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수의 영혼마저 돌아섰다···계엄이 부른 전향 물결이 있었다? [사색(史色) 호외판]

강영운 기자(penkang@mk.co.kr) 2024. 12. 14. 0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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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색-호외] 조국의 안녕과 번영. 그의 영원한 꿈이었습니다. 외국의 진귀한 물건과 정신에 물들지 않는 조국만의 순수한 민족정신을 옹호합니다. 국가의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 총을 든 지도자를 찬양하는 데 앞장선 것도 그였습니다. 그에게 민족이란 반드시 지켜야 하는 ‘순백의 이상’. 국가를 위해선 목숨도 걸겠다는 결기도 확고합니다.

민주주의, 계몽, 이성이라는 가치에 반감을 드러냅니다. 외국의 것이라는 이유에서였습니다. 민족, 국가 질서, 품격이 그에게 더욱 중요한 가치였습니다. 보수주의자와, 국수주의자의 상징. 토마스 만이라고 불린 남자의 이야기입니다. ‘부덴브로크 가의 사람들’, ‘마의 산’으로 노벨 문학상을 받은 소설가이자, 독일 보수주의의 대표로 통한 인물이었습니다.

마의 산이 배경이 된 스위스 다보스. [사진출처-=Flyout]
30년 후. 토마스 만은 더 이상 보수의 상징이 아니었습니다. 민족 반역자, 국가의 역적이라는 힐난이 쏟아집니다. 고향을 떠나 조국을 비판하는 데 누구보다 앞장섰기 때문이었습니다. 수십 년 만에 뒤바꾼 위상.

토마스 만이 ‘전향’ 한 건 그가 ‘철새’여서가 아니었습니다. ‘보수’가 한 사람에 의해 완전히 곡해되어 버렸기 때문이었습니다. 보수 지도자가 국가를 완전한 위기에 빠뜨린 지금. 토마스 만의 인생을 독해하기 가장 좋은 시간입니다.

“보수란 무엇인가.” 토마스 만의 초상화.
건국의 시기엔 누구나 애국자가 된다
1875년. 토마스 만이 탄생한 시기입니다. 프로이센을 중심으로 독일이 통일된 지 이제 막 4년이 지났을 무렵입니다. 오랜 숙적 프랑스를 무력으로 제압한 뒤 건국한 나라. 나폴레옹에 당한 치욕을 되갚음한 영광스러운 조국. 하나 된 독일에 대한 애정이 넘쳐흐르던 시절이었습니다. 독일제국 황제 빌헬름과 철의재상 비스마르크에 대한 지지는 하늘 높은 줄 몰랐습니다.
“이제 우리 독일은 하나다. 프랑스 베르사유에서 우리 독일제국의 출범을 선포하노라.” 안톤 폰 베르너의 그림.
독일제국은 아직 열강의 위협 속에 있었습니다. 보복을 열망하는 프랑스, 유럽대륙의 강자를 견제하는 영국. 하나 된 독일을 위협하는 외국에 맞서 젊은이들은 타자를 향한 분노를 쏟아냅니다. 아(我·나)와 비아(非我·남)의 구별 속에서 민족이란 개념은 발육하기 마련입니다.

이를 몸과 마음에 체화한 대표적 인물, 토마스 만이었습니다. 프랑스와 영국적인 것에 맞서 독일적인 정신을 옹호한 글쟁이였습니다.

“독일에 항복은 하겠지만...보복할 날이 곧 올 것이야.” 1870년 9월 세당 전투 후 항복하는 프랑스 나폴레옹 3세.
보수의 영혼, 토마스 만
1901년 출간한 그의 대표작 ‘부덴브로크 가의 사람들’에는 보수적인 정서가 그대로 녹아 있습니다. 금발에 파란 눈을 가진 전통 독일적 가문 부덴브로크 가. 그들 집안에 이방인 여인들이 하나둘씩 가족으로 들어옵니다.

검은 머리에 검은 눈을 가진 이질적 존재들. 대를 이어갈수록 금발은 점점 빛이 바래고, 눈의 푸른빛 역시 옅어집니다. 상징의 상실은 가문의 몰락으로 연결됩니다. 타자와 만남을 병으로 그려낸 셈. 토마스 만은 “아주 특별히 독일적인 책”이라고 말했습니다.

토마스 만의 ‘부덴브로크가의 사람들’에서는 그의 보수적인 색채가 엿보인다. 1904년판.
1914년 조국을 향한 애국심은 더욱 들끓습니다. 황제 빌헬름2세가 1차 세계대전 참전을 선언하면서입니다. 카이저(독일의 황제 칭호)는 외칩니다. “제국 형성 이후 짐은 세계 평화와 우리의 발전을 위해 노력해 왔습니다. 적들은 우리의 성공을 시기합니다. 그러나 우리 독일은 통일되었을 때 한 번도 패한 적이 없습니다. ”
“우리 독일은 동부에서도 서부에서도 싸울 것이네.” 1차 세계대전 당시 포스터.
토마스 만은 이 전쟁을 열렬히 옹호합니다. 애써 하나 된 조국이 다시 다른 열강에 의해 분열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위대하고 기품 있으며, 엄숙한 독일인의 전쟁”이라고 정의합니다. 1918년에는 1차 세계대전 참전을 열렬히 지지하는 ‘비정치적인 남자의 성찰(The Reflections of an Apolitical Man)’을 출간했을 정도였습니다.

