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승욱의 시시각각] 정치에 백전백승은 없다
현재 권력과 미래 권력의 격한 갈등 사례로는 김영삼(YS) 전 대통령과 이회창 전 한나라당 총재가 꼽힌다. 필자의 첫 정치 취재 현장도 그 갈등의 수많은 챕터 중 하나였다. 1997년 7월 21일 서울 올림픽공원 체조경기장에서 열린 신한국당 대통령후보 경선. 27세 막내 기자의 임무는 행사장 밖 취재였다. 가만히 서 있기도 벅찬 혹독한 폭염을 뚫고 앰뷸런스 한 대가 급하게 행사장에 출동했다. 1차 투표에서 이한동 후보가 불과 5표 차(1776 대 1771, 재검표 뒤 8표 차로 확인)로 2위 이인제 후보에게 졌다는 소식에 그의 지지자들이 실신했기 때문이다. 이인제 후보는 결국 1·2위 간 결선투표에서 '대세'였던 이회창 후보에게 패했고, 결국 탈당해 97년 대선을 3자 구도로 만들었다. 역사에 가정은 없다지만 만약 이인제가 아닌 이한동이 2위였다면, 그리고 경선 불복이 없었다면 그해 대선의 승자가 변함없이 김대중(DJ) 전 대통령이었을까. 역사를 바꾸는 한 표의 위력을 실감한 순간이었다.
YS-이회창 관계는 97년 대선 핵심 변수 중 하나였다. 93년 YS는 '대쪽 판사 이회창'을 감사원장과 총리로 연거푸 기용했지만 총리 권한을 둘러싼 대립으로 갈라섰다. 하지만 이회창은 96년 총선의 신한국당 간판으로 다시 영입됐고, 대선 후보까지 거머쥐었다. 갈등의 기저엔 이인제 문제가 있었다. 청와대의 부인에도 이 전 총재 측에선 "YS와 측근들이 당의 공식 후보가 아니라 정치적 후계자인 이인제를 몰래 지원하고 있다"고 의심했다. 의심은 불신으로, 반목으로 커졌다. YS는 DJ 비자금 수사 유보를 지시했고, 이회창은 YS에게 탈당을 압박했다. 포항에서 터진 YS 인형 화형식 이후 대통령이 당을 떠났다. 보수 분열의 3자 구도에 여당 내부까지 갈가리 찢겼으니 DJP(김대중+김종필)로 뭉친 상대를 이기는 건 난망했다. 결과는 YS와 이회창 모두의 패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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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재와 미래권력 충돌한 1997년
불신과 반목 속 정권재창출 실패
아슬아슬한 윤·한 관계에 시사점
」
27년이 지난 지금 윤석열 대통령과 한동훈 국민의힘 대표의 관계가 비슷한 주목을 받고 있다. 차기 대선까지 2년 반이나 남았지만 벌써 아슬아슬하다. 관계가 틀어진 원인에 대해선 두 사람 모두 할 말이 많을 것이다.
윤 대통령은 한 대표의 마이웨이가 마땅치 않은 것 같다. YS는 사실상 일면식도 없었던 이 전 총재를 집권 첫 감사원장에 전격 발탁했다. 반면에 윤 대통령과 한 대표는 20년 이상 검찰에서 한솥밥을 먹은 혈맹과도 같은 선후배다. 40대 법무장관과 여당 비대위원장 등 한 대표의 속성 코스는 둘의 과거 인연을 빼고는 상상하기 어렵다. 그런 점에서 윤 대통령의 서운함도 이해가 간다.
반대로 한 대표로선 지난 총선과 대표 경선 과정에서 혹독한 시련을 겪었다. 김건희 여사 명품백 국면에서 언급했던 "국민 눈높이"가 사실상 여권의 유일한 돌파구였지만 한 대표는 난데없이 ‘사퇴 압박'이란 몽둥이찜질을 당했다. 중도층이 모두 등을 돌린 황무지 토양에서 어렵게 총선을 치렀건만 참패의 책임을 모두 자신에게 뒤집어씌우려는 듯한 태도에 분개할 법도 했다.
하지만 두 사람의 관계는 한 대표 말처럼 이미 공적인 관계로 바뀌었다. 대통령과 여당 대표의 도를 넘는 갈등은 국정의 안정성을 해치고 여권의 리더십 위기를 초래한다.
90분간의 대통령실 회동으로 갈등이 한 고비를 넘긴 줄 알았다. 하지만 이제 보니 천지가 다 지뢰밭이다. 당직자 임면은 대표의 분명한 권리임에도 "왜 바꾸냐"고 계속 시비를 거는 친윤계, 반대로 대통령의 고유 권한인 사면 복권 문제에 한 대표의 반대 입장을 여기저기 흘려대는 친한계의 행태 모두 참 고약하다. 말싸움이나 PC 게임이라면 혹시 몰라도 정치에서, 그것도 대통령과 여당 대표 사이에 어떻게 백전백승이 있을 수 있나. 바득바득 모든 전투에서 이기려다 전쟁을 망칠 수도 있다. 27년 전처럼 남 좋은 일만 시킬 수도 있고.
서승욱 정치국제외교안보디렉터 sswoo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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