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에게 빌려준 돈은 되돌려받기 어렵다
우리는 보통 채무자에 대해 이렇게 생각한다. 돈이 꼭 필요한데 가진 돈이 없어 주변 사람이나 은행으로부터 돈을 빌린다. 돈을 빌렸으니 갚아야 한다. 돈을 갚기 위해 열심히 일하고 돈 관리도 하는데 갚을 돈이 잘 모이지 않는다. 돈을 갚으려 노력하는데도 채권자는 계속 돈을 갚으라고 난리다. 스토커처럼 전화하고, 찾아와 협박도 한다. 자신뿐 아니라 가족이나 지인 등 주변에까지 소문을 내며 돈 갚으라고 난리를 친다. 돈밖에 모르는 냉혹한 채권자와 돈이 없어 고통당하는 불쌍한 채무자. 이것이 채권자와 채무자에 대한 일반적 인식이다.
대비 없이 돈 빌리는 사람들
‘제국의 통로(The Path of Empire)'라는 책이 있다. 1900년대 초 조지 린치가 시베리아횡단열차를 타고 유라시아 대륙을 횡단하면서 주변국에 대해 쓴 책이다. 린치는 일본에서 여행을 시작해 조선을 거쳤고, 이후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시베리아횡단열차를 탔다. 책에는 당시 조선의 생활상과 일본과의 관계에 관한 내용도 적잖게 담겼다.‘제국의 통로'에는 일본인 체권자와 조선인 채무자에 대한 인상 깊은 에피소드가 나온다. 조선인이 일본인으로부터 돈을 빌렸는데 계약 조건이 굉장히 부당하다. 돈을 갚지 않으면 자기 집을 일본인에게 넘긴다는 조건이다. 이 조건 때문에 많은 조선인이 일본인에게 집을 빼앗겼다. 저자는 조선인이 일본인을 미워하는 건 당연하다고 이야기한다.
저자는 조선인에 대해 긍정적이지만은 않다. 조선인은 돈을 빌리면서도 아무런 대비도 하지 않는다. 돈을 빌렸으면 갚으려 노력해야 하는데 아무런 대비가 없다. 그냥 "갚겠다" 말만 하고, 결국 채권자인 일본인에게 집을 빼앗기고 만다.
이 에피소드를 읽으면서 격하게 공감한 부분은 "돈을 빌린 사람들이 아무런 대비를 하지 않는다"는 대목이다. 돈을 빌린 사람이 갚으려 하지 않고, 돈을 갚기 위해 어떤 행위도 하지 않는다. 그냥 갚겠다고 말만 한다. 내 경험들과 정확히 일치하는 대목이었다.
나는 주변 지인들에게 몇 번 돈을 빌려준 적이 있다. 몇십만 원이 아닌, 천만 원 넘는 돈이었다. 최근 발생한 일이 아니라 최소 10여 년 전 이야기이니, 지금 가치로 따지면 수천만 원은 될 테다. 그렇게 몇 명에게 몇 번 돈을 빌려줬는데, 빌려준 돈을 한 번도 되돌려받지 못했다. 빌려주면 받지 못한다. 내 경험상으로 그랬다.
어려우니까 돈을 빌린 것이고, 그 후에도 일이 안 풀리다 보니 갚지 못했을 수 있다. 그런데 돈을 빌려간 사람은 몇 번 만나 얼굴만 아는 사이가 아니다. 오랫동안 친구로 지내온 사람들이다. 당연히 돈을 빌려주기 전후 그가 어떻게 살고 있는지 생활을 다 안다. 한 지인은 돈을 빌린 후 가족이 해외여행을 갔다. 해외여행을 가기로 가족과 약속했다는 이유에서다. 물론 가족과 약속하면 지켜야 한다. 그렇다면 돈을 갚겠다는 약속은 어떻게 된 것일까. 가족이 해외여행을 갈 돈이면 빌린 돈을 충분히 갚을 수 있었다. 돈이 생기면 가족과 한 약속을 지킨다. 하지만 빌린 돈을 갚겠다는 약속은 미룬다.
돈을 빌려간 다른 친구는 새 차를 샀다. 생활하면서 차는 꼭 필요하다는 이유에서다. 새 차를 살 액수면 충분히 빌린 돈을 갚을 수 있다. 하지만 돈을 갚기 전 일단 차부터 샀다. 새 아파트로 이사 간 사람도 있다. 돈이 많이 들었지만 자기 돈이 아니라 가족이 보태준 것이란다. 집은 구할 수 있지만 갚을 돈은 없다는 것이다.
