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턱밑’ 필리핀 최북단에 미군기지 들어선다 [김규환의 핸디 차이나]
필리핀 최북단에 들어서 중국엔 ‘목구멍 가시’가 될듯
美, 대만 비상사태 등 유사시 군사개입 가능성 고려해
中, 남중국해 분쟁에서 比 겁박한 게 기지허용 주요인
미국이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 필리핀에 추가 건설하기로 한 미군기지 네 곳이 공개됐다. 특히 이들 미군기지는 지리적으로 대만, 남중국해와 가까우면서도 중국 본토의 ‘턱밑’에 자리잡고 있다. 중국엔 ‘목구멍 가시’처럼 느껴질 수 있는 곳에 위치하고 있는 만큼 미국이 대만의 비상사태 등 유사시 군사개입 가능성을 고려했다는 분석이 나온다.
필리핀 정부가 발표한 추가 미군기지 후보지는 필리핀 최북단 카가얀주의 카밀로 오시아스 해군기지와 랄로 공항, 북부 이사벨라주의 멜초 델라 크루즈 캠프, 팔라완 서부 발라박섬 등 네 곳이라고 AP·로이터통신 등이 지난 4일 보도했다.
미군기지 네 곳 가운데 발라박섬을 제외한 세 곳은 대만을 건너다보는 필리핀 북부 해안 인근에 위치하고 있다. 필리핀 북부 해안은 동쪽으로 태평양, 서쪽은 베트남, 북쪽은 대만과 홍콩을 바라보는 군사적 요충지다. 더욱이 카가얀주는 대만 남부와 불과 430km쯤 떨어져 있는 까닭에 중국의 심기를 몹시 불편하게 할 수 있다.
이로써 미국은 중국의 대만 침공이나 남중국해에서 분쟁이 발생할 경우 미군의 작전 수행에 보다 유리한 위치를 점할 수 있게 됐다. 미 워싱턴포스트(WP)는 “중국의 대만 침공을 견제하는 것은 물론 자연재해나 기후관련 문제에도 신속대응이 가능한 만큼 다양한 안보협력을 촉진할 수 있다”고 평가했다.
필리핀의 미군기지 후보지 발표 직후 미 정부는 “미군과 필리핀군의 상호운용성을 강화하고, 인도·태평양 지역에서의 다양한 공유과제를 해결하기 위해 함께 더 원할히 대응하게 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기존 방위협력확대협정(EDCA)으로 확보된 다섯 곳에 이미 할당한 8200만 달러(약 1082억원)에 더해 인프라 개발 투자금을 추가로 확대할 것”이라고도 덧붙였다.
추가 미군기지들이 들어설 필리핀 북부 지역은 중국이 진출을 노리고 오랫동안 공을 들인 곳이다. 2017년 ‘스마트시티 건설’ 등을 내걸고 필리핀 북부 해안의 섬 ‘푸가’에 대한 임대차 계약을 시도했다. 이 섬은 울릉도 크기(72.86㎢)만 한 면적에 농어업 종사자 2000여 명이 옹기종기 모여 살고 있는 외딴 섬이다. 하지만 중국의 경제·안보적 진출에 대한 거부감이 확산되면서 필리핀 여론이 급격히 악화되는 바람에 끝내 무산됐다.
새 미군기지가 완공되면 필리핀 내 미군기지는 다섯 곳에서 아홉 곳으로 늘어난다. 미 국방부는 “미군과 필리핀군의 합동작전 능력을 강화했다”고 밝혔고, 필리핀 국방부는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한 남중국해 무역로를 보호해야 한다”고 말했다. 칼리토 갈베즈 주니어 필리핀 국방장관은 “(남중국해는) 3조 달러 이상의 무역 규모를 가진 교역로”라며 “이를 확보해야 하는 책임이 막중하다”고 강조했다.
1898년부터 46년 간 미 식민통치를 받았던 필리핀은 미국과 1951년 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하고 동맹국이 되면서 미군기지 설치를 승인했다. 이에 따라 미국은 필리핀에 대규모 병력을 주둔시켰으나 1991년 필리핀 의회가 주권 침해를 이유로 미군기지에 대한 권리포기를 요구하며 미군주둔 연장안을 거부했다.
1992년 필리핀 정부의 요청에 따라 미군 대부분이 철수했다. 그러나 2010년대 들어 남중국해 스프래틀리군도(중국명 南沙群島)를 둘러싸고 중국과 영토분쟁이 격화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중국의 압박에 위협을 느낀 필리핀은 2012년부터 미국과 미군 재주둔 협상을 벌였고, 필리핀 대법원도 미군 주둔이 합헌이라는 판결을 내려 이를 합법화했다.
이어 2014년 미국과 EDCA를 맺어 미군의 순환 배치를 승인하고 미군이 필리핀 내 기지 다섯 곳을 이용할 수 있는 길을 열었다. EDCA는 미국이 합동 군사훈련, 장비 사전배치, 활주로, 연료저장고, 군용주택과 같은 시설 건설을 위해 필리핀 내 군사 기지에 접근할 수 있도록 허용한다는 내용이 담겼다. 영구 주둔은 허용하지 않는다. 필리핀 헌법은 외국 군대의 필리핀 내 영구 주둔과 전투 참여를 금지하고 있다.
