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감청에 뚫린 안보실…윤 대통령 방미 앞 ‘주권침해’ 악재

이본영 2023. 4. 9. 17: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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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열 정부][러, 우크라 침공]미국 정보기관, 우크라 살상무기 지원 논의 감청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 4일 서울 용산 대통령실에서 열린 국무회의에서 발언하고 있다. 연합뉴스

미국 정보기관이 한국의 국가안보실 논의를 감청한 사실이 미국 기밀 문서로 드러나면서 한-미 관계에 파장이 예상된다. 윤석열 대통령의 26일 미국 국빈 방문을 앞두고 미국이 한국의 ‘안보 사령탑’을 감청했다는 사실이 불거지며 양국 관계에 악재로 작용할 수밖에 없게 됐다.

이번에 외부로 유출된 미국 정부의 기밀 문서에는 2월을 전후로 미군 수뇌부에 보고된 우크라이나 전황과 러시아군 동향이 담겼다. 전쟁과 관련된 중국의 동향, 북한의 핵·미사일 개발 상황, 중동 정세 등도 일부 포함됐다. 국방정보국(DIA)뿐 아니라 중앙정보국(CIA), 국가안보국(NSA), 국가정찰국(NRO) 등 핵심 정보기관들이 수집한 정보가 망라됐다. 미국 당국자들은 일부 정보는 진본과 달리 우크라이나군 전사자 수는 과장하고 러시아군 전사자는 축소하는 등 조작이 확인된다고 밝혔다. 하지만, 대부분 국방부에서 빠져나간 진짜 문서인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이 가운데서 특히 눈길을 끄는 것은 한국·영국·캐나다·이스라엘 등 동맹국에서 ‘비밀스럽게’ 수집한 정보가 노출됐다는 점이다. 특히 한국 국가안보실 논의를 감청한 게 가장 심각한 내용으로 파악된다.

이 문서를 통해 한국 정부가 우크라이나에 대한 살상무기(포탄)를 지원할지를 두고 상당한 압박에 시달렸다는 점이 확인됐다. 김성한 당시 국가안보실장은 미국의 요구에 응하면 시점상 이를 ‘국빈 방문’과 맞바꾼 것으로 여론이 받아들일 것을 우려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결국 김 실장은 “우크라이나가 포탄을 빨리 받는 게 미국의 궁극적 목적”이므로 우크라이나에 무기를 전달 통로인 폴란드에 대한 포탄 판매를 검토해보자는 ‘궁여지책’을 짜내는 모습이 나온다. 또 임기훈 국방비서관이 이 문제에 대해 3월2일까지 최종 입장을 정할 것이라고 했다는 언급도 있다. 

6일 미국 워싱턴 근교 알링턴의 건물들 사이로 국방부 청사가 보인다. 로이터 연합뉴스

나아가 이문희 당시 외교비서관은 “이 문제에 관한 분명한 입장”이 없이 한-미 정상 통화는 곤란하다며,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윤석열 대통령을 압박할 가능성을 우려하는 듯한 말도 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공교롭게도 이 문건에 이름이 등장한 김 전 실장과 이 전 비서관은 윤 대통령의 미국 국빈방문을 한 달여 앞둔 지난달 말 사직했다.

미국 중앙정보국이 한국 대통령실에 속한 국가안보실 주변을 감청하는데 성공했다면, 한국의 ‘외교·안보 사령탑’의 보안에 심각한 구멍이 뚫린 게 된다. 한·미가 밀접한 동맹이긴 하지만, 이해관계가 다른 민감 현안과 관련해 미국이 한국 내 내밀한 논의를 몰래 정탐하고 있었다면, 한국의 국익이 크게 훼손될 수밖에 없다. 나아가 한국 영토 내에서 불법적으로 감청을 했을 가능성이 농후해 ‘주권 침해’ 논란도 불가피하다. <뉴욕 타임스>는 “감청 사실 공개는 우크라이나에 무기를 제공하기 위해 도움이 필요한 한국 같은 나라들과 관계에 해롭다”고 했다.

미국은 2013년에도 국가안보국이 적성국과 동맹국 가릴 것 없이 광범위한 감청을 해온 것으로 드러났다. 이 조직에 몸 담았던 에드워드 스노든의 폭로로 미국이 앙겔라 메르켈 당시 독일 총리의 휴대폰까지 10년 이상 감청 대상으로 삼았고, 동맹국 대사관들도 감청했음이 드러났다. 국가안보국은 2007년에 한국을 ‘핵심 정보 수집 대상국’으로 지정한 것으로 드러났는데, 당시에도 청와대가 주요 정보 수집 대상이었을 것이라는 관측이 나왔다.

미국은 이번 문건 유출로 정보원이 노출되고 외국 정보기관과의 교류가 어려워지는 결과를 맞게 됐다. 러시아의 경우 미국 정보 역량이 러시아군 총정보국(GRU)에까지 침투한 것으로 밝혀졌다. 한 미국 정보 당국 관리는 “파이브 아이즈(앵글로색슨계 국가들로 기밀 정보를 긴밀히 교환하는 미국·영국·캐나다·오스트레일리아·뉴질랜드의 협력 시스템)의 악몽”이라고 <뉴욕 타임스>에 말했다. 나아가 미국이 한국 등 불법적인 감청 피해국에 어떻게 해명을 시도할지도 주목 대상이다. 버락 오바마 당시 미국 대통령은 2013년 메르켈 당시 독일 총리에게 “감청 사실을 몰랐다”면서도 사과했다. 이어, 감청 프로그램 개혁안을 내놓고 법도 바꿨지만, 똑같은 논란을 피해가지 못했다.

기밀 문서들은 2월 말~3월 초 게이머들의 채팅 프로그램인 디스코드에 올라온 뒤 텔레그램과 트위터로도 유포됐다. 미 법무부는 유출 경위를 파악을 위한 수사에 나섰다. 미국은 러시아의 소행일 가능성이 있다고 본다.

워싱턴/이본영 특파원

ebo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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