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법 "정당방위 상황 오인한 상해… 정당한 이유 있으면 무죄"
정당방위 상황이 아닌데도 정당방위 상황이라고 잘못 알고 상해를 입혔더라도, 그 같은 오인에 '정당한 이유'가 있다면 처벌할 수 없다는 대법원 판결이 나왔다.
22일 법조계에 따르면 대법원 2부(주심 천대엽 대법관)는 상해 혐의로 기소된 A씨(23)에게 벌금 200만원을 선고한 원심을 무죄 취지로 파기하고 사건을 서울북부지법으로 돌려보냈다.
재판부는 "원심의 판단에는 위법성조각사유의 전제사실에 관한 착오, 정당한 이유의 존부에 관한 법리를 오해함으로써 판결에 영향을 미친 잘못이 있다"고 파기환송의 이유를 밝혔다.
서울 성북구에 있는 한 복싱 체육관의 코치로 일했던 A씨(사건 당시 23세)는 2020년 11월 4일 체육관 관장(사건 당시 33세)과 몸싸움을 벌이고 있는 체육관 회원 B씨(사건 당시 17세)를 폭행해 전치 4주의 손가락 중간뼈 골절상을 입힌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다.
당시 B씨는 회원 등록을 취소하는 과정에서 관장으로부터 "어른에게 눈 그렇게 뜨고 쳐다보지 말라"는 질책을 받고 체육관에서 나갔다가, 1시간 뒤 다시 돌아와 관장에게 항의했다.
B씨가 "눈을 어떻게 떴냐"고 관장에게 항의하자, 관장은 B씨의 멱살을 잡아당기면서 다리를 걸어 넘어뜨리려고 하고, 출입문 밖 복도로 밀고 나간 후 몸통을 양팔로 꽉 껴안아 들어 올리고, 몸을 밀어 바닥에 세게 넘어뜨린 후 목을 조르거나, 누르고, 옆굴리기를 하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B씨가 왼손을 주머니에 넣어 무언가를 꺼내 들었고, 두 사람의 몸싸움을 지켜보던 A씨는 순간 B씨가 흉기를 꺼내 들었다고 착각, B씨의 왼손을 잡아 쥐고 강제로 주먹을 펼쳤다. 이 과정에서 B씨는 손가락뼈가 골절되는 부상을 입었다.
B씨가 주머니에서 꺼내 손에 쥔 건 흉기가 아니었고, 조그만 휴대용 녹음기였다.
검사는 A씨를 상해 혐의로 기소했지만, 1심 법원은 A씨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재판부는 '상해의 고의가 없었다'는 A씨 측 주장은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A씨에게는 당시 위법성조각사유의 전제사실(정당방위 상황)에 대한 착오가 있었고, 그 착오에 정당한 이유가 있었으므로 위법성이 조각된다"는 A씨 측 주장을 받아들였다.
형법상 본인 외에 부당한 공격으로 위험에 빠진 제3자를 위한 정당방위도 허용되는데, 비록 A씨가 생각한 것처럼 정당방위가 허용될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지만, 사건 당시 A씨는 B씨가 맥가이버칼을 꺼내 들었다고 착각해 주먹에 쥔 물건을 확인하기 위해 폭행을 가했고, A씨가 그렇게 착각하게 된 데에 충분한 이유가 있다고 본 것이다.
재판부는 "만약 A씨가 인식한 대로 실제로 B씨가 흉기를 쥐고 있었다면 관장은 크게 다치거나 목숨을 잃을 수 있었고, 흉기를 뺏기 위해선 손을 강제로 펼치는 방법 외에 다른 수단이 없었다"고 판단했다.
재판부는 "피고인이 위법성조각사유(정당방위)의 전제사실이 있는 것으로 오인한 데에 정당한 이유가 있었다고 봐야 하고, 따라서 형법 제16조에 의해 피고인을 처벌할 수 없다고 할 것"이라고 결론 내렸다.
형법 제16조는 '자기의 행위가 법령에 의하여 죄가 되지 아니하는 것으로 오인한 행위는 그 오인에 정당한 이유가 있는 때에 한하여 벌하지 아니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그런데 2심의 판단은 달랐다.
2심 재판부는 1심 무죄 판결을 뒤집고, A씨에게 벌금 200만원을 선고했다. A씨가 휴대용 녹음기를 흉기로 오인한 데에 정당한 이유가 없다는 이유였다.
재판부는 "관장과 피고인의 직업, 피해자가 17세의 청소년이었던 점, 관장과 피해자의 신체적 차이, 관장이 피해자를 폭행한 상황 등을 고려하면, 관장이 피해자의 몸을 누르는 등 서로 근접해 있었다고 하더라도 피해자가 손에 있는 물건을 이용해 관장에게 위해를 가할 가능성은 작아 보인다"고 판단했다.
