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 터지는 AS에 결국…성질 급한 이 남자가 직접 만든 ‘이것’ 뭐길래 [추동훈의 흥부전]

추동훈 기자(chu.donghun@mk.co.kr) 2023. 9. 16. 1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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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부전-23] [브랜드로 남은 창업자들-18] 윌리엄 보잉

뉴델리에서 열린 G20 정상회의 직후 베트남을 국빈 방문한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통큰 투자 보따리를 풀었습니다. 마이크로소프트, 엔비디아 등 빅테크 기업들이 베트남 현지기업과 협업하기로 약속했습니다. 중국을 제외한 전 세계 공급망 재편을 준비 중인 미국 입장에서 베트남은 동남아시아 시장의 교두보로서 중요한 요충지가 될 전망입니다. 그런 만큼 국방 뿐 아니라 경제 교류와 투자를 확대해 서로 신뢰관계를 형성하겠단 포석으로 풀이됩니다.

항공업계의 협력도 눈에 띄었는데요. 베트남의 국영 항공사 베트남항공은 미국 보잉사의 737 맥스 기종 50대를 도입하기로 결정했습니다. 그 금액만 75억 달러, 10조원 가량의오는 2027년 인도를 시작해 2030년까지 순차적으로 인도하며 추후 100대까지 그 양을 늘리기로 약속했습니다. 이로 인해 미국 노동시장에서 3만3000여명의 직간접 고용효과가 나올 것이란 분석도 나왔습니다.

윌리엄 보잉
특히 코로나19의 종료로 인해 관광산업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 있는 가운데 해외여행을 위해 항공사들이 앞다퉈 신규 비행기 투입을 검토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그래서 더욱 바빠진 기업, 보잉의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미국 항공기 제작사 보잉은 세계 최대의 항공기 제작사입니다. 유럽의 에어버스와 세계 양대 항공기 제작사로도 유명한데요. 록히드 마틴, 노스룹 그루먼과 더불어 미국 3대 항공우주 방위 산업체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보잉의 창업주는 윌리엄 에드워드 보잉, 오늘의 주인공입니다.
보잉사 로고
윌리엄 보잉은 1881년 10월 미국 미시간주 디트로이트에서 태어났습니다. 모터 시티인 디트로이트에서 태어나 , 비행기의 아버지가 됐으니 탈 것과의 인연은 태생적으로 타고난 것 같은데요. 대다수의 당시 미국인들이 그랬듯이 보잉의 가족도 유럽에서 건너온 이민자 가족입니다. 보잉의 아버지 빌헬름 보잉은 독일 출신이며 엄마 역시 오스트리아 비엔나 출신으로 미국으로 건너와 정착했습니다. 1868년 부모님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미국으로 건너온 빌헬름 보잉은 재정적 지원을 하나도 받지 못하며 노동자로 새삶을 시작했습니다. 이후 북아메리카 오대호 중 하나인 슈피리어 호 북쪽 미네소타 지역의 양질의 목재를 가공하고 철광석 등에 대한 광물권을 확보하며 부를 쌓기 시작했습니다.
윌리엄 보잉
이러한 집안에서 태어난 윌리엄 보잉의 유년기는 나름 풍족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그가 8살이 됐을 때 아버지는 독감으로 사망했고 윌리엄과 어머니는 다시 유럽으로 돌아가 스위스에서 학창 시절을 잠시 보냈습니다. 하지만 다시 미국에서 공부를 이어가야겠단 일념으로 학구열이 높은 동부의 뉴햄프셔 주 세인트폴 학교로 돌아갔고 공부도 곧잘 했던 그는 코네티컷 주에 위치한 아이비 리그 대학 예일대 공대로 진학했습니다. 하지만 아버지때부터 이어오던 목재 사업에 관심을 크게 가진 윌리엄은 1903년 돌연 학교를 중단하고 사업가로 변신을 꾀합니다

미국의 서북부에 위치한 워싱턴주로 떠난 윌리엄은 양질의 대형 목재가 잔뜩 쌓인 산림지를 샀습니다. 이를 사서 가공하고 판매하는 그린우드 목재를 운영하며 사업을 번창시켰습니다. 이 때 모은 돈이 보잉사를 차리는데 큰 종잣돈이 됐습니다.