칭찬에서 망각으로
언제쯤 빌린 돈을 갚을까. 해야 하는 일 다 하고, 사고 싶은 것 다 사고, 자식 학비 다 내고, 노후 준비 다 하고, 그 후에 남는 돈이 있으면 갚을 것이다. 그런데 이는 재벌이라도 쉽지 않은 일이다. 재벌이 돼도 새로운 사업을 하고 투자할 돈이 부족한 법이다. 충분히 여유가 생겨 갚을 수 있는 돈 같은 것은 없다.재미있는 지점은 돈을 빌린 사람의 마음이다. 처음에는 나를 굉장히 칭찬했다. "너 덕분에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고, 돈을 빌려줘서 정말 고맙다. 이런 돈을 선뜻 빌려주다니 정말 진정한 친구다" 등 찬사를 보낸다. 몇 년이 지났다. 돈을 빌릴 수 있었던 건 자신이 훌륭해서다. "요즘 세상에 누가 돈을 빌려주나. 하지만 나는 평소 신용이 있었고, 잘 살아왔다. 그래서 친구가 나를 믿고 돈을 빌려줬다. 내가 그동안 잘 해왔기 때문에 돈을 빌릴 수 있었던 것이다"라고 생각한다. 몇 년이 더 지났다. 이제는 돈을 빌렸다는 사실을 잊어버린다. "아, 내가 너에게 돈을 빌렸었지. 갚아야 하는데"라고 한 번씩 떠올릴 뿐이다. 그래도 아직까지는 돈을 빌렸다는 것을 상기해주면 돈을 빌린 사실은 인정한다. 아마 몇 년이 더 지나면 "나는 돈을 빌린 적이 없다. 다른 사람과 착각하고 있는 거 아니냐"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이 경험을 몇 번 하면 돈 갚으라고 닦달하는 채권자는 나쁜 사람이고, 돈을 빨리 갚으라고 독촉받는 채무자는 불쌍한 사람이라는 명제를 받아들일 수 없게 된다. 돈을 갚으려 노력하지만 정말 돈이 없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보통 '이 사람은 돈을 갚을 수 있다'는 판단이 들 때 돈을 빌려준다. 돈을 갚을 능력이 없다고 생각되는 사람에게는 돈을 빌려주지 않는다. 차라리 그냥 준다.
정말 돈이 없는 사람에게는 돈을 갚으라고 닦달하지도 않는다. 돈은 닦달한다고 나오는 것이 아니다. 아무리 닦달해도 돈이 없으면 갚지 못한다. 돈을 빌려준 것을 기회 삼아 다른 이득을 얻으려는 불법 고리대금업자라면 모를까, 돈만을 목적으로 하는 이는 정말 돈이 없는 사람에게는 닦달하지 않는다. 자기 시간만 버리는 일이고, 그 시간에 다른 일을 하는 것이 오히려 이득이기 때문이다.
채무자는 정말 불쌍한 사람인가
사람은 돈을 갚지 않아도 자신에게 해가 없다고 판단하면 돈을 안 갚으려 한다. 갚을 돈이 있어도 마찬가지다. 은행 등 금융기관으로부터 빌린 돈은 갚지 않으면 신용불량자가 돼 금융거래가 제한된다. 그래서 갚으려 한다. 돈을 갚지 않으면 담보물이 경매 처분될 경우에도 갚으려 노력한다. 해결사가 돈을 안 갚으면 가만두지 않겠다고 협박해올 경우에도 무서워서 갚는다. 그럼 그 외 경우는 어떤가. 돈을 갚지 않으면 채권자가 욕하고, 채권자하고 사이가 틀어지기만 할 때 말이다. 그때는 돈을 안 갚는다. 채권자와의 개인적 관계보다 돈이 더 중요해서다.결국 돈을 빌려준 이는 선택해야 한다. 돈을 빌려간 사람에게 계속해서 돈 이야기를 할지, 돈을 포기하고 그냥 관계를 이어나갈지 말이다. 해결사를 동원해 협박하는 등 불법 행위를 하지 않는 한 어차피 빌려준 돈은 받지 못한다. 돈을 못 받아도 그냥 묻어둔 채 계속 친구로 지낼 것인가, 아니면 돈을 안 갚으니 욕하고 다시는 안 볼 사이가 될 것인가 중 선택의 문제다. 나는 돈을 포기했다. 그 친구들을 지금도 계속 보고 있다. 가끔 내가 돈을 빌려줬다는 사실을 상기해준다. 이마저도 안 하면 "너에게 돈을 빌린 적이 있던가" 할지도 모른다. 안 빌린 척하는 것이 아니라, 정말 빌린 사실 자체를 잊어버릴 수 있다.
최근 한 에세이를 읽었다. 저자의 아버지가 사방에 빚을 져 집에 압류 딱지가 붙는 등 어려운 생활을 했다는 내용이다. 그런데 책에서 저자의 아버지는 이런 식의 이야기를 한다.
"빚은 갚지 않아도 돼. 안 갚아도 되는데 갚을 필요가 있나. 그리고 빌려준 사람도 돈을 꼭 받으려고 하는 것은 아닐 거야. 돈을 못 받을 것을 알고도 빌려줬으니 갚지 않아도 상관없어."
빌린 돈을 꼭 갚으려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빌린 돈을 갚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분명 적잖게 존재한다. 돈을 빌려주고 돌려받지 못하는 경험을 몇 번 하면 최소한 모든 채무자가 불쌍하게 희생당하는 사람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최성락 박사는…
서울대 국제경제학과를 졸업하고 서울대 행정대학원에서 행정학 박사학위, 서울과학종합대학원에서 경영학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동양미래대에서 경영학과 교수로 재직하다가 2021년 투자로 50억 원 자산을 만든 뒤 퇴직해 파이어족으로 지내고 있다.
최성락 경영학 박사
Copyright © 주간동아.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