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꾸지람하심에 분이 나서..." 왕 구타한 간 큰 궁녀의 말로

이준목 입력 2023. 12. 7. 14: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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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 리뷰] tvN STORY <벌거벗은 한국사>

[이준목 기자]

 tvN STORY <벌거벗은 한국사>의 한 장면.
ⓒ tvN STORY
 
궁녀(宮女)는 왕정시대에 궁궐에서 근무하며 왕실의 운영을 뒷받침한 숨은 조력자들이다. 하지만 기나긴 역사 속에서 궁녀들의 이야기는 대부분 그림자에 머물며 제대로 조명되지 못했다. 평생을 궁궐에서 보내야 했던 만큼만 신비롭게 비춰지기도 했지만 한편으로 말 못할 고충도 많았던 게 궁녀들의 삶이었다. 어쩌면 그녀들도 누군가를 사랑하고 또 사랑받고 싶었던 평범한 여성들 아니었을까.

조선시대에 궁녀의 금기를 깬 역대급 돌발행동으로 실록에까지 수 차례 이름을 남긴 한 문제적 여성이 있었다. 12월 6일 방송된 tvN 스토리 역사스토리텔링 <벌거벗은 한국사> 85회에서는 '조선의 문제적 궁녀들-태종 이방원은 왜 궁녀 장미에게 폭행당했나'편을 통하여 우리가 몰랐던 조선시대 궁녀들의 삶을 조명했다.

궁녀들은 왕실 내명부(內命婦)에 소속되어 품계에 따라 직책이 주어지고 월급을 받았다. 이들은 단순한 하녀나 시종이 아니라 국가로부터 그 사회적 지위와 능력을 인정받는 엄연한 전문직 여성들이었다.

<경국대전>에는 궁녀들을 품계에 따라 정7품부터 종9품까지를 나인(內人), 정5품부터 종6품까지는 상궁(尙宮)이라 칭했다. 상궁은 다시 직책에 따라 제조상궁(提調尙宮), 부제조상궁(副提調尙宮), 지밀상궁(至密尙宮), 감찰상궁(監察尙宮) 등으로 나누어지는데, 이 중에서 궁녀 전체를 통솔하는 제조상궁은 국왕과 왕비의 최측근으로 인정받으며 정승들조차 함부로 대하지 못했다고 한다.

정1품에서 종4품까지는 후궁(後宮)으로 왕의 승은(承恩)을 입어 왕손을 낳아야만 정식으로 책봉될수 있었다. 그 위로는 바로 내명부의 수장인 왕비가 있다. 이처럼 내명부는 피라미드형으로 철저한 서열구조를 바탕으로 운영되고 있었다.

궁녀들은 국가로부터 쌀, 콩, 북어 등을 월급으로 지급받았고, 기본급 외에도 옷값과 식비, 명절수당 등이 주어졌다. 지위가 높아질수록 월급도 증가하며 상궁 이상의 지위에 오르면 정5품 이하 고위급 양반 관료들과 비교해도 수입이 뒤지지 않을 정도였다.

하지만 이러한 궁녀가 되는 길은 결코 쉽지 않았다. 궁녀의 자격을 얻기 위해서는 조상이나 가까운 친적 중에 죄인 혹은 역병을 앓은 전력이 없는 여성이어야 했다. 궁녀들은 대개 10세 이하의 어린 소녀들 중에서 선발되었으며 반드시 성 경험이 없는 순수한 처녀여야만 했다. 당시 민간 요법에 따라 궁녀 후보들은 팔에 앵무새의 피를 떨어뜨려 흐르지 않고 남아있는지 여부에 따라 처녀인지를 판별했다.

또한 궁녀 후보들은 연습생에 해당하는 '생각시(견습나인)' 생화를 거쳐야 했으며 15년 정도 교육을 받고 20세를 전후해서 관례(성인식)를 치르고 나서야 겨우 정식 나인이 될 수 있었다. 중간에 본인의 의지로 포기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조선 시대 궁녀들의 숫자들은 시기에 따라 변화한다. 건국 초기인 태종 시절만 해도 수십 명 정도에 불과했으나, 왕실의 규모와 구성원들의 숫자가 늘어나면서 궁녀 역시 지속적으로증가했다. 조선 중기에 접어드는 성종(9대) 시절에는 100여 명, 후기인 영조(21대) 시대에 이르면 무려 500~600여 명까지 늘어났다고 한다.

분풀이로 세게 때렸다고 인정한 장미
 
 tvN STORY <벌거벗은 한국사>의 한 장면.
ⓒ tvN STORY
 
궁녀 장미(薔薇)는 조선 초기인 태종-세종 시대에 활동했던 인물이다. 1418년 세종 원년 12월 겨울, 51세의 태종 이방원은 아들 세종에게 양위하고 상왕으로 물러난 상태였다. 장미는 그러한 태종을 모시는 궁녀였다.