보잉의 수상비행기
공돌이 출신 보잉의 관심사는 각종 탈 것이었습니다. 특히 당시 물에서 탈 수 있는 다양한 보트에 관심이 많던 그는 각종 보트를 설계해보고 디자인해보는 것을 즐겼습니다. 목재회사 대표로 활발히 일을 하던 1909년, 그의 인생을 바꾼 터닝포인트가 발생합니다. 1909년 보잉은 시애틀에서 열린 알래스카-유콘태평양박람회를 구경하러 갑니다. 여기서 그는 처음으로 유인비행기를 만나게 됩니다. 여행과 모험을 즐기며 보트를 사랑했던 보잉의 관심사는 비행기로 넘어갔습니다.

그는 유인 비행기를 운전하고 싶었지만 누구도 그를 태워주지 않았습니다. 1년 넘게 각종 행사장과 박람회를 다니며 구걸하던 그는 아예 비행기를 사야겠다고 결심합니다. 결국 그는 LA에 있는 글렌 L 마틴 비행학교에 입학해 비행수업을 듣고 글렌 L 마틴사의 비행기를 바로 구매했습니다.

보잉 747
그는 비행기 조정법을 배우고 실제 모험을 떠났으며 이러한 비행기의 매력에 흠뻑 빠집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깁니다. 비행기가 고장이 났는데 부품이 도착하는데 몇달이 걸릴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것입니다. 공대남 보잉은 이를 참지 못합니다. 절친이자 해군 사령관이었던 조지 웨스터벨트에게 우리가 힘을 합쳐 직접 수리도 하자고 제안했습니다. 내친김에 아예 비행기를 만들어보는 것이 어떨까란 의견이 나왔고 두사람은 의기투합하기로 결심합니다.

윌리엄은 시애튼 근교에 넓은 부지부터 확보하고자 했습니다. 시애튼 인근 두와미쉬강변에 낡은 보트공장을 사들였습니다. 그리고 1916년 준비를 끝마친 윌리엄은 조지 웨스터벨트와 함께 ‘퍼시픽 항공기제작소’라는 회사를 설립합니다.

이들은 수륙양용 복합비행기 ‘ B&W 수상 비행기’를 제작했습니다. 모델1이라고 명명된 비행기입니다. 성능은 제법 좋았습니다. 열정을 가진 전문가들이 마음을 먹고 만들면 이 정도는 할 수 있음을 증명해 보였습니다.

그리고 1917년 새로운 기회가 찾아옵니다. 바로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한 것입니다. 미국의 세계 대전 참전이 결정되자, 보잉은 회사 이름을 보잉 비행기회사로 변경하고 미 해군들로부터 50대의 항공기 주문을 받아냅니다. 보잉의 이름을 널리 알린 결정적 기회였습니다.

그리고 창업자들과 함께 보잉의 엔지니어링 기술을 책임진 인물, 윙 트수가 함께 합니다. 중국에서 태어난 윙 트수는 MIT에서 수학한 공학도였습니다. 보잉의 첫 엔지이너링 직원으로 영입한 윙 트수는 미군에 납품할 50대의 항공기 설계와 준비를 총책임졌습니다.

윌리엄 보잉
전쟁 후 보잉은 항공기로 우편물을 배달하는 사업에 진출했습니다. 세계 최초의 국제 항공화물 운송을 성공시키며 사업적 역량을 점차 키워갔습니다. 이어 보잉은 유나이티드 에어크래프트&트랜스포트로 회사명을 변경했고, 유나이티드 항공으로 여객산업에도 진출을 시작합니다. 하지만 너무 급격한 성장탓이었을까요. 미국 정부는 회사를 분할하라고 명령합니다. 그 결과 현재 세계 3위 항공사인 유나이티느는 분할돼 버렸습니다. 결국 보잉사는 항공기 제작에만 집중하게 됐고 이러한 분할 결정과 동시에 윌리엄 보잉은 회사에서 물러나 은퇴를 택합니다.
유나이티드 항공
이후 보잉은 희대의 역작 보잉 707을 만들어 공전의 성공을 이뤄냅니다. 또한 전 세계 여행산업의 발전과 항공기를 이용한 해외여행의 본격화로 보잉의 전성시대가 열립니다. 타 경쟁사들이 무리한 물량 확대와 각종 문제점을 일으키며 파산하는 사이 보잉은 줄곧 다른 기업을 인수합병하며 안정적인 성장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이후 우주개발로 산업군을 확장해 우주 군사 기술에서도 뒤지지 않는 경쟁력을 확보하고 있습니다.
보잉 7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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