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시평] 소련의 붕괴와 북한 체제 내구력
소련의 붕괴는 소련 연구자에게 지진 같은 충격이었다. 대부분의 학자나 미국 CIA도 소련의 붕괴를 예측하지 못했다. 이들은 소련이 여러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그럭저럭 버티며 21세기를 맞을 것으로 전망했다. 전문가의 실패는 거센 비난의 대상이 되었다. 미국 상원의원은 CIA 폐지 법안을 제출했고, 연구자는 직장을 잃기도 했다. 평생 소련경제를 분석한 교수 중에는 다른 경제학 분야로 전공을 바꾸거나 아예 연구를 접은 이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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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정은 핵 집착으로 내구력 약화
소련 말기보다 경제 더 나쁘지만
지정학, 감시 역량은 안정에 도움
붕괴 추측보다 변동성 대비해야
」
붕괴를 예측하기는 매우 어렵다. 오랫동안 누적된 구조적인 문제와 갑자기 벌어진 사건 등이 복잡하게 얽히면서 순식간에 체제가 무너진다. 소련의 구조적인 문제는 경제였다. 국영상점의 생필품 부족이 극심하여 주민들은 하루 몇 시간씩 줄을 서야 했다. 이들은 가격이 비싸도 물건을 살 수 있는 농민시장이나 암시장을 더 신뢰하게 되었다. 리더십 스타일과 정책의 실패도 붕괴의 이유였다. 고르바초프의 개혁으로 감시가 줄고 사회가 이완되자 자유로운 의사 표현이 활발해지면서 임금인상을 요구하는 파업까지 발생했다. 잘못된 경제정책은 재정을 악화시키고 인플레이션을 유발했다. 여기에 대내외의 충격이 가해지자 위약해진 체제는 견뎌낼 수 없었다. 일차적 타격은 아프가니스탄 침공 실패와 동유럽의 자유화 운동이었다. 더 결정적인 충격은 고르바초프를 제거하고 구체제를 수호하려는 강성 정치국원들의 쿠데타였다. 그러나 소련 주민은 마음으로 앙시앵레짐을 버린 지 이미 오래되었다. 이를 간파한 러시아 공산당 서기장 보리스 옐친이 주민의 편에 서자 소련은 해체되고 사회주의는 사라졌다.
소련의 사례에서처럼, 길게 보면 주민의 선택이 체제 지속 여부를 결정한다. 현재와 같은 북한 체제는 장기간 지속되기 어렵다. 시장화로 눈이 뜨인 북한 주민 절대다수는 사회주의보다 개인의 자유로운 경제활동을 허락하는 자본주의를 선호한다. 결국 대안은 붕괴 후 자본주의로 이행한 구소련·동유럽 모델이나 붕괴를 경험하지 않고 스스로 개혁개방을 했던 중국·베트남 모델밖에 없다. 북한은 권력 구조로 볼 때 구소련·동유럽의 경로를 따를 가능성이 더 크다. 하지만 권력자가 시장화에 떠밀려 중국·베트남 모델로 갈 수도 있다.
현재 북한 체제의 내구력은 소련 말기와 비교해 어느 정도일까. 경제로 평가할 때 북한은 고르바초프 시기보다 내구력이 약하다. 소련과 달리 북한 주민 다수는 생존을 염려할 정도로 위기를 겪고 있다. 더욱이 주민 대부분이 사(私)경제활동에 종사해 왔기 때문에 자본주의 선호도가 더 높다. 정책 실패 면에서 고르바초프와 김정은은 막상막하다. 김정은의 사회주의경제 복원 정책은 경제 안정성을 해치고 경제난을 키운다. 작년 말 공식 임금을 수십 배 올린 정책이나 최근 지방 20곳에 10년 동안 해마다 경공업 공장을 건설하겠다는 무리한 정책이 대표적인 사례다.
김정은의 핵 집착은 체제 내구력을 떨어뜨리는 근본 원인이다. 핵 개발 초기에는 핵이 경제보다 권력 유지에 더 큰 도움이 됐을 수 있다. 그러나 경제가 위기에 빠지고 핵이 50기 이상 있다고 평가되는 지금은 핵보다 경제에 더 많은 자원을 투입하는 것이 권력 유지 차원에서 합리적이다. 그런데도 김정은은 여전히 핵에는 과잉, 경제에는 과소 투자를 하고 있다. 그는 두 가지 문제로 인해 경로의존성의 함정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듯하다. 먼저 핵 고도화 속도를 늦출 경우, 미국과 한국에 대한 군사적 압박 강도가 약해지며 그 결과 핵 군축이나 동결 협상이 열리기 어렵다고 판단한다. 또 미스터 핵이라는 이미지를 강력히 부각하지 못하면 지도자로서의 리더십이 심각하게 손상될 것으로 우려한다. 딜레마에 처한 김정은은 과거의 경로대로 핵 고도화를 지속하면서 내부 불만을 억누르기 위해 공포정치를 강화한다. 또 주민이 자본주의 의식을 갖지 못하도록 시장 활동을 억압하며 버티려 한다. 하지만 그 결과 주민과 관료의 불만은 증가하고 정권 지지도는 추락한다.
현재의 지정학적 여건은 북한 체제 내구력에 도움을 준다. 중국과 러시아는 정치 제도가 유사하고 대미 레버리지 역할을 하는 북한의 붕괴를 한사코 막으려 할 것이다. 또한 소련과 달리 북한에는 김정은을 반대하는 핵심 권력층이 형성되어 있지 않다. 어떤 독재국보다 발달해 있는 감시 기제 역시 체제를 지탱하는 데 유리하다. 그러나 한반도 주변의 지정학이 어떻게 변할지, 경제 위기 속에서 권력층이나 중간 관료가 어떻게 움직일지에 따라 체제 내구력에 플러스 요인이 갑자기 마이너스로 바뀔 수 있다.
체제 붕괴는 절대자의 영역일 것이다. 인간이 기획하거나 미리 알기 어렵다. 그래서 “북한은 절대 붕괴하지 않는다”라거나 “곧 붕괴한다” 등의 말에 휘둘리지 말아야 한다. 체제 붕괴가 아니라 체제 변동성이 적합한 용어다. 우리는 향후 수년 이내에 급격히 높아질 수 있는 북한 체제의 변동성에 대비해야 한다.
김병연 서울대 석좌교수·경제학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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