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보영의 정상에서 쓴 편지] 22 태기산: 바람의 거대한 갈림길에서
가까운 산 오히려 더 멀게 느껴져
태기산 삼한시대 태기왕 이름 유래
횡성~평창~홍천 포함 해발 1261m
백패킹 명소 배낭 멘 등산객 눈길
고지대·바람 잦아 적설량 어마어마
풍력발전기 그림 같은 풍경 선사
1시간만에 정상… 연무 속 하얀 전망
대단한 장기 계획을 세운다고 해도 당장 내일 일도 모르는 것이 인생이며 도통 먼 곳으로 나아갈 궁리만 하지 자신의 가까운 주변은 제대로 살피지 못하는 것이 흔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새로운 해에는 소박한 일상에 충실하며 내 곁의 사람들을 좀 더 세심하게 챙기고자 다짐했으나 여전히 나아가야 할 바를 모르겠는 이 마음은 불안하기만 하고, 그래서 다시 또 열심히 앞날에 대한 계획을 세우게 됩니다. 하지만 불안과 관련한 문제는 육신이 건강할 때 해결된다는 것을 경험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것은 산을 가까이에 두는 것과도 연결됩니다. 저의 경우 산을 오를 때 대부분의 문제는 으레 답을 찾고는 했는데, 애석하게도 산을 가까이에 두겠다는 다짐이 곧장 가까운 곳의 산을 오르는 것으로 이어지지는 않았습니다. 우선 가까운 곳의 산은 이름조차 모르는 야산일 경우가 많고, 전국의 크고 멋진 산조차 미처 다 찾아가지 못할 만큼 사는 일이 생각보다 바쁘기 때문입니다. 가까울수록 멀다는 말은 비단 사람과 사람 사이에만 해당하는 말은 아닙니다. 가까운 산일수록 더 모르고, 그래서 더 멉니다.
지금 사는 원주에서 차로 30분 거리에 횡성이 있습니다. 횡성은 특산물인 한우로 알려진 고장입니다. 제가 인제에서 중학교에 다닐 때는 공부 잘하는 학생들만 갈 수 있다는 자율형 사립고인 민족사관고등학교가 있는 지역으로 유명했고, 고등학생 때 홍천에서 살면서는 원주 가는 길에 지나가는 소읍 정도로 생각하던 곳이지요. 그러고 보면 강원도에서 꽤 긴 시간을 살았어도 단 한 번 제대로 횡성을 둘러본 적이 없습니다. 강릉이나 동해와 같은 관광지도 아니고 춘천이나 원주 같은 거점 도시도 아니라서 횡성에 갈 일은 좀처럼 없었습니다.
그런 횡성에 대해 이따금 이야기를 들었던 것은 그 땅의 청일면에서 태어나 유년 시절을 보내셨다는 시어머니를 통해서였습니다. 지금 사시는 흥업면에서 닿을 듯 지척에 있는데도 어머니는 종종 그곳을 그리워하셨습니다. 마을 끝자락에 있던 작은 고향집, 집 앞에 흐르던 개울, 개울에 비친 달그림자 같은 것을요. 이제는 아무도 살지 않는, 지금은 아무것도 없는, 그래서 마땅히 가야만 하는 이유가 사라진 그곳을 어머니는 이렇게 기억 속에서라도 잠시 다녀오시는 것 같았습니다.
청일면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산이 태기산입니다. 태기산은 해발 1261m로 횡성에서 가장 높은 산입니다. 본래는 덕고산(德高山)이었는데 삼한 시대 진한의 마지막 왕인 태기왕이 산성을 쌓고 신라에 대항하던 곳이라서 이름을 고쳐 부르게 됐다고 합니다. 태기산은 횡성 청일면과 둔내면을 비롯해 평창 봉평면과 홍천 서석면까지 세 개 지역에 걸쳐 솟은 산입니다. 그래서 한자로 ‘클 태(泰)’ 자에 ‘터 기(基)’ 자나 ‘기운 기(氣)’ 자를 쓰지 않나 추측해봤는데 크게 틀리지 않았습니다. ‘클 태(泰)’ 자는 맞았고 기 자는 ‘갈림길 기(岐)’ 자였습니다. 산이므로 그 뜻이 더 의미에 맞겠습니다.
