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세기, 기록의 기억] (115) 김포가도
1인당 국민소득 250불이던 1971년에 촬영한 김포가도 사진은 전혀 한국 같지 않은 모습이다. 논밭이 광활하게 펼쳐져 있고 플라타너스 가로수가 있고 중앙분리대에는 분수대도 늘어서 있다. 목가적인 풍경이다. 평소 이 분수대는 가동하지 않다가 한국을 방문한 외국 대통령이 김포공항에서 서울로 진입하면 환영 세리머니로 물줄기를 뿜어 올렸다.
대통령 박정희의 해외순방 시에도 분수대는 환송의 물을 뿜어냈다. 서울의 서쪽 끝, 양화대교 남단에서 김포공항에 이르는 김포가도는 1963년 완공되었다. 당시 한국에서 가장 긴 7.1㎞ 콘크리트 포장도로로 ‘공항로’가 원래 도로명이었지만 남진의 노래 ‘김포가도’가 인기를 끌면서 사람들은 ‘김포가도’라 불렀다.
해외여행이 금지된 시절, 외국에 가는 박정희를 포함한 권력자들에게 김포가도는 꽃길이었다. 하지만 정부의 허가를 받아야만 출국할 수 있는 민중에게는 불안과 슬픔이 교차하는 도로였다. 휴전선으로 북쪽이 막혀 있어 국경을 걸어서 넘어갈 수 없다. 당장 먹고살 길이 막막한 민중은 국경을 벗어나야 했다. 1960~1970년대, 외화벌이를 위해 이 땅을 떠나는 노동자들의 행렬이 이어졌다. 서독에 파견된 간호사와 광부 1만8000명, 중동 사막의 노동자는 하루 1000명, 미국 노동이민 매년 2만명, 그리고 해외 입양아 7000명 등이 김포가도를 거쳐 김포공항을 통해 나라 밖으로 나갔다.
당시 김포공항은 생이별 장소였다. “구름 저 멀리 사라져간 당신을 못 잊어 애태우며”(문주란 ‘공항의 이별’), “떠나갈 그 사람 공항은 슬퍼”(바니걸즈 ‘김포공항’), “떠나기를 아쉬워한 사람을 보내고 돌아오는 김포가도”(남진 ‘김포가도’) 등 당시 사회상을 반영한 유행가 가사처럼 김포공항에는 출국자 배웅을 위해 가족뿐 아니라 친척까지 나왔다. 장시간 비행 후 도착할 외국 땅은 말도 통하지 않고 음식도 입에 맞지 않으며, 인종차별까지 받을 거라는 걱정이 이별의 슬픔을 눌렀다. 막장인 광산, 사막, 그리고 시신 닦는 병원에서 일하다가 죽지 않고 돌아올지, 보증할 수 없는 상봉의 미래에 떠나는 자와 보내는 자는 분수처럼 눈물을 흘렸다.
2024년 공항대로(옛 김포가도) 사진에선 양화대교(옛 제2한강교)와 서울화력발전소(옛 당인리발전소)가 고층빌딩에 가려 보이지 않지만 1971년 사진엔 나타난다. 귀국한 노동자들이 김포가도에서 제2한강교와 당인리발전소를 보고 ‘아~ 살아서 집에 돌아왔다’고 안도의 한숨을 내쉴 때, 박정희가 산업역군, 애국자로 칭한 이들을 환영하는 분수는 한 줄기도 올라오지 않았다.
김형진 셀수스협동조합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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