어느날 태종은 가까이 있던 장미를 불러 무릎을 주무르게 했다. 하지만 장미의 안마가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태종은 "솜씨가 시원치 않구나. 좀더 성심을 다하거라"라며 엄하게 꾸짖었다. 그러자 장미는 손에 힘을 다해 다시 무릎을 주무르기 시작했고, 태종은 안마를 받다가 어느새 슬쩍 잠이 들었다.

잠시후 태종은 돌연 화들짝 놀라 잠에서 깨어났다. 그의 두 눈앞에는 놀라운 광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장미가 태종의 다리를 주먹으로 퍽퍽 때리듯이 거세게 두드리고 있었던 것이다. 왕정시대에 한낱 궁녀가 국왕을 때렸다는 것은 본인만이 아니라 삼족까지 멸할 수도 있는 중대한 사안이었고, 하물며 그 대상은 바로 '피의 군주'로 유명한 태종 이방원이었다.

기가 막힌 태종이 이유를 추궁하자, 변명은 커녕 장미의 대답이 걸작이었다. 실제 <세종실록>에는 장미가 태종에게 "꾸지람하심에 분이 나서 조심없이 두드렸다"고 대답했다고 버젓이 기록되어 있다. 한마디로 상전인 국왕의 질책에 일개 궁녀가 열받아서 분풀이로 세게 때렸다고 솔직히 인정한 것이다. 이를 통하여 장미라는 여성이 굉장히 당돌하고 거침없는 성격이었음을 짐작케 한다.

놀랍게도 태종은 장미를 처소에서 쫓아냈을 뿐 당장 큰 벌을 내리지는 않았다. 이를 두고 장미가 태종을 가까이서 안마했다는 것이나, 당돌하게 왕 앞에서도 할말을 다하던 태도를 감안할 때, 그녀가 이전부터 태종의 신임을 받던 지밀궁녀(至密宮女)였을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추정된다.

2년 뒤인 1420년, 장미의 이름이 다시 실록에 등장한다. 세종의 처소에서 근무하던 소비라는 궁녀가 왕비이자 내명부의 수장인 소헌왕후의 의복을 찢는 사건이 벌어진다. 소비는 소헌왕후가 쓸데없는 일을 시켰다며 앙심을 품고 고의로 저지른 일이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상왕 태종은 일개 궁녀의 믿기 힘든 돌발 행동에 크게 분노했다.

그런데 <세종실록>에는 태종이 "대전 시녀(소비) 한 사람이 공비(소헌왕후)의 옷을 찢어버렸다하니, 그 죄가 장미와 같은 것이다"라며 갑자기 이 사건과 무관한 장미를 굳이 언급한 대목이 등장한다. 뒤끝있는 태종은 사실 2년 전 안마사건을 아직까지 잊지 않고 있었고, 이 기회에 궁녀들의 기강을 잡는다는 명목으로 본보기를 보이기 위하여 장미까지 끌어들인 것이다. 신하들은 문제를 일으킨 두 궁녀를 반역죄로 처벌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심지어 태종은 '물에 넣든지, 아니면 목을 졸라 죽이라'고 지시하기도 했다.

하지만 <세종실록>에 따르면 세종은 문제를 일으킨 궁녀들에게 혐의를 조사하고 자백만 받으라고 지시했을뿐, 실제로 극형을 내리지는 않았다. 장미가 어떤 진술을 하고 처벌을 받았는지는 기록에 남아있지 않지만, 그녀가 당시 무사했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몇 년 후 실록에 다시 장미의 이름이 버젓이 등장하기 때문이다.

거짓말로 출궁한 뒤 남자와 사통까지...
 
 tvN STORY <벌거벗은 한국사>의 한 장면.
ⓒ tvN STORY
 
조선은 명나라와 사대관계를 유지하며 각종 물품과 인력을 조공으로 바쳤다. 당시 명나라 황제 선덕제는 조선에 요리, 가무, 허드렛일 등에 능한 여성들을 보내달라고 요구했다. 1427년 조선에서 파견한 명나라 황실을 모실 여종들의 명단에는 장미의 이름도 포함되어 있었다.

명나라 황실에 보내는 인력이었던 만큼 세종이 직접 관여하여 꼼꼼하게 인원을 선발할 정도였다. 이 명단에 포함되었다는 것은 장미가 단순한 궁녀가 아니라 나름대로 능력을 인정받은 인재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원래대로라면 장미는 이제 남은 평생을 명나라에서 보내야 할 운명이었다. 그런데 선덕제가 몇 년 후 사망하면서 명나라 황실에서는 조선 출신 여종들 중 몇몇을 고국으로 돌려보낼 것을 결정했다. 장미 역시 그 명단에 포함되어 8년 만에 정든 고국으로 다시 돌아올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귀국한 지 얼마되지 않아 장미의 이름은 또다시 논란의 중심에 서게 된다. 1435년 5월, 병을 핑계로 궁밖으로 외출했던 장미가 세종의 5촌 조카인 신의군 이인과 사통한 혐의로 적발된 것. 장미는 거짓말로 출궁한 데 이어 술자리에서 여러 남자들과 어울렸고 심지어 외박까지 한 것이 드러났다.

