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도권서 표 잃는 소리 들려”… 친박계 등장에 불안한 여당
“수도권에서 표 잃는 소리가 들립니다.”
이번 총선에서 수도권 험지에 출마한 한 국민의힘 예비후보는 정부가 2024년 설 명절을 맞이해 단행한 특별사면을 두고 이처럼 표현했다. 그는 “우리 국민의힘의 텃밭인 영남지방에선 모르겠지만 수도권에선 여전히 국정농단 사태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이 강하다”며 “윤석열 정부는 공정과 정의를 앞세워 정권창출에 성공했다. 이번 선거 또한 사법리스크의 민주당을 심판한다는 취지가 강한데 연일 친박계 인사들이 언론에 오르내리며 부정적인 이슈가 쏟아지면 결국 수도권 승리는 힘들어질 것”이라고 내다봤다.
정부가 이날 발표한 특별사면 대상 980명에는 박근혜 정부 당시 ‘왕실장’으로 통한 김기춘 전 청와대 비서실장과 대북응징의 아이콘으로 ‘레이저김’이라는 별칭을 얻은 김관진 전 청와대 국가안보실장 등 친박계 인사들이 포함됐다. 이에 수도권과 중도층에서의 표심이 필요한 국민의힘 내부에선 국정농단이 또다시 소환될 것이란 우려의 목소리가 제기되고 있다. 최근 국정농단에 연루됐던 최경환 전 경제부총리 등 인사들이 대거 총선에 출마했고, 박근혜 전 대통령 마저 자신의 회고록 관련 북콘서트를 개최하는 등 사실상 정치적 행보에 나서면서 “수도권에서 표잃는 소리가 들린다”는 일부 현역 의원들의 볼멘소리가 들린다.
정부가 이날 발표한 사면복권자 중에서 전직 주요공직자는 24명이다. 특히 문화계 블랙리스트 사건과 댓글공작 사건으로 각각 실형을 선고받은 김 전 비서실장과 김 전 장관은 이번 사면으로 잔여 형기를 면제받고 복권됐다.
김 전 비서실장은 박근혜 정부 시절 비판적 태도를 보인 문화·예술계 단체 명단을 작성하도록 지시하고 이들을 정부 지원 대상에서 배제한 혐의로 기소됐고, 지난달 말 파기환송심에서 징역 2년을 선고받았다.
김 전 장관은 2012년 총선과 대선 전후 군 사이버사령부 부대원에게 당시 정부와 여권을 지지하고 야권을 비난하는 댓글 9000여개를 작성하도록 지시한 혐의로 재판에 넘겨져 지난해 8월 서울고법 파기환송심에서 징역 2년을 선고받았다.
이들은 이번 총선에 출마하진 않는다. 하지만 현재 수도권 험지에 사활을 걸고 있는 상황에서 박근혜 정부 당시 인지도가 높은 인사들이 또다시 언론에 이름이 오르며 수도권 험지에 출마한 예비후보들은 불편한 기색을 감추지 않고 있다.
수도권 유권자들은 지금까지 국정농단 사태에 대해 냉정한 자세를 유지해왔다. 검찰이 최순실 특별수사본부를 확대하고 대학가 시국 선언 및 촛불집회가 시작됐던 지난 2016년 11월 서울 지역의 박근혜 전 대통령에 대한 긍정평가는 불과 2%로 대구와 경북(10%), 부산과 울산, 경남(9%)에 비해 현저히 낮은 수치를 기록했다. (한국갤럽, 2016년 11월 1~3일, 휴대전화 RDD, 전국 만 19세 이상 남녀 1005명, 표본오차: ±3.1%포인트(95% 신뢰 수준), 응답률: 27%)
당시 박근혜 전 대통령의 전국 지지도는 5%에 불과했는데 이는 과거 IMF 외환위기를 맞은 김영삼 전 대통령이 5년 차 4분기에 맞은 6%의 직무평가보다 못한 수치다.
