英 브렉시트 후폭풍…금융자산 1600조원 이탈

성상훈 2023. 10. 2. 1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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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들리는 금융허브' 런던을 가다
금융회사·자산, 해외 이전 가속
EU 재가입 요구 목소리 커져
이 기사는 국내 최대 해외 투자정보 플랫폼 한경 글로벌마켓에 게재된 기사입니다.
브렉시트 이후 글로벌 금융 중심지인 영국 런던의 경쟁력이 약화하고 있다는 지적이 늘고 있다. 영국 국기를 둘러맨 한 시민이 지난달 초 영국의 유럽연합(EU) 재가입을 요구하는 시위에 참여하고 있다. 연합뉴스


“브렉시트 이후 글로벌 금융회사와 금융자산이 유럽연합(EU) 지역으로 옮겨가는 현상이 멈추지 않고 있습니다. EU 재가입이 없는 한 이런 이탈은 바뀌지 않을 것으로 예상합니다.”

존 반 리넨 영국 런던정경대(LSE) 교수는 지난달 중순 한국경제신문과의 인터뷰에서 ‘브렉시트 이후 영국 금융 서비스 경쟁력’을 묻는 말에 이렇게 답했다. 2016년 6월 영국의 EU 탈퇴 국민투표 이후부터 브렉시트의 경제적 영향을 추적해온 리넨 교수는 “브렉시트 이전엔 글로벌 금융회사가 런던에서만 허가받아도 EU 국가를 상대로 자유롭게 대출, 파생상품, 펀드 등을 거래할 수 있었지만 이제는 영국이 EU 소속이 아니라 불가능해졌다”고 말했다. 그는 “금융회사가 과거처럼 프랑스, 독일 등에서도 자유롭게 금융 서비스를 제공하려면 EU 내에 본사·지사 및 금융자산을 별도로 둘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고 했다.

브렉시트 이후 영국의 대표 산업인 금융산업이 흔들리고 있다. 영국이 국민투표 결과에 따라 2020년 1월 EU 공식 탈퇴에 이어 2021년 1월 브렉시트를 발효하는 과정에서 금융회사 이전 및 자산 이탈이 지속되고 있다. 현지에서 만난 금융 전문가들은 “런던이 ‘글로벌 제2의 금융도시’ 타이틀을 뺏기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갈수록 커지고 있다”고 했다.

2일 영국 싱크탱크 뉴파이낸셜에 따르면 2017년 이후 영국 내 글로벌 은행은 약 9000억파운드(약 1487조원)를 EU 국가로 이전한 것으로 파악됐다. 브렉시트 이전 영국 내 은행 전체 자산의 10%에 달하는 금액이다.

자산 이전은 주로 프랑스 파리, 아일랜드 더블린, 독일 프랑크푸르트 등으로 이뤄졌다. JP모간·뱅크오브몬트리올 등은 더블린으로, 크레디트스위스·노무라 등은 파리로, 중국농업은행 등은 룩셈부르크로 자산을 이전했다.

영국 대표 은행인 바클레이스조차 유럽 내 사업을 위해 더블린으로 일부 자산을 옮겼을 정도다.

 英 외환·파생거래 급감…"제2 금융수도 지위 뺏길 것"


글로벌 자산운용사·보험사도 예외는 아니다. 블랙록, 인베스코, 베일리기포드, 뱅가드, AXA, 히스콕스 등 글로벌 운용사와 보험사들은 2021년 이후 총 1000억파운드(약 165조원)의 자산을 영국 런던 밖으로 이동시켰다. 은행까지 포함하면 2017년 이후에만 글로벌 금융회사 총 439곳이 1조파운드(약 1650조원)가량의 자산을 영국 이외 지역으로 이전한 것이다.

 파생·외환 거래 급감

글로벌 금융회사들의 ‘런던 엑시트’는 유럽연합(EU) 내 국가 한 곳에서만 설립 인가를 받으면 나머지 국가에서는 허가가 필요 없는 ‘패스포팅’ 혜택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브렉시트 이전에는 영국에 회사를 두더라도 프랑스 독일 네덜란드 벨기에 등 어디에도 자유롭게 대출, 펀드 판매, 보험 판매 등 금융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었다. 하지만 브렉시트 이후 EU 입장에서 영국이 ‘외국’이 되면서 EU 내에서 사업하기 위해서는 국가마다 다른 규제를 모두 충족해야 한다. 런던에서 만난 한 유럽계 증권사 임원은 “EU 소속 국가들이 런던에 있는 금융회사를 유치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규제 강도를 높이고 공격적인 유치전을 펴고 있다”고 말했다.

금융회사가 빠져나가면서 런던에서 이뤄지는 외환 및 파생상품 거래 비중도 감소하고 있다. 예컨대 과거 같으면 외환·금리 헤지 등 파생상품 거래를 위해 런던을 찾았던 프랑스 기업이 이제는 프랑스 안에서 이런 금융서비스를 받고 있다는 것이다. 유로 외환거래에서 런던시장 비중은 2019년 48%에서 지난해 42%로 하락했다. 유럽 장외금리파생상품(IRD) 거래의 런던시장 비중도 2019년 82%에서 지난해 68% 수준으로 줄었다. 유로화 스와프거래 역시 2019년 유럽 전체 거래의 70%가 런던시장에서 이뤄졌지만 이 수치는 올 1분기 기준 14%로 급감했다.

자연스레 금융중심지로서의 런던 평가도 나빠지고 있다. 런던의 금융수도지수(GFCI)는 2015년 784점으로 미국 뉴욕의 785점과 어깨를 나란히 했지만 올해는 731점으로 뉴욕(760점)보다 크게 낮았다. 한 국내 은행 런던지점 관계자는 “국제 공용어 영어를 쓴다는 점, 전통적인 인프라가 남아 있는 점 등으로 당장 제2의 금융수도 지위를 잃지는 않겠지만 이대로면 갈수록 영향력이 축소될 수밖에 없다는 게 런던 금융권 관계자 대부분의 시각”이라고 말했다.

 ‘박스피’보다 못한 영국 증시

브렉시트의 악영향은 주식시장 등 자본시장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제조업 기반 약화, 잠재성장률 감소 등에 브렉시트마저 겹치면서 영국 증시가 박스권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분석이 늘고 있다.

영국 대표 350개 기업으로 구성된 FTSE350지수는 지난 5년간 2.53%, 100대 대기업으로 구성된 FTSE100지수는 4.2% 상승하며 사실상 제자리걸음을 했다. 같은 기간 미국의 S&P500(48.6%), 나스닥100(98.88%), 유로존의 유로스톡스50(25.15%), 프랑스의 CAC40(33.51%)보다 크게 낮은 수치다. ‘박스피’로 비판받는 한국의 코스피200 상승률(8.61%)보다도 낮다.

자본시장 침체가 이어지자 영국 기업들은 해외 상장(IPO)에 나서고 있다. 영국 케임브리지에 본사가 있는 반도체 팹리스 회사 ARM은 지난달 15일 런던증권거래소가 아닌, 뉴욕증권거래소에 상장했다.

런던의 한 증권사 지점 직원은 “국내 시장에 상장하라는 영국 정부의 직접적인 설득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지만 미국 시장을 택했다”고 했다. 배관 및 난방제품 공급업체인 퍼거슨은 이미 지난해 미국으로 이전 상장을 마쳤고, 건설장비업체 CRH도 런던이 아니라 뉴욕에 상장을 준비 중이다.

런던=성상훈 기자 uphoon@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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