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명의 별, 가슴에 묻지 않고 부활시키겠다
김혜영씨는 2016년 방송계 노동착취를 고발하며 생을 마감한 이한빛 PD의 어머니다. 같은 슬픔을 겪는 유가족을 만나 연대하고 위로했다. 이태원 참사 생존자·유가족 구술집 <우리 지금 이태원이야>에 작가기록단으로 참여했다. 이한빛 PD의 기일은 참사일 사흘 전인 10월26일이다. _편집자주
그날. 잠자리에 들기 전에 무심히 휴대전화를 열었다. 스쳐 지나는 어느 단체대화방에 ‘이태원 압사’라는 기사가 올라왔다. ‘이태원’이란 단어가 낯익다 하면서도 먼 나라 지명이려니 했다. 그러다 아, 이태원? 우리나라 서울 아니야? 이게 도대체 뭐지? 그러나 기사를 열어볼 수 없었다. ‘압사’라는 단어가 주는 참혹함과 ‘이태원이라면 혹시 희생자 대부분이 젊은이 아닐까’ 하는 불안으로 가슴이 떨렸기 때문이다.
나처럼 안간힘으로 버틸 그들을 위해
서울 용산구 지하철 녹사평역 분향소를 설치한 다음날, 마음을 굳게 먹고 이태원을 찾았다. 심호흡을 크게 했는데 분향소의 젊고 환한 너무나 아름다운 얼굴들과 맞닥뜨린 순간 숨이 막혔다. 한명 한명 얼굴 위로 한빛이 겹쳐지면서 눈물이 쏟아졌다. 모두가 나의 아들 한빛이었다.
어느 날 갑자기 아들을 잃고 정신없던 나날이 와다닥 달라붙었다. 이 믿기지 않는 현실을 가족들은 어떻게 견뎌내고 있을까? 시간을 돌리고 싶어 얼마나 발버둥 치고 있을까? 내가 유가족이라서일까? 분노와 무력감으로 간신히 살아내고 있을 가족들이 먼저 떠올랐다. 그들도 나처럼 어느 날 갑자기 유가족이 됐는데 얼마나 받아들이기 힘들고 밀어내고 싶고 현실을 부정하고 싶을까? 내가 그렇게 지나왔듯 그날 이후로 멈춘 시간을 부여잡고 하루하루를 안간힘으로 버텨내고 있을 것이다.
7년이 지났어도 아들이 내 곁에 있는 것 같은데. 아들이 없어도 꼬박꼬박 밥을 챙겨 먹고 아름다운 가을 하늘도 바라보고 아플까봐 병원을 찾는 것 모두가 혐오스러운데. 행복이란 단어를 잊은 채 순간순간 밀려오는 울음덩어리에 허우적대는데. 이런 내 일상을 이태원 참사 유가족이 똑같이 살아가리라 생각하니 가슴이 먹먹했다.
그들을 위해 뭐라도 하고 싶었다. 내가 살아온 진공의 삶을 이태원 유가족들이 똑같이 살게 할 수는 없었다. 시청분향소 지킴이 신청을 하고 매주 서울 가는 기차를 탔다. 대전 국민의힘 당사 앞에서 지나가는 시민들과 눈이 마주치기를 간절히 주문하며 특별법 제정 촉구 피켓을 들었다. 뜨거운 여름날 국회까지 걸었다. 보라 리본을 같이 만들었다. 시국미사에 참석해 간절히 기도했고, 서울에 갈 때면 159명을 만나기 위해 먼저 시청역으로 갔다.
유가족을 만나 자녀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얼마나 반듯하고 얼마나 선하고 얼마나 괜찮은 아이였는지 듣고 또 들었다. 곁에 서 있기만 해도 고마웠고 힘을 얻었던 옛 기억으로 그들의 곁에 서 있고 싶었다.
