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깐 들어온 집이 감옥 됐다”…전세사기 피해자들의 절규

조희연 2023. 3. 9. 08:57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전세사기의 본질은 대한민국에만 존재하는 전세 제도의 정책적·제도적 맹점을 철저히 파고들어 5000명 이상의 주거지를 빼앗은 사회·경제적 살인사건입니다.” (미추홀구 전세사기 피해대책위원회 안상미 위원장)

미추홀구 전세사기 대책위·민달팽이유니온·참여연대 등은 8일 서울 용산구 전쟁기념관 앞에서 전세사기 피해자 추모 기자회견을 열었다.
8일 서울역 앞에서 출발한 인천 미추홀구 전세사기 피해자를 위한 추모행진이 용산구 대통령실 방향을 향하고 있다. 연합뉴스
이들은 지난달 28일 인천 미추홀구 한 빌라에서 숨진 채 발견된 전세사기 피해자 A(38)씨를 추모하고 전세사기 피해자 대책을 마련하라고 촉구했다. A씨는 ‘정부의 대책이 실망스럽다. 더는 버티기 힘들다. 이 문제를 꼭 해결했으면 좋겠다’는 내용의 유서를 남기고 극단적 선택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전세사기 피해로 직장, 가족, 미래 잃어...”

기자회견에 참석한 피해자들은 전세사기 이후의 참담한 현실을 전했다.

“그(A씨)는 또 다른 나였다”며 발언을 시작한 안상미 미추홀구 전세사기 대책위원장은 “고인의 뜻을 기억하며 또 다른 세상을 잃지 않기 위해 이 자리에 섰다”고 밝혔다. 그는 “인천 미추홀구 전세사기 피해자는 5000명 이상, 피해액은 수천억원에 달할 것으로 예상된다. 현재 미추홀구 일대는 전례없는 참혹한 사회적·경제적 재난현장”이라고 규탄했다. 이어 “많은 피해자들이 소중의 재산을 되찾기 위해 1년이 다 되도록 남씨(건축주) 일당과 치열하게 싸워오고 있다”며 “그 과정에서 이혼을 하고, 직장을 잃고, 가족과 지인을 잃고, 신혼집을 잃고 심지어 자신과 미래를 잃게 되어 오늘과 같은 비극적인 사태를 초래하고 말았다”고 호소했다.

이철빈 수도권 전세사기 대책위원장은 “저희(수도권) 피해자들 또한 돌아가신 분처럼, 미추홀구 피해자처럼, 하루하루를 극심한 절망과 분노에 빠져 지내고 있다”며 “좁고 불편해도 미래를 꿈꾸며 잠깐 들어온 이 집이, 기약없는 감옥이 될 줄은 그 누구도 몰랐다”고 토로했다. 그는 “최근 금리가 올라 대출이자가 3배로 뛰고, 월 이자로 100만원 넘게 내는 분들이 계시다”며 “그마저도 은행에서 대출연장을 해주지 않아 신용분량자로 전락하고, 개인회생·파상을 신청하기 위해 직장에 사직서를 내거나  신혼부부가 이혼을 결심하는 사람이 있다. 정말 스스로 생을 마감해야 이 지옥에서 탈출할 수 있을지 고민하는 사람이 많이 있다”고 전했다.
8일 서울역 앞에서 출발한 인천 미추홀구 전세사기 피해자를 위한 추모행진이 용산구 대통령실 방향을 향하고 있다. 연합뉴스
이 위원장은 “저희를 향해 사람들과 정부 관계자는 무책임하게 손가락질 합니다. 임차인이 더 꼼꼼히 확인했어야 했다고요”라면서 “근데 저희는 모든 걸 확인했다. 등기부등본, 건축물대장, 계약서도 꼼꼼하게 챙겼고 공인중개사가 안전하다고 장담한 집이었다는데, 알고보니 집주인은 보증보험 블랙리스트에 체납세액이 60억원이 넘었다”고 꼬집었다. 이어 “그 모든 걸 숨기고 무자본 갭투기로 자산을 증식해왔는데 공인중개사도, 경찰도, 구청도, 정부도, 그 누구도 위험하다고 알려주거나 막아주지 않았다”며 “왜 누구도 이 문제를 구해주거나 최소한 미안하다고 사과하지도 않냐”고 비판했다.

◆“전세사기는 사회적 재난…정부가 피해 회복시켜야”

단체들은 기자회견문을 통해 “전세사기는 피한다고 피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개인적으로 해결할 수도 없다”고 강조했다. 전세사기는 보증보험에 가입하겠다고 한 바지 임대인, 등록 임대주택이니 걱정 말라고 한 공인중개사, 별다른 검증 없이 보증과 대출을 내준 보증기관과 은행, 이 모든 과정을 교묘하고 치밀하게 설계한 건설사와 컨설팅 업체의 합작으로 “누가 당해도 이상하지 않은 재앙”이라는 것이다.

특히 이같은 대규모 전세사기에 대한 정부의 책임을 지적했다. 이들은 “지난 수년간 이어진 집값과 전세값 폭등, 그 과정에서 무분별하게 이어진 전세대출과 묻지마 보증, 등록임대주택 관리부실, 전세사기 피해자들의 절규와 시민사회단체의 대책 마련 요구에도 불구하고, 서로 네 탓 공방만 일삼으며 시간을 허비한 여야 정치권과 전임 그리고 현 정부 책임자들은 고인이 외로이 희망의 끈을 놓을 때 어디서 무엇을 했냐”고 물었다. 이어 “이제라도 사회적 재난으로 인정하고 국가가 책임있게 해결하려는 모습을 보여달라”고 요구했다.
지난 2022년 12월20일 인천시 미추홀구의 한 전세 사기 피해 아파트 현관에 낙찰 무효와 퇴거 불가를 주장하는 임차인들의 문구가 붙어 있는 모습. 연합뉴스
◆“긴급주거 기간 늘리고 대출 조건·용도 완화해야”

대책위들은 구체적인 피해보상안들도 제시했다. 안 위원장은 먼저 긴급주거 지원 주택의 임대 거주 기간을 현행 6개월보다 늘려달라고 요구했다. 그는 “6개월마다 갱신해야 하는 불안한 주거는 지원이 아니다”며 “피해를 회복할 수 있도록 4∼5년의 시간이 확보돼야 하고, 그 기간 동안 안정적으로 생활할 수 있어야 한다”고 설명했다. 아울러 저금리 대환 대출 조건과 용도를 완화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전세사기로 목돈을 잃어버린 피해자들은 저금리 대출의 소득요건을 충족하지 못하고 있다는 이유에서다. “대출의 용도를 전세보증금으로 한정지어서는 안 된다”며 낙찰, 매매, 민간임대, 공공임대, 월세 등에 쓸 돈을 대출받을 수 있게 해달라고도 했다.

이 위원장도 “시중은행에 공문을 내려 전세대출 연장을 보장하고, 전세사기 피해자라면 소득·용도 상관 없이 누구나 저리대출을 받을 수 있게 해달라”고 했다. 대출이 거부돼 하루 아침에 신용불량자가 되고, 경제적 사망사고가 내려지는 일 만큼은 막아달라는 당부다.

이 위원장은 “부디 개인이 모든 짐을 떠안지 않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도록 정치권과 정부에서 먼저 나서달라”며 “국토부, 법무부, 국세청, 경찰 등 (전세사기와 관련된) 모든 기관이 한자리에 모여서 피해자가 제안한 대책을 검토해달라”고 덧붙였다.

조희연 기자 choh@segye.com

Copyright © 세계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