또 재판부는 "피고인이 피해자의 손에 있는 물건이 흉기라고 오인할만한 별다른 정황도 보이지 않고, 관장이 피해자를 완전히 제압한 상태여서 피고인이 피해자의 손안에 있는 물건을 빼앗기 위해 피해자의 주먹을 강제로 펴게 할 급박한 상황이었다고 보이지도 않는다"라며 "피고인의 오인에 정당한 이유가 있다고 볼 수 없다"고 봤다.
대법원은 2심 판결을 다시 뒤집었다.
재판부는 "피고인의 입장에서는 피해자가 움켜쥔 물건을 육안으로 확인하기 전까지는 그것이 관장에게 치명적인 손상을 가할 수 있는 위험한 물건에 해당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할 만한 합리적인 이유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이 같은 판단의 근거로 재판부는 ▲관장과 B씨의 외형상 신체적 차이가 크지 않아 보이는 점 ▲B씨가 복싱 체육관에 다닌 경험이 있는 만큼 상당한 정도의 물리력을 행사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던 점 ▲B씨가 관장으로부터 질책을 듣고 1시간 뒤 다시 찾아와 강하게 항의하는 과정에서 몸싸움까지 하게 된 점에서 두 사람의 몸싸움은 일시적·우발적으로 발생한 것이 아니라 B씨가 관장에 대한 항의 내지 보복의 감정을 가진 상태에서 계획적·의도적으로 다시 찾아와 발생한 점 ▲A씨가 착각했다고 주장하는 '호신용 작은 칼'과 휴대용 녹음기는 크기나 길이 등 외형상 큰 차이가 없는 점 ▲관장에 의해 B씨가 완전히 제압된 상태였다는 검사의 주장과 달리 당시 B씨가 왼손으로 휴대용 녹음기를 움켜쥔 상태에서 이를 활용함에 별다른 장애가 없었던 것으로 보이는 점 등을 들었다.
한편 1심 무죄 선고 이후 검사는 공소장의 공소사실 중 A씨가 한 행위의 이유·동기에 관해 '위험한 물건으로 착각해 빼앗기 위해서'라고 기재돼 있던 부분을 삭제하는 공소장변경을 신청해 허가를 받았다.
이에 대해 재판부는 "이러한 수사기관의 인식이야말로 당시 상황에 대한 객관적 평가이자 피고인이 피해자의 행동을 오인함에 정당한 이유가 있었음을 뒷받침하는 사정에 해당하고, 1심이 피고인의 행위에 위법성이 없다고 판단한 주된 이유이기도 하다"라며 "사정이 그러한 이상 비록 원심에서 공소장변경을 통해 이 부분 기재를 공소사실에서 삭제했다고 해서 수사기관의 당초 인식 및 평가가 소급해 달라질 수 없다"고 지적했다.
이번 사안은 학계에서는 오상방위나 오상피난 등 '위법성조각사유의 전제사실에 관한 착오'로 오랫동안 논의돼 왔다.
가령 배달원을 강도로 착각하고 폭행한 경우처럼 본인은 정당방위를 한다는 생각으로 폭력을 행사했는데, 실제는 전혀 그런 상황이 아닌 경우를 법적으로 어떻게 취급할 것인지의 문제다.
형법상 착오는 크게 사실에 관한 착오와 법률에 관한 착오 2가지가 있다. 구성요건적 사실을 착오한 경우 '특별히 무거운 죄가 되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한 행위는 무거운 죄로 벌하지 아니한다' 형법 제15조에 의해 고의가 조각된다. 반면 위법성에 대한 인식이 결여된 법률의 착오(금지착오)의 경우 형법 제16조에 따라 '정당한 이유'가 있을 때 책임이 조각된다.
위법성조각사유의 전제사실에 관한 착오는 행위 당시 허용되는 상황, 즉 행위 시의 사태에 관한 사실적인 측면에 착오가 있었다는 점에서는 사실의 착오에 가깝지만, 자신의 행위가 위법하지 않다고 믿었다는 점에서 위법성을 인식하지 못한 법률의 착오와 유사한 측면을 동시에 갖고 있다. 대법원은 일부 다른 법리를 적용한 사례도 있었지만, 대체로 이번 사안과 같이 형법 제16조의 법률의 착오 규정을 적용, 정당한 이유가 있었는지 여부에 따라 유무죄를 판단해왔다.
최석진 법조전문기자 csj0404@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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