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프레소] 겨울에야 보이는 것

정상혁 기자 2025. 2. 20. 00:08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세상 차갑게 식어갈수록 더 짙어지는 사람의 호흡
오염되지 않은 긴 숨결은 추워야만 본모습 드러내

무심코 내가 숨 쉬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입김 때문이었다. 출근길, 폐에 차 있던 공기가 입으로 빠져나와 얼굴을 덮었다. 간밤 몸 안에서 데워진 온기가 얇은 담요처럼 천천히 펼쳐지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잠시 펄럭이다가 곧 바람에 올이 풀려 날씨의 일부가 돼가는 장면을 새삼 신기해하며. 영하(零下)의 기온, 아직 겨울이 다 끝나지 않았다는 의미일 것이다.

날이 추울수록 입김은 짙어지고 더 쉽게 허기진다. 광역버스를 기다리며 옹기종기 모인 사람들이 입김을 흘릴 때, 그들의 머리통은 작은 밥솥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루분의 취사(炊事)를 위해 그들은 오늘도 부스스 깨어나 옷을 껴입었을 것이다. 따뜻한 계절에는 드러나지 않던 숨의 궤적이 숨 쉬는 일의 고단함을 생각하게 한다. 저마다 체내의 압력을 다스리며 조용히 뱉어내는 그 온기의 출처가 나는 한숨이 아니기를 바랐다.

연기(煙氣)가 땔감을 태워 남기는 도구의 흔적이라면, 입김은 우리가 온혈동물이라는 본래의 고백처럼 느껴진다. 입김에는 잡념이 섞이지 않는다. 거기엔 아무 저의도 없다. 고(故) 이어령 선생도 찬바람 부는 어느 아침 불현듯 알아챘던 모양이다. 후세를 위한 ‘입김의 시’를 남겼다. “세상이 식어가더라도 시인이여 겨우살이를 하지 말고, 아침마다 문 밖으로 나와 그 뜨거운 입김으로 말하거라.” 꾸며낼 수 없는 입김처럼, 숨 쉬듯 정직하게 살자는 격려였으리라 짐작한다.

19일 오전 서울 광화문 사거리에서 한 남성이 입김을 흘리고 있다. /연합뉴스

탄핵 국면이 길어지고 법정의 시간이 늘어질수록, 그러나 입김은 어떤 암막을 배경으로 더 자주 거론되고 있다. 그 입김은 권력의 동의어다. 기온과 관계없는 입김은 의심스러울 수밖에 없으며, 정치적 영향력을 일컫는 관용어로 사용될 때 “그 남자의 입김만 닿으면 꼭꼭 숨어 있던 비밀이 꽃처럼 피어났다”(박완서 ‘그 남자네 집’)와 같은 황홀한 고백에서조차 어떤 치밀한 계략을 떠올리게 한다. 그런 입김에서는 참을 수 없는 구취가 풍긴다.

답답한 마음에 더 많은 입이 광장에 모여 더운 김을 피워내고 있다. 서울이든 대구든 광주든, 작은 호흡이나마 보태려 밖으로 나왔을 것이다. 대개의 경우 그들의 입은 미약하고 발언권조차 없다. 그러나 함성 이후 새어나오는 날숨이 그들의 확실한 존재를 드러내고 있다. 각자의 폐활량만큼 피워내는 소량의 안간힘으로, 그들이 이 땅에 버젓이 존재하고 있다고 온몸으로 항의하고 있다. 가진 게 아무것도 없을 때조차 입김은 있기 때문이다.

숨 막히는 일상이 당분간 계속될 것이다. 성경의 언어 히브리어에서 입김은 덧없음을 의미한다. 현란한 웅변의 시대에 고작 입김을 논하다니, 역시 무용한 일로 여겨질 것이다. 한가한 감상에 빠질 때가 아니라고, 차라리 치솟은 난방비를 걱정하는 편이 현실적이라는 힐난이 제기될 것이다. 그러나 엄혹한 시절에야 비로소 드러나는 가장 원초적인 내면이 있으며, 고로 지금이 아니면 할 수 없는 성찰이 있다는 사실은 결코 사소하지 않다.

아침 버스에 사람들이 올라탔다. 여럿이 뿜어낸 훈김으로 금세 차창이 흐려졌다. 유리에 차고 슬픈 것이 어른거릴 때 누구나 갑갑함을 느낄 것이다. 눈앞이 뿌옇고 가끔은 거추장스러울지도 모른다. 그러나 맥없이 잊힐 뻔한 맥박을 한파가 시각화해주고 있다. 그 조용한 흔적으로 인해 아직 심장이 제대로 뛰고 있음을 깨닫는다. 앞자리에 앉은 한 연인이 창에 입김을 불어넣고는 손가락을 갖다 댔다. 짜증 내거나 꾸벅꾸벅 조는 대신에, 뭔가를 그려넣고 있었다.

Copyright © 조선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