집 앞 정류장에서 1시간에 한 대 다니는 버스를 타고 만종역에서 하차한 뒤 강릉행 KTX를 타고 가다가 둔내역에서 내립니다. 만종역에서 둔내역까지는 19분. 그렇게 큰 산이 이렇게 가까이에 있었는데 왜 이제야 와보나 하는 생각을 잠시 합니다. 하지만 둔내역에서 태기산 들머리인 양구두미재(무위쉼터)까지 가려면 택시를 타고 또 20분 정도 가야 했기에 은근히 성가신 여정이었습니다. 역 앞에 대기 중인 택시가 한 대도 없어서 어느 블로그의 태기산 산행기를 통해 읍내에서 개인택시를 운영하시는 기사님의 번호를 찾아냈습니다. ‘둔내콜택시 033-342-0408’
호출한 택시를 타고 6번 국도를 올라 양구두미재에 도착하니 해발 980m임을 알리는 이정표가 보입니다. 단번에 웬만한 산의 정상 높이까지 올라왔습니다. 양구두미재는 횡성 둔내면과 평창 봉평면 경계에 솟은 오래된 고개입니다. 오후 2시, 아침 일찍부터 산행을 시작한 사람들은 이제 하산을 하는 중입니다. 산에 들기에는 제법 늦은 시간입니다. 한데 그럼에도 꽤 많은 이들이 저와 같은 방향인 이유는 태기산이 백패킹 명소이기 때문입니다. 저들이 등에 멘 커다란 배낭 안에는 오늘 산속에서 먹고 입고 자는데 필요한 것들이 들어 있을 것입니다.
양구두미재에서 정상까지는 5㎞, 왕복하면 10㎞입니다만 태기산 등산로는 흔히 우리가 등산을 생각할 때 오르는 그런 좁은 산길이 아닙니다. 너비로 2m쯤 되는 너른 아스팔트 임도가 정상까지 굽이굽이 이어져 있습니다. 과거에는 차를 타고도 오를 수 있었으나 등산객 안전 문제와 산불 방지와 자연 훼손 문제 등으로 현재 차량은 통제하고 있습니다. 태기산에 들어서는 순간 가장 인상적인 것은 길섶에 어마어마한 높이로 쌓여 있는 눈이었습니다. 고지대에 바람이 많이 부는 태기산은 겨울이면 어마어마한 적설량을 자랑합니다. 왜 사람들이 배낭 위에 썰매를 이고 지고 산에 오르는지 이제 알겠습니다.
출발 지점이 애초 천고지였기에 조금만 올랐는데도 발아래로 그림 같은 풍경이 펼쳐집니다. 거대한 태기산 풍력발전기가 셀 수 없이 휘돌아가는데 그 모습을 보니 십수 년 전 올랐던 태백의 매봉산이 떠오릅니다. 귓가를 울리는 바람 소리를 들으며 걸어갑니다. 이 바람은 허공을 채우고 있는 것일까, 비우며 사라지고 있는 것일까. 정상은 대관절 어떠한 모습일지 상상하며 걸어갑니다. 과거 태기분교였다는 자리를 지나갑니다. 백패커들은 오늘 이곳에서 텐트를 치고 아늑한 겨울밤을 보낼 것입니다.
출발한 지 1시간쯤 지나 태기산 정상에 도착합니다. 거대한 정상석 옆에 전망대가 있습니다. 날이 좋으면 치악산 비로봉이 보인다는데 오늘은 연무가 끼어 하얗습니다. 더 높은 지대까지 200m 정도 남아 있어 그곳까지 서둘러 다녀옵니다. 한데 국군지휘통신사령부와 한국방송공사 송신소로 가로막혀서 더 갈 수는 없습니다. 대신 산의 허리를 두르는 길을 통해 평창까지 넘어갈 수도 있고 청일면에도 내려갈 수 있다고 하니 정말이지 이름값 하는 산입니다. 이제 왔던 길로 다시 내려갑니다. 주머니에는 산행을 다 마치고 둔내역으로 돌아가는 길에도 호출하라는 택시 기사님의 명함이 들어 있습니다. 작가·에디터
#태기산 #횡성 #정상 #주변 #바람
Copyright © 강원도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이영림 춘천지검장 “헌재 일제 재판관보다 못하다” 정면 비판
- 내년 3월 ‘공룡 국립대’ 탄생… 통합과제 ‘산 넘어 산’
- 은행 골드바 판매량 급증…조폐공사 공급 중단에 품귀
- 이사장 점심 배달·교내공사 동원…학교법인 괴롭힘 정황
- ‘김새론 비보’ 외신들 주목…“한국 연예산업 정신건강 압박 우려 부각”
- 이재용-샘 올트먼-손정의 3자 회동…AI 협력 논의
- ‘음주 뺑소니’ 김호중, 2심서 “술타기 수법 쓰지 않았다” 주장
- 초등생 피살 교사 수사 본격화…부검 결과는 ‘다발성 손상 사망’
- 초등 4∼6학년생 장래희망 1순위는 ‘이 직업’
- 한주의 행복(?)…로또 판매 지난해 약 6조원 역대 최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