그렇지만 집에 돌아오면 감기 걸린 것처럼 추웠고 아들이 사무치게 그리웠다. 이러면서 누구를 위로한다는 건지 한심했다. ‘너를 가슴에 묻지 않고 부활시키겠다. 네가 이 사회에 던지고자 했던 메시지가 실현될 때까지 엄마로서 최선을 다하겠다’고 아들에게 약속했건만 나는 아직도 일어서지 못하고 있었나?
기억은 힘이 세다
그럼에도 그들의 손을 잡아주고 부축하고 싶어 ‘이태원참사 작가기록단’에 참여했다. 이태원 참사 유가족과 생존자 이야기를 기록한 책 <우리 지금 이태원이야> 중 형제자매 유가족을 맡았다. 유가족이 유가족을 인터뷰한다는 게 부담이 됐지만 부딪치기로 했다. 유가족이기에 ‘측은지심'이나 ‘동정'이 아닌 ‘공감'으로 다가갈 수 있을 것 같았다. 가장 가까이 다가갈 수 있고 그들의 마음을 가장 잘 전달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부끄럽지만 세월호에 대한 내 인식이 그랬기 때문이다. 슬프고 분노했지만 거기까지였던 것 같다. 내 일이 아니었다. 유가족의 마음속에 들어가 그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공감’을 아들을 잃고 나서야 알았다. 그제야 세월호를 가슴에 품을 수 있었다. 또한 혐오의 말들에 직면해 진실을 알려줘야 했다. 2차 가해가, 함부로 씌우는 잘못된 프레임이 유가족에게 얼마나 큰 상처를 주는지 외쳐야 했다. 그렇게 그들을 지키고 싶었다.
나도 겪었지만 참사로 자식을 잃은 유가족들은 정상적인 애도의 과정을 거치지 못한다. 자식이 죽어도 애도는커녕 슬픔을 누른 채 진상규명을 해야 하고 거리에서 투쟁하느라 애도는 뒤로 미뤄진다. 특히 이태원 참사처럼 1년이 되도록 아무것도 바뀐 것 없고 절망적일 때 기약 없이 유보되는 애도는 유가족을 피폐하게 한다. 159명의 우주가 사라졌는데 국가도 사회시스템도 그 누구도 책임지지 않고 유가족 개인이 알아서 추모하고 치유해야 하는 이 현실은 또 하나의 폭력이다.
사랑하는 가족의 특히 젊은 죽음은 시간이 흐른다고 옅어지지 않는다. 참사에서 동생을 잃은 언니는 말했다. 예전에는 욕심도 많고 하고 싶은 것도 많았지만 지금은 무기력하다고. 참사 이후 동생을 잃고 모든 게 변했다고. 언제 다시 예전처럼 돌아갈지 모르겠다고 했다. 유가족은 이렇게 살고 있다. 나도 그렇기에 그들을 위로하고 싶었고 그들이 기댈 수 있는 언덕이 되고 싶었다.
‘한빛 엄마’로 씩씩하게 살겠다
그래서 ‘기억'이란 말을 그 어느 말보다 아끼고 사랑한다. 내가, 우리 가족이 아들 없이도 7년간 버텼든, 견뎌냈든, 살아온 것은 아들을 기억해주고 곁에 있어준 사람들 덕분이기 때문이다. 이태원 기억의 벽에 쓰여 있듯이 기억은 힘이 세다. 아들을 인연으로 나는 많은 사람을 만났고 그 인연은 나에게 ‘연대'와 ‘나눔' ‘부축하는 삶'을 가르쳐줬다. 내 남은 인생을 채워나갈 멋진 선물이다.
이태원 참사 1주기를 추모하며 기억해달라고 호소하는 유가족의 목소리에 귀 기울일 의지와 동정에 멈추지 않고 실천까지 함께하는 공감의 마음이 많아지기를 바란다. 나 역시 아들과 159명의 별이 살아가고 싶었던 미래를 이어가기 위해 한빛 엄마로 씩씩하게 살아가겠다.
김혜영 고 이한빛 PD 엄마·이태원참사 작가기록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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