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즈더퓨쳐] 오펜하이머 그후 78년…핵폭탄 개발자들의 바람, 얼마나 이뤄졌을까
우리에겐 나라를 되찾은 광복절이며 일본에겐 항복을 선언한 날인 8월 15일, 영화 '오펜하이머'가 한국에서 개봉했다. 영화는 일본이 항복하기 직전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각각 떨어진 핵폭탄 개발 뒷이야기들 다뤘다. 영화 주인공인 미국 핵물리학자 J. 로버트 오펜하이머는 미국의 핵폭탄 개발 프로젝트인 '맨해튼 계획' 중 핵심 연구소였던 로스앨러모스 연구소의 총 책임자였다.
핵폭탄 개발을 이끈 오펜하이머는 일본에 핵폭탄이 떨어진 이후 핵무기를 더 세게, 더 많이 만드는 길에 들어서길 반대했다. 씨즈의 이번 영상은 오펜하이머의 바람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이었고 실제로 얼마나 이뤘졌는지, 또 앞으로는 얼마나 이뤄질지를 다뤘다.
●국제 핵통제 꿈꿨던 물리학자들
1945년 7월 16일 미국 뉴멕시코주에서 세계 최초 핵실험 '트리니티'가 성공했을 때 과학자들은 동그란 화구와 거대한 버섯구름을 목격했다. 화구는 폭발이 만든 열로 모든 것을 태워 내부가 거의 진공이었는데 그 지름이 400~500m에 달했다.
뒤이어 기화된 물질들은 하늘 위로 올라가 높이 12km의 버섯구름을 만들었다. 폭발력이 만든 충격파는 실험장에서 170km 떨어진 곳까지 느껴졌다. 서울에서 폭탄을 터뜨렸다면 대전 너머까지 충격파가 전해졌다는 뜻이다.
이토록 큰 폭발력을 목격한 것은 인류에게 처음이었다. 핵폭탄은 이전에 사용되던 폭탄보다 수천 배 이상의 힘을 보였다. 트리니티 실험이 성공한 직후 실험 총책임자였던 케네스 베인브리지는 오펜하이머에게 "이제 우리는 전부 개자식들이야(Now we are all sons of bitches)"라고 말했다. 베인브리지는 훗날 '핵 과학자 회보(Bulletin of the Atomic Scientists)' 1975년 판에 쓴 글에서 "오펜하이머는 그 말이 실험하고 나온 말 중 최고였다고 했다"고 썼다.
1945년 11월 로스앨러모스 연구소의 과학자들은 핵폭탄의 재료를 만들었던 오크리지 국립연구소의 과학자들과 함께 '핵과학자협회'라는 이름의 단체를 하나 만들었다. 핵폭탄 '리틀보이'와 '팻맨'이 일본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떨어지고 3개월이 지난 뒤였다.
훗날 '미국과학자협회'라고 이름을 바꾼 이 단체의 목표는 국제사회가 핵을 통제하도록 만드는 것이었다. 성명서에는 "핵에너지에 대한 국제적 협력과 통제 시스템을 만들도록 요구하는 편지를 국회의원과 대통령에게 쓴다"는 구체적인 행동 지침을 적었다.
'핵에 대한 국제 통제'는 전 세계가 핵무기를 개발하는 군비 경쟁을 할 것이란 두려움에서 나온 것이었다. 당시 많은 물리학자들이 이런 두려움을 공유했다. 오펜하이머를 포함한 물리학자들은 핵에 대한 국제 통제가 필요함을 여러 차례 주장했다.
나치가 핵폭탄을 먼저 개발할 것을 걱정해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핵폭탄 개발을 제안한 앨버트 알베르트 아인슈타인과 실라르드 레오, "대량 살상 무기를 만드는 것으로 물리학의 정점 300년을 찍고 싶지 않다"며 맨해튼 계획에 참여하길 거부했던 오펜하이머의 친구 이지도어 라비가 대표적이다.
영화의 원작이자 오펜하이머 평전인 '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는 이 요구의 본격적인 시작을 덴마크의 핵물리학자 닐스 보어에게서 찾는다. 양자역학 발전을 이끈 주역으로서 물리학자들 사이에서 큰 존경을 받던 보어는 핵폭탄 개발 연구가 한창인 1944년 오펜하이머에게 편지를 썼다.
보어는 "유례없는 무기가 만들어져 전쟁의 성격을 완전히 뒤바꿀 것"이라며 "우리가 빠른 시일 내에 이 새로운 물질을 어떻게 통제할 것인지 합의하지 못하면 그로 인해 얻는 일시적 이익보다 그것 때문에 인류가 받는 영구적인 생존의 위협이 훨씬 커질 것"이라고 썼다. 이런 생존의 위협을 완화하기 위해서는 핵에 대한 국제 통제 체제가 필요함을 주장했던 것이다.