단순히 친박계 인사들이 등장한 것만으로 수도권에서 국정농단이 큰 논란이 될 가능성은 없다. 문제는 다가오는 총선에서 이미 친박계 인사들 다수가 출사표를 던지며 논란을 자초했다는 데 있다.
대표적인 친박계 인사인 최경환 전 부총리는 지난달 29일 경북 경산역 광장에서 경산 지역구 출마 선언식을 열었다. 국민의힘 복당에 실패한 그는 무소속 출마를 선언하면서 결국 국민의힘 내부에선 ‘각자 길을 간다’는 평가가 나왔다.
최 전 부총리는 출마 선언식에서 “대통령을 지키지 못하고 정권을 빼앗긴 자신을 책망하며 묵묵히 정치적 책임을 떠안았다”고 말해 여전히 ‘친박’이란 점을 강조했다.
이 밖에 김재원 전 국민의힘 최고위원, 진박 감별사로 불렸던 조원진 우리공화당 대표, 박 전 대통령의 복심 유영하 변호사 등이 일찌감치 이번 총선에 출사표를 던진 옛 친박계 인사다.
이들은 윤석열 정부 창출에 기여하면서 친박계 색채가 희석된 서병수(부산 부산진갑), 윤상현(인천 동미추홀을), 김정재(경북 포항북), 추경호(대구 달성) 의원 등과 달리 여전히 친박계 색채가 짙다는 점이 보수권에서 약점으로 통한다. 무엇보다 정부와의 공조를 통해 각종 지역 내 사업을 추진해야 하는데 무소속이거나, 현 정부와의 정치적 접점이 크지 않은 만큼 유권자들을 설득하기가 쉽지 않다는 게 단점으로 꼽힌다.
“정치적 친박은 없다”는 메시지로 친박계 결집에 선을 그은 박 전 대통령 마저도 전날 대구에서 자신의 회고록 출간을 기념하는 북 콘서트를 열었다. 박 전 대통령은 유 변호사와 함께 북콘서트를 진행하며 그에게 힘을 실어줬다.
◆文정부의 탄압? 민주당 “농단세력의 권력 야욕”
특히 친박계 인사들이 총선에 나온 곳 대부분이 박근혜 전 대통령의 정치적 근거지인 TK(대구·경북)이라는 점도 논란이다. 경북 경산의 최 전 부총리를 포함해 김 전 최고위원은 경북 군위의성청송영덕, 조 우리공화당 대표는 대구 달서병, 유 변호사는 대구 달서갑 등으로 모두 보수색이 짙은 곳이다. 최 전 부총리가 무소속으로 나오면서 현역인 윤두현 국민의힘 의원과 한판 대결을 예고하고 있는 경북 경산을 제외하고는 공천이 사실상 당선인 곳이다.
민주당 등 야권은 친박계 인사들의 등장에 비판을 가하고 있다. 민주당 경북도당은 지난달 논평에서 “친박 실세 최경환 전 부총리는 총선 출마를 접고 경산시민들에게 사과하라”며 “자신의 범죄를 정치 보복 희생양으로 포장해서는 안 된다”고 지적했다.
앞선 출마기자회견에서 최 전 부총리가 “경산시민 대부분이 문재인 정권의 정치 보복 탄압의 희생양이라고 알고 계신다”다고 표현한 점을 문제 삼은 것이다. 2018년 국가정보원으로부터 1억원의 뇌물을 수수한 혐의로 구속됐던 그는 2022년 윤석열 정부에서 특별사면을 받았다.
민주당은 또 “김재원 전 최고위원, 유영하 변호사, 조원진 우리공화당 대표 등 국정농단으로 대한민국을 대혼란에 빠뜨린 인물들이 자숙해야 함에도 반성은커녕 총선에 대거 출마하는 것은 대구·경북 유권자들을 무시하는 행태”라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농단 주범으로 처벌까지 받고도 또 권력 야욕을 부리는 최 전 부총리는 후보직에서 사퇴하고 시민들에게 진심으로 사과하고 자숙하라”고 촉구했다.
김건호 기자 scoop3126@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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