독일의 영적 전통과 애국심, 뿌리 깊은 문화를 열렬히 찬양했지요. 동생 하인리히 만이 ‘졸라’라는 작품을 통해 전쟁을 비판하자 공개 설전을 벌이기도 했습니다.

“우리 것을 지키기 위해 전쟁은 필요해.” 1905년의 토마스 만.
폭력에 물들어가는 독일
토마스 만의 견고한 마음에 균열이 생긴 건 1차 세계대전 패전 이후부터였습니다. ‘베르사유’ 조약으로 패전국 독일에 막대한 배상금이 부과됩니다. 제국은 무너지고 그 자리에는 새로운 체제가 들어섭니다. ‘바이마르 공화국’이었습니다.

엄청난 물가상승에 경제는 제대로 굴러가지 않았고, 시민들의 삶은 팍팍해집니다. 희생양을 찾아 나서기 시작할 때, 일부 정치인들이 한 집단을 겨냥합니다. 잇속에 밝은 사람들, 언젠간 손봐주겠다 벼르고 있던 사람들. 유대인이었습니다.

“유대인은 배신자들이다.” 1919년 출간된 엽서. 유대인이 전쟁 중인 독일 군인을 뒤에서 찌르는 장면을 묘사한다. 당대 반유대정서를 보여주는 그림.
매일같이 유대인 상점에 돌이 날아옵니다. 거리를 걷던 유대인들은 조리돌림당합니다. 복장이 마음에 안 든다는 이유로. 독일을 더럽힌다는 이유로. 한 독일인은 1923년 5월에는 연극 극장에 폭탄을 던지기도 했습니다. 유대인의 정신이 엿보인다는 이유에서였습니다.

이들은 한 목소리로 외쳤습니다. “위대한 독일을 위하여, 더욱 위대한 독일 민족을 위하여.” 토마스 만이 그리던 애국은 독일 땅에서 점점 괴이한 모습으로 변해가고 있었습니다. 마침내 자신을 민족주의자라고 자칭한 일련의 무리가 바이마르 공화국 외무부 장관까지 암살합니다.

나치가 유대인 변호사에게 ‘나는 경찰에 불평하지 않겠습니다’라고 쓰여진 판을 들고 맨발로 걷도록 강요하는 모습. [사진출처=Bundesarchiv, Bild 183-R99542]
토마스 만 반기를 들다
독일에서 증오는 조직화하고 있었습니다. 유대인 혐오에 장작을 더하고, 이들의 화력을 동력삼아 움직이는 조직이 생겨납니다. 나치였습니다. 폭력을 사회정화로, 혐오를 애국으로 포장하던 이들이었습니다.

작가 토마스 만은 점점 그들과 거리를 두고 있었습니다. 자신이 늘 얘기하던 독일적인 것의 모습과 너무나 달랐기 때문입니다. 1924년 ‘마의산’에서 그의 보수적 색채는 한층 옅어집니다. 다양한 이념의 가치를 받아들이며 삶의 복잡성을 사유합니다.

“이건 내가 본 보수의 모습이 아니야...” 노벨상 받기 전 베를린에서 토마스 만.
현실세계에서도 좌파 자유주의 정당에 공개적인 지지를 표했습니다. 정책에 완전히 동의해서가 아니었습니다. 나치와 싸울 유일한 정당이라는 판단에서였습니다.

1929년 그가 노벨문학상을 받았습니다. 경찰은 그러나 나치를 공개적으로 비판한 것을 문제 삼아 감시를 강화합니다. 극우 세력은 그를 빨갱이 반국가세력으로 몰아세웠습니다. 노벨상을 받은 지 4년 후, 독일에 새로운 총리가 임명됩니다. 아돌프 히틀러였습니다.

“계엄으로 나치 독재를 강화하자고.” 아돌프 히틀러(가운데). [사진출처=Bundesarchiv, Bild]
그는 대통령을 허수아비로 만들고 ‘계엄령’을 선포합니다. 독재는 언제나 법의 약한고리를 끌고 들어옵니다. 바이마르 헌법 48조를 근거로 댔습니다. ‘제국 내에서 공공의 안전과 질서가 심각하게 교란되거나 위협받을 경우, 제국 대통령은 이를 회복하기 위해 필요한 경우 군대의 지원을 받아 개입할 수 있다.’

“파렴치한 반국가 세력을 처단하고, 헌정 질서를 지키겠다”는 이유로 시민의 기본권을 억압하는 조치였습니다. 히틀러의 나치를 막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토마스 만 역시 독일을 떠나야만 했습니다. 그의 부인 역시 유대인이었습니다.

