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사람의 발, 어깨가 천천히 하나씩 사라진다면… [.txt]
이별의 적은 ‘마들렌의 효과’
사라지지 않는 코끝 너의 냄새
머그잔 속 들어앉은 코끼리처럼
연덕이한테는 옛날 책방 냄새가 나.
내가 오랫동안 만났던 사람이 나에게 자주 해주었던 말이다. 나는 그게 무슨 말이냐고, 먼지 냄새인 거냐고 반문했고 그는 그게 아니라고, 뭔가 따뜻하고 착실하고 그리운 냄새라고 했다. 그렇게 이야기하는 그에게서는, 구석구석 부드러움의 농도가 조금씩 다른 면직물 냄새가 났다. 나도 그도 향수를 거의 뿌리지 않는 사람들이었으므로 아마 그건 각자의 독특한 체향이었을 것이다. 나의 체향을 포함해 나는 누군가의 냄새를 잘 감지하는 사람이 아니고, 그 사람 외의 다른 연인에게서는 구체적인 향을 느껴본 적이 그간 한번도 없었기 때문에, 서로의 냄새에 대해 나누었던 잦은 대화는 아직까지도 나에게 신기한 경험으로 남아 있다. 아마 지금 수백 벌의 옷을 내 앞에 두고 그의 옷을 찾으라는 도전이 주어져도 나는 바로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이제 내 곁에 없지만, 다른 향과 결코 같지 않은 그의 고유한 향은 아직 내 코끝에 남아 기억되고 있다.
사람이 내 곁을 떠날 때 그의 일부가 차례로 조금씩 사라지면 얼마나 좋을까. 조금 잔인한 상상이기는 하지만, 오늘은 다리 한쪽이, 내일은 옆 어깨가, 모레는 귀 한쪽과 뒤통수가 천천히 하나씩……. 그럼 그가 물리적으로 사라지는 속도와 나의 심정이 어느 정도 균형을 맞추어 어떤 상실도 끝내는 받아들일 수 있을 텐데. 이별의 가장 잔인한 속성은, 전기톱 몇번에 바로 쓰러지는 나무처럼 분리의 순간이 아무 준비 없이 이루어지는 것. 그리고 그 감쪽같음에 비해 내게 남아 있는 디테일이 너무나 많고, 자질구레하고, 사랑스러운 형태로 남아 있다는 것. 그의 면직물 향, 주근깨, 웃으면 얼굴에 주름이 지는 부분, 그가 듣는 음악, 그가 절대 듣지 않을 음악, 손톱의 모양, 둥근 획의 글씨, 통이 큰 청바지, 비염, 가느다란 목소리, 그의 알레르기, 그의 불안, 그의 허세, 그의 우는 얼굴, 나를 모방했던 부분, 내가 모방했던 부분, 그 모든 것들.
귀의 생김새라든가 배고플 때의 표정이라든가 주로 오후 3시에 연락을 해온다든가 그런 식의 말이라면 내일 아침까지도 할 수 있는데
아침에 일어나보니 사라졌다면 씻어서 엎어놓은 머그잔에서 코끼리 한 마리가 빠져나갔다면 발자국이 어느 쪽으로 났는지 찾아낼 수 없다면
다시 시작하기 위해 뜨개질을 할까요 후추나무는 이제 건드리기만 하면 된다는 식으로 서 있고 바람은 결심을 할까요 구름은 실족할까요 의자가 주춤 손가락이 주춤 이러다 탭댄스라도 추겠어요 주춤주춤 대문을 넘어선 오후 3시가 두 귀로 쏟아지고 있는데
나는 언제 사라진 걸까요
―시 ‘오래 사귀었으니까요’, 시집 ‘아이를 낳았지 나 갖고는 부족할까 봐’(2015)
시 ‘오래 사귀었으니까요’의 화자 역시 오래 사귄 사람의 귀의 생김새, 그가 배고플 때 짓던 표정, 연락 패턴 같은 디테일들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내일 아침까지도 할 수 있”을 정도로 말이다. 그런데 이상하다. 아침에 일어나보니 무언가 사라져 있다. 이때의 ‘사라짐’은 내가 오래 사귄 ‘그’의 헤어짐이면서 빠져나간 “코끼리 한 마리”의 사라짐인데, 원래는 이 코끼리가 머그잔 안에 머물러 있었다고 한다. 사랑을 하고 만남을 지속하고 서로의 얼굴을 마주 보는 일은, 화자에게도 꼭 코끼리가 머그잔에 들어가는 일만큼 기적적이고 불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누구도 들어올 수 없던’ 나의 세계에 그를 들이고, ‘누구도 들어갈 수 없던’ 그의 세계에 내가 들어갔던, 찰나의 마법 같은 순간. 이제 마법이 끝나고, 애초에 머그잔에 들어올 수 없던 코끼리는 원래의 자기 자리로 돌아가 버린다. 그 발자국은 이제 찾아볼 수 없다.
시인은 뜬금없이, “다시 시작하기 위해 뜨개질을 할까” 제안한다. 이별이라는 드라마틱한 상황과는 왠지 어울리지 않는 것 같은 조용한 행위를. 그러나 뜨개질에 대해 곰곰이 생각하면 그 움직임이, 켜켜이 쌓이는 규칙적인 꼬임들이 굉장히 집요하게 느껴진다. 수행적으로. 뜨개질은 아니지만 나도 지난 12월 뜨개질의 집요함과 비슷한 시간을 보냈다. 2024년 12월19일, 나는 관광지와는 조금 떨어져 있던 오타루의 주택가를 혼자 걸었고, 눈이 무릎까지 쌓인 길들을 헤쳐 가며 꽤 오랜 시간 버스 정류장으로 향했다. 소리라곤 나도 집중해 들어야 할 정도로 작은 내 발소리뿐이었다. 그 걸음 속에서 나는 완전히 조용하고 땀이 났고 내 안의 어떤 집요함을 체험했다. 시인은 후추나무와 바람과 구름, 즉 현실에서 당연한 원리로 움직이던 자연과 사물들이 전과는 다르게 움직이는 모습을 본다. 전에 발견하지 못했던, “오래 사귄” 그와는 상관없는 그것들의 디테일을 처음으로 들여다본다. 시인의 상실감과 슬픔과는 상관없이, 의자는 “탭댄스라도 추”듯 주춤거린다. 오타루의 그 눈밭에서, 커다란 까마귀가 나를 쫓아온 적이 있었다. 그 검고 커다란 새에 대한 본능적인 두려움이, 그 순간에는 나의 상실감을 잠시 지워 주었다. 까마귀의 날갯짓이, 색이, 속도가, 그 새만의 디테일이 나에게 한꺼번에 찾아들었기 때문이다. 오래 사귄 사람이 사라진 뒤에 찾아드는 현재의 장면들은, 여전히 두렵고 웃기고 춤 같고 도망 같다.
시의 마지막 연에 이르러 시인은 말한다. “나는 언제 사라진 걸까요.” 지금까지 사라진 것은 줄곧 그 사람인 줄로 알았는데 ‘나’도 사라지게 되었다. 그리고 ‘나’의 한 부분이 사라져 들어간 자리로, 코끼리가 사라진 자리로, 새로운 빛과 새로운 날들이 찾아들 것이다. 사라지는 디테일들 속에 새로운 디테일이 다가온다. “오래 사귀었으니” 아마 지난한 과정일 것이다.
김연덕 시인
이제 그 무엇도 아닌 ‘사랑’을 들을 차례. 작가들이 숨어 애송하는 연애시의 내막을 연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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