<속대전>에 따르면 조선의 국법상 궁녀는 왕의 승은이 아니면 평생 수절해야 했다. 외간 남자와 사통한 궁녀는 대역죄와 맞먹는 엄벌의 대상으로 취급되어 남녀 모두 참수하게 되어 있었다. 가뜩이나 이미 태종 안마폭행사건으로 막장 궁녀 취급을 받으며 거의 죽다가 살아났던 장미였기에 외간 남자와의 스캔들은 더욱 치명적이었다.

하지만 장미는 이번에도 놀랍게도 혐의를 밝히지 못하여 처벌을 면했다. 오히려 세종의 조카인 이인만 평안도로 유배를 가는 것으로 사건을 마무리했다.

이인과의 스캔들 이후 9년이 흐른 1444년 1월 11일, 장미가 돌연 의금부로 붙잡혀가는 사건이 발생한다. 유배를 갔던 이인이 장미와의 스캔들에 억울함을 호소하며 그녀와 사통한 진짜 남자가 자신이 아니라 김경재라는 인물이었다고 폭로하고 나선 것. 심지어 이인과 김경재는 처남-매부지간이었다.

의금부에서는 장미와 김경재를 붙잡아 재수사에 돌입했다. 김경재는 결국 장미가 자신의 집에서 함께 숙박했던 것을 인정했다. 그러나 장미는 김경재와 사통한 것이 아니라 이인의 할머니를 모시고 가서 함께 잔 것 뿐이라고 주장했다.

그해 5월 8일, 의금부는 조사결과, 궁녀의 신분으로 외간 남자들과 놀아났다는 혐의로 끝내 장미와 김경재, 이인 세 사람에게 모두 참수형을 구형한다. 억울하다고 주장했던 이인 역시 실제로는 장미와 내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하지만 세종은 판결을 뒤집어 김경재는 관노로 강등시키고 이인은 유배지로 돌려보내는 것으로 처벌을 낮췄으나, 오직 장미만 참수형을 내리도록 지시했다. 이에 신하들이 세 사람의 죄가 막상막하인데 두 남자의 죄만 눈감아준다면 이치에 맞지 않다고 주장했으나, 세종은 "장미는 거짓말(병을 핑계로 출궁한 것)로 죽는 것이지, 간통 때문에 벌을 받는 것이 아니다"라는 논리로 자신의 결정을 굽히지 않았다.

세종은 장미를 처형하는 데 그치지 않고 집안의 재산을 몰수하는 한편 아버지는 귀양을 보내고 어머니와 형제들은 관노비로 삼는 비정한 후속조치까지 내렸다. 태종 때부터 세종 때까지 여러 가지 문제적 사건에 연루되고도 불사조처럼 살아났던 장미는, 끝내 궁녀의 본분을 지키지 못했다는 죄목으로 오명을 뒤집어쓴 채 궁궐에서 사라져야 했다.

실록에는 장미 외에도 궁녀와 관련된 스캔들이 간간이 등장한다. 18대 현종 시절에는 귀열이라는 궁녀가 승은을 입지 않았음에도 임신한 사실이 드러나 궁궐이 발칵 뒤집혔다. 수사 결과 드러난 더욱 놀라운 사실은 귀열과 사통한 남자가 바로 그녀의 형부였다는 것이다. 현종은 귀열이 출산하기를 기다렸다가 그녀를 처형했다.

또한 조선 7대 세조 시절에는 덕중이라는 궁녀가 승은을 입었음에도 세조의 조카인 귀성군 이준을 짝사랑하여 몰래 연애편지를 보냈다가 적발 당한 사건이 벌어진다. 분노한 세조는 덕중을 비롯하여 연애편지를 귀성군에게 전달한 두 환관까지 모두 처형시켰다. 다만 귀성군만은 덕중의 일방적인 짝사랑이었다는 이유로 처벌을 면했다. 이처럼 궁녀에게는 그저 순수한 짝사랑조차도 용납되지 않는다는 것이 조선 사회의 현실이었다.

조선 시대에 실록에 이름을 남긴 궁녀들은 장미나 귀열, 덕중처럼 금기를 어긴 문제적 궁녀들이었다. 물론 그녀들이 도덕적으로 비판을 받을 수는 있겠지만 과연 죽어야 할 만한 죄까지 지었다고 볼 수 있을까. 그녀들은 비록 궁궐의 법도를 어겼다는 죄로 비극적인 운명을 맞이해야 했지만, 현대의 기준으로 봤을 때는 오히려 자신의 감정에 충실하며 저마다의 욕망과 흠결이 공존했던 평범한 여인들은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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