격렬한 만세운동이 이어졌다. 이때 조부님께서는 운동을 주도하셨다”고 했다.
■출옥 이후에도 계속된 국권 회복 노력
최선재 지사는 출소 이후에도 양양지역 독립운동가인 이종엽과 서간문을 교환하는 등 출소 이후에도 국권 회복을 위해 노력했다. 특히 최근중 전 지부장이 여전히 보유 중인 최선재 지사의 서책이나 사진 등을 고려하면 최선재 지사는 상해 대한민국 임시정부와도 인연이 닿았던 것으로 보인다.
최근중 전 지부장은 “조부님께서 글씨를 참 잘 쓰셨는데, 상해에서 발간된 책자에도 할아버님께서 쓴 글씨가 들어가 있다. 어렸을 때 전해 듣기로는 할아버님께서 한동안 행방불명 됐다가 다시 나타나신 적도 있다고 한다. 이런 것을 보면 잠깐이라도 중국에 갔다가 다시 오신게 아닐까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고 말했다.
최선재 지사는 항일단체였던 신간회(新幹會) 활동에도 기여했다. 신간회는 1927년 2월 ‘민족 유일당 민족협동전선’이라는 표어 아래 민족주의 진영과 사회주의 진영이 제휴해 창립한 대표적인 국내 좌우합작 민족운동단체다.
신간회는 민족적·정치적·경제적 예속의 탈피, 언론·집회·결사·출판의 자유의 쟁취, 청소년·여성의 형평운동 지원, 파벌주의·족보주의의 배격, 동양척식회사 반대, 근검절약운동 전개 등을 활동목표로 삼아 전국에 지회와 분회를 조직하며 세력을 확장해 나갔다.
이에 1930년에는 일본에도 지회를 둘 정도로 성장하는 등 전국에 140여 개의 지회와 3만 9000여 명의 회원을 확보했다.
신간회가 전국으로 퍼져나가던 시기 최선재 지사는 1927년 신간회 강릉지회 7인의 설치준비위원에 참여, 창립총회에서 선전부 총무간사로 선임되는 등 여러 차례 신간회에서 보직을 맡았다.
신간회가 세를 불리자 일제는 탄압을 강화했다. 결국 계속된 일제의 억압으로 신간회 중앙본부가 해산되면서 강릉지회도 와해됐다. 최선재 지사 역시 삼척군 삼척읍 읍중리로 이주, 지속적으로 항일계몽운동 활동을 펼쳤다. 이에 일제는 그를 꾸준히 예의주시해 해방 직전까지도 일경으로부터 조사를 받는 등 탄압에 시달려야 했다.
하지만 최선재 지사의 신간회 활동은 공적으로 인정받지 못했다. 이에 대해 최근중 전 지부장은 “정부에 문의하니 신간회 활동으로 인해 옥고를 치르지 않아서, 항일운동으로는 인정하지만 서훈을 줄 수는 없다는 답변을 받았다”면서 “후손으로서 내가 자료를 가지고 있어 기록이 남았고, 이미 조부님께서 만세운동으로 유공자가 됐으니 더 이상 신경쓰지 않을 생각”이라 밝혔다.
■독립운동사 기록에 바친 여생 “유공자 인정 도움 되길”
최근중 전 광복회 강원지부장이 조부의 공적을 본격적으로 파헤치게 된 시기는 1970~80년대 들어서다. 당시 정부 차원에서 독립유공자를 발굴해 포상을 내리던 제도가 도입됐다. 주변에서 ‘조부인 최선재 선생도 항일운동을 했으니 알아보라’는 이야기가 들려왔다.
그렇게 그는 조부에 대한 자료수집에 착수했다. 이때만 해도 이 작업에 12년이나 소요될 줄은 몰랐다.
지역 사회 내에서 조부의 활약을 아는 이들이 여럿 있었기에 유공자 인정은 금방 이뤄질 줄 알았다. 그러나 최근중 전 지부장이 3·1운동 동지회를 방문했을 때 들은 첫 대답은 “수형 기록이 없다”였다.
이때부터 외로운 사투가 시작됐다. 서울, 부산 등 전국을 돌며 할아버지인 최선재 지사의 항일운동 행적을 증명할 수 있는 기록을 찾아다녔다. 수시로 자료를 갱신해 정부에 서훈을 신청했으나 인정받지 못하는 나날이 이어졌다. 더욱이 조부의 재판을 진행했던 곳이 함흥지방법원이었기에 6·25 전쟁 이후 관련 자료가 대한민국에 남아있지 않은 상황이었다.
하지만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고 했던가. 국립도서관에 만세운동에 대한 신문 자료가 남아있을 수 있다는 보훈부 직원의 말에 무작정 서울로 떠났다.
이에 대해 최근중 전 지부장은 “강릉 촌놈이 서울로 와서 자료를 찾는다는게 참 쉽지 않았다. 중간에 몇번씩 포기하고 싶었다. 그때가 1991년 인데, 나보고 1919년 신문을 찾아오라고 하니 포기해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회상했다.
고생 끝에 찾아간 국립도서관에서 마침내 그는 한(恨)을 풀 수 있었다. 도서관에는 강릉에서 일어난 만세운동을 보도한 신문 자료가 있었다.
그는 이것을 복사해 보훈부에 제출, 마침내 1992년 4월 최선재 지사가 독립유공자로 인정받게 됐다.
■이게 나의 업(業)
최근중 전 지부장은 1934년 출생으로, 그 스스로도 일제강점기, 6·25 전쟁 등 격동의 한국사를 직접 겪은 ‘살아있는 역사’다. 국민학교를 다니면서는 일제의 교육과정을 배워야 했고, 고등학교로 진학하려던 시기에는 전쟁이 발발해 학업이 중단되기도 했다.
어느덧 아흔을 넘긴 노인이 된 그이지만 여전히 컴퓨터 앞에 앉아 독립운동사 기록 정리에 여생을 바치고 있다.
그는 “내가 벌써 90이 넘었다. 언제까지 살지 누가 알겠느냐”면서 “항일운동가들의 후손은 다들 참 힘들게 살았다. 그러다보니 연이 끊긴 이들이 많다. 지자체에서 적극적으로 찾아주면 좋을텐데, 후손 찾기가 참 힘들다. 혹시라도 나중에 조상이 독립운동가로 인정받을 때 나처럼 고생해서 인정받지 않도록 여생 동안 항일독립운동 자료를 계속 수집하려 한다”고 말했다. 정민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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