● 현실이 된 우려, 군비경쟁
군비경쟁은 머지않아 현실이 됐다. 소련은 트리니티 실험이 이뤄지고 4년이 지난 1949년 8월 핵폭탄 실험에 성공했다. 이후 오펜하이머가 세상을 떠난 1967년보다도 19년이 지난 1986년까지 전 세계 핵무기 개수는 늘기만 했다.
핵 통제를 주장했던 미국과학자협회(FAS)는 1945년부터 지금까지 전 세계 핵무기 현황을 파악하고 있는데 이들에 따르면 1986년까지 핵무기는 7만 374개에 이르렀다. 이중 소련의 핵무기는 4만 159개, 미국의 핵무기는 2만 3317개로 전체의 90% 이상을 차지했다.
이런 군비 경쟁에 대해 한용섭 국방대 명예교수는 "매우 비이성적이고 비합리적인 결과"라며 "군비 경쟁이 시작되며 안보 딜레마에 빠진 것"이라고 말했다. 안보 딜레마란 각 국가는 자기 안보를 위해서 합리적인 결정을 내려 핵무기 수를 늘리지만 그 결과는 오히려 안보 불안이 심해지는 현상을 설명하는 국제정치학적 개념이다.
핵무기 개발 경쟁이 이뤄지는 동안 핵실험도 잦았다. 1999년 이후로는 북한만 핵실험을 하고 있지만 핵실험이 가장 많이 이뤄진 1962년에는 한 해에만 핵실험이 140번 이뤄졌다. 한 달에 10번이 넘게 지구 어딘가에서 핵폭탄이 터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 대부분은 미국과 소련의 것이었다. 두 나라는 지금까지 핵실험을 지상만이 아니라 지하, 물속, 심지어 우주에서도 진행했고 그 횟수는 1700번이 넘는다. 이춘근 과학기술정책연구원 명예연구위원은 "우주에서 핵실험을 한 이유는 우주를 통과해 날아오는 ICBM(대륙간탄도미사일)을 핵폭탄으로 격추하기 위함이었다"고 설명했다.
핵실험은 지구와 인류에도 고통을 줬다. 지상에서 핵폭탄이 떠지면 대기권 상층으로 방사성 물질이 퍼져나가 다시 떨어지는데, 이를 '낙진'이라 한다. 그런데 낙진에 포함된 방사성 물질 스트론튬-90이 어린이의 치아와 뼈에 쌓이고 있다는 게 1950~1960년대 미국에서 이뤄진 대규모 연구에서 밝혀졌다.
스트론튬-90이 치아와 뼛속의 칼슘을 대체하고 있었던 것이다. 우주에서 터뜨린 핵폭탄은 전자기기를 망가뜨리기도 했다. 1962년 6월 태평양 상공에서 핵폭탄 실험이 이뤄진 직후 하와이에서 가로등이 고장났다. 이는 핵폭발 후 나오는 감마선이 전자기기에 과전류를 일으켜 영구적인 파손을 야기하는 'EMP 효과' 때문이었다.
● 군비통제의 두 열쇠, 약속과 기술
핵무기 군비경쟁의 고삐를 잡는 데는 정치와 과학기술이 모두 필요했다. 1987년 미국과 소련이 중거리 핵무기를 폐기하기로 한 중거리 핵전력 조약(INF)이 체결되면서 전 세계 핵무기 수는 처음으로 감소하기 시작했다. 비핵보유국이 새로 핵무기를 보유하지 말자고 약속한 핵확산금지조약(NPT, 1970년), 지구 전 지역에서 핵실험을 금지하는 포괄적 핵실험 금지 조약(CTBT, 1996년)도 체결됐다.
동시에 비핵보유국이 핵무기를 개발하지 않는지 감시하기 위한 기술과 핵보유국이 실제로 핵무기를 폐기했는지를 검증하기 위한 기술도 개발됐다. 그래도 FAS에 따르면 전 세계에는 핵무기가 1만 2500여개가 남아 있다. 이에 대해 핵무기 폐기 검증 기술을 개발하는 그렉 다나굴리안 MIT 핵과학및공학과 교수는 "핵무기를 만들려는 자와 핵무기를 통제하려는 자의 기술 경쟁"이라고 표현했다.
씨즈의 이번 영상은 두 노력에 대한 자세한 내용을 다뤘다. 영상은 씨즈 유튜브 채널에서 볼 수 있다.
●씨즈 유튜브 보기 : https://youtu.be/kVT45c_LW6M?si=oDmLGrCsmDHW6BKm
[이다솔 PD,신수빈 기자 dasol@donga.com,sbshi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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