토마스만의 부인 카티아 만은 유대인이었다.
전투적 인본주의자 토마스 만
“독일 동포 여러분께.”

2차 세계대전이 한창인 암담한 시절. 독일 전역에 토마스 만의 목소리가 울리고 있었습니다. 외국으로 망명한 토마스 만이 영국 BBC와 손잡고 선전 방송을 하고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조국을 떠났다고 그의 투쟁은 끝난 것이 아니었습니다.

왜곡된 독일을 바로 세워야 할 의무가 그에겐 있었습니다. 보수주의가 해야 할 일이었습니다. 그는 나치가 만든 지옥을 그대로 전합니다. “1만명 넘는 유대인들이 15분만에 독가스 탓에 죽어갔습니다. 비명과 기도소리가 가득 찬 방 앞으로 나치의 비웃음 소리가 들렸습니다. 당신은 죽음, 파괴, 혼돈에 지쳤습니다.”

“이 소리가 독일에 잘 전달되어야 할 텐데.” [사진출처=Bundesarchiv, Bild 183-R15883]
4년이 넘는 시간, 대독일 선전방송은 계속됩니다. 마침내 전쟁이 끝났습니다. 그를 ‘전투적 인본주의자(militant humanist)’로 부르는 이유였습니다.

토마스 만은 전후 독일로 귀향하지 않았습니다. 조국이 두 개로 쪼개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인권이 무너지는 곳에서 언제나 목소리를 내는 인간이었습니다. 미국에서 흑백 선전인 매카시즘 광풍이 불자 “히스테리적 전체주의”라고 일갈한 것도 토마스 만이었습니다.

“나는 분리된 조국으로는 돌아갈 수 없소.” 1949년 8월 바이마르에 도착한 토마스 만. [사진출처= 독일연방기록보관소]
“내가 있는 곳이 독일입니다.”
나치와 극우주의자들은 토마스 만을 민족 배신자로 여겼습니다. 그러나 그는 한 번도 이념을 바꾼 적 없었습니다. 인권과 체제를 무너뜨리려는 세력 앞에서 단행한 건 전향이 아닌 저항이었습니다. 독일을 오염시키고, 보수주의를 병들게 하는 모든 것에 대한 항변이었습니다.

그는 늘 제 자리에 서 있었으나, 오른쪽으로 치닫고 마침내 괴물이 되어버린 이들은 그를 ‘좌익’, ‘빨갱이’라고 몰아세웠습니다. 독일의 영적인 심성을 굳게 지지했다는 점에서 20대의 토마스 만과 50대의 토마스 만은 한치도 다르지 않았습니다.

나치를 피해 미국에 머물던 토마스 만은 망명생활 괴로움에 대한 질문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토마스 만은 대답합니다. “내가 있는 곳, 그곳이 독일입니다(Wo ich bin, ist Deutschland).”

“독일은 히틀러 따위에 오염되지 않소.”
나치가 점령한 땅은 더 이상 독일이 아니라는 선언과 같았습니다. 독일의 진짜 정신을 품고 있는 사람들이 사는 곳이 독일이라는 명문이었습니다. 보수의 정신, 그리고 독일은 히틀러 따위에 오염될 수 없다는 선언이었습니다.

대한민국 보수가 한 지도자의 자의적 통치로 몰락 위기를 맞은 오늘날, 그의 말을 빌립니다. 계엄을 막아낸 시민이 있는 곳, 그곳이 대한민국입니다. 살을 에는 추위 속에 평화를 염원하는 시민이 있는 곳, 그곳이 대한민국입니다.

민주주의와 법치, 전통과 질서를 지고의 가치로 삼는 보수는 한 사람에 의해 결코 오염될 수 없습니다. 12월 3일 밤 10시 30분 몰락해 버린 건 용산에 있는 한 사람, 그를 두둔하는 정치적 시녀들뿐입니다.

독일을 지탱하는 문인들을 새긴 베를린의 조형물. 괴테, 폰타네, 헤세와 함게 만의 이름이 적혀있다.
<네줄요약>

ㅇ‘마의 산’, ‘부덴브로크 가의 사람들’로 노벨문학상을 받은 토마스 만은 원래 보수주의, 국가주의자였다.

ㅇ제1차 세계대전을 적극적으로 지지했을 정도였다.

ㅇ바이마르 공화국 몰락과 함께 나치가 주도권을 잡자 그는 적극적으로 반나치 활동을 벌였다.

ㅇ독일의 보수 정신이 나치에 의해 오염될 수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참고문헌>

ㅇ홍길표, 근현대 서구와 타자-토마스 만의 ‘부덴브로크 사람들’ 소고, 유럽사회문화, 2017년

ㅇ윤순식, 문학과 정치-정치와 문학, 독어교육, 2018년

ㅇ윤순식, 토마스 만의 에세이에 관한 소고-정치관의 변화 과정을 중심으로 , 독일문학,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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