이 협정을 근거로 2020년 7월 미국과 필리핀읁 고위급 협상을 벌여 필리핀의 공군기지 네 곳과 육군부대 한 곳 등 모두 다섯 곳을 미군이 사용할 수 있도록 합의했다. 수도 마닐라 북부의 바사, 민다나오의 룸비아, 세부의 막탄-베니토 에부엔 공군기지 세 곳과 팔라얀의 안토니오 바우티스타 공군기지, 포트 막사이사이 육군부대가 그곳이다.
룸비아 공군기지는 수니파 무장세력인 이슬람국가(IS)에 대한 양국의 우려를 반영한 결과다. IS가 동남아시아에서 세력 확장을 하기 위해 필리핀 내 이슬람 반군들이 활동한 민다나오 지역을 노리고 있다는 점을 고려한 것으로 보인다. 안토니오 바우티스타 공군기지는 중국이 군사장비를 대거 설치한 파라셀군도(중국명 西沙群島)의 섬인 우디(중국명 永興島)와 가깝다. 우디에는 30㎜ 기관포와 공대공 미사일, 범용폭탄 등을 탑재한 중국군 주력 전투기인 J-11 전투기 16대를 배치돼 있다고 미군 기관지 성조지가 전했다.
필리핀이 미군 주둔을 허용한 것은 중국이 걸핏하면 남중국해에서 힘을 과시하면서 자국을 겁박하는 까닭이다. 더군다나 중국이 1997년 필리핀 소유인 섬인 코타와 파나타를 무력 점령하고 이 지역에 군사시설을 만들었는 데도 국제사회, 특히 미국이 전혀 관심을 갖지 않자, 다급해진 필리핀이 미국과의 협력 강화에 나선 것이다.
필리핀은 친중 성향의 로드리고 두테르테 정권 시절 중국과의 관계를 중시했으나 지난해 6월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주니어 대통령이 취임한 이후에는 남중국해에서 중국 견제 행보를 이어가며 미국과 협력하는 쪽으로 외교정책의 방향을 틀었다.
이에 힘입어 미국도 지난해 11월 카멀라 해리스 부통령, 지난 2월엔 로이드 오스틴 국방장관이 마닐라를 찾는 등 필리핀과의 관계강화에 공을 들였다. 오스틴 장관은 필리핀을 방문해 필리핀 내 미군기지를 확대하기로 필리핀과 전격 합의하며 두 나라는 EDCA를 대폭 강화키로 했다. 이번에 추가된 미군기지는 ‘강화된 EDCA’에 따른 것이다.
새로 추가된 미군기지의 배치를 보면 미국이 대만해협과 남중국해에서 중국의 영향력을 본격 견제하려는 의도임이 명확히 드러난다. 카가얀주는 대만에서 430㎞ 밖에 떨어지지 않은 만큼 유사시 대만에 신속하게 미군을 급파해 전개할 수 있다. 팔라완은 중국과 필리핀이 영유권 분쟁을 벌이고 있는 남중국해의 스프래틀리군도에 인접해 있는 지역이다.
중국은 필리핀의 배타적경제수역(EEZ) 안에 있지만 자신들이 실효지배하는 스카버러 암초(중국명 黃巖島)를 포함해 이 군도에 세 곳의 군사기지를 건설하고 필리핀 어민을 몰아냈다.
반면 조 바이든 미 행정부는 남중국해 영유권 분쟁과 관련해 줄곧 “필리핀을 지지한다”며 환심을 샀다. 마르코스 주니어 대통령도 지난해 9월 첫 워싱턴을 방문해 “미국이 동반되지 않은 필리핀의 미래를 상상할 수 없다”고 화답했다.
이후 미국과 필리핀은 안보·경제협력을 대폭 강화하고 있다. 두 나라는 이른 시일 내 외교·국방장관 ‘2+2’ 회담을 열고 올해 미국과 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 체결을 추진하는 등 미국의 대중국 포위망에 동참하겠다는 뜻을 분명히 했다. 미국 역시 원자력 건설을 추진 중인 필리핀에 소형모듈원자로(SMR) 기술을 지원하기로 했다.
이와 함께 미국과 필리핀은 남중국해에서 6년 만에 공동 해상 순찰을 재개했으며, 필리핀은 미국의 동맹인 호주와 일본과도 방위협정을 채결했다. 지난달에는 3주 간 필리핀 최대의 군사기지 포트 막사이사이와 EDCA 대상 기지 중 한 곳에서 미군과 필리핀군은 3000여명의 병력을 투입해 소형 화기와 야포 등 화력 대응 능력 점검에 초점을 맞춘 연례 합동훈련인 ‘살락닙’(Salaknib)을 실시했다.
미국은 지난달 미·일 외교·국방장관 ‘2+2’ 회담에서 대만과 가까운 일본 남부 오키나와에 대함미사일과 드론으로 무장한 미군 해병연안연대(MLR)를 전진 배치하기로 했다. 여기에다 필리핀에도 미군기지를 건설하면 중국의 대만 침공을 견제하기 위한 해안 상륙부대 주둔지와 군수기지를 모두 갖추게 된 셈이다.
중국은 아직 별다른 입장을 내놓지 않고 있다. 중국은 최근 성명에서 필리핀과 미국의 안보협력이 “필리핀을 지정학적 분쟁으로 끌어들이고 결국 경제발전을 저해하게 될 것”이라고 비판한 바 있다.
글/ 김규환 국제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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