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 ‘은행 때리기’에 전문가들 “취약차주 지원은 정부가 할 일···복지·금융 섞지 말라”

최희진·이윤주·유희곤·박채영 기자 입력 2023. 2. 16. 15:29 수정 2023. 2. 16. 1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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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열 대통령이 지난 15일 서울 용산 대통령실 청사에서 열린 제13차 비상경제민생회의를 주재하고 있다. 대통령실사진기자단

윤석열 대통령의 ‘은행은 공공재’ 발언을 시작으로, KB·신한·하나·우리·NH농협금융지주 등 5대 금융지주에 대한 정부의 맹공이 계속되고 있다. 윤 대통령과 금융당국은 대출 금리와 성과급, 지배구조 등을 전방위로 비판하며 은행에 대출금리 인하, 사회공헌 확대 등을 요구하고 있다.

하지만 금융 전문가들은 방향은 맞지만 방법이 틀렸다는 입장이다. 이들은 정부가 복지와 금융을 뒤섞고 있다고 진단하면서, 취약 차주(대출받은 사람) 지원은 정부가 나서야 하는 복지의 영역이라고 지적했다. 법인세 증세(횡재세 또는 초과이윤과세) 혹은 금융사가 출연하는 기금으로 재원을 마련한 뒤 고금리로 고통받는 서민·소상공인을 지원해야 한다는 것이다.

어떤 방법이 됐던 대통령과 금융당국이 나서 주식회사인 은행을 윽박지르며 몰아부치기 보다 공개적 논의를 거쳐 투명하고 합리적인 제도를 만드는게 우선돼야 포퓰리즘 논쟁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은행 과점 폐해 크다”

정부의 은행 비판은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달 30일 금융위원회 업무보고에서 “은행은 국방보다 중요한 공공재적 시스템”이라고 말하면서 본격화됐다. 윤 대통령은 지난 13일 은행 성과급을 겨냥해 “돈 잔치”라고 비판했고, 15일에는 “은행 산업에 과점의 폐해가 크다”고 말했다. 이복현 금융감독원장은 지난 14일 임원회의에서 은행의 과점 체제를 깨고 시장 경쟁을 촉진할 방안을 마련하라고 지시했다.

금융지주는 지난해 금리 상승에 힘입어 2년연속 사상 최대 실적을 올렸다. KB·신한·하나·우리금융지주의 지난해 당기순이익은 16조원에 육박했다. 이런 와중에 은행의 고위 임원들이 수억원의 성과급을 챙긴 사실이 알려지면서, 이자 부담에 허덕이는 차주(대출을 빌린 사람)들의 분노를 키웠다. 국내 은행 이익의 90%가량은 예대마진에서 나온다.

“정부가 시장논리 왜곡해”

하지만 전문가들은 최근 정부의 은행때리기는 고금리에 대한 차주들의 분노를 이용하는 ‘포퓰리즘’이라고 보고 있다. 정부가 은행에 사회적 역할을 요구하는 것을 넘어 대출금리에 개입하며 시장에 역행하는 행보를 보인다는 점에서다.

김주현 금융위원장(왼쪽)과 이복현 금융감독원장이 지난 15일 서울 용산 대통령실 청사에서 열린 제13차 비상경제민생회의에 앞서 대화하고 있다. 대통령실사진기자단

익명을 요구한 민간연구소 관계자는 “금융의 과정에서 발생한 열패자, 취약계층에 대해서는 사회적 복지가 중요하지만, 금융과 복지를 섞지는 말아야 한다”며 “정부는 서민을 위해 가격(금리)을 통제한다고 하지만 이게 서민에게만 적용되는 게 아니므로 시장 논리를 왜곡시키게 되고 결국 경제에 마이너스가 될 수 있다”고 말했다.

정부의 가격 통제는 한국은행의 통화정책과 엇박자를 내 금융시장에 잘못된 시그널을 줄 수 있다는 지적도 있다. 예컨대 한은이 기준금리를 올리면 시중은행이 대출금리를 올려 시중 유동성을 흡수하고, 고물가를 잡게 된다. 그런데 한은이 기준금리를 올렸는데도 시중은행이 금리를 오히려 내리면 한은의 통화정책은 무력화된다. 한은이 기준금리를 올려도 유동성이 늘어나고 원화약세가 계속되면 채권시장이 왜곡될 수 있다.

“정부·금융사가 수십조원 기금 조성해야”

이때문에 정부는 금융시스템은 건드리지 말고 재정으로 취약차주를 선별 지원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된다. 익명을 요구한 한 경제학자는 “고금리로 국민 고통이 크다면 정부가 이자를 지원해 주면 된다”며 “금리가 높을 때 서민들이 겪는 고통은 정부가 재정 정책으로 해결할 문제지 규제나 가격(금리) 개입으로 해결할 문제가 아니다”라고 말했다.

문제는 재정마련 방법이다. 정부는 고자산가에 대한 감세와 건전재정을 추구하는 상황이라 재정을 별도로 마련할 방법이 없다. 때문에 일각에서는 금융지주가 대규모 자금을 출연해 기금을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전성인 홍익대 교수는 “은행연합회가 취약차주에 향후 3년간 10조원을 지원하겠다고 발표했지만, 이건 결국 정부가 업계의 팔을 비틀어 자율의 모양새를 만든 것뿐”이라며 “정부가 나서서 적어도 수십조원의 저소득·저신용·다중채무자를 위한 채무 재조정 기금을 조성하고 운용하는 계획을 발표해야 한다”고 말했다.

증세로 재원을 마련해야 하는 방법도 있다. 한 민간금융연구소 관계자는 “서민을 위해서는 별도로 세금을 걷는 방법이 있다”고 말했다. 스페인,체코, 헝가리는 최근 은행 등 금융사에 초과이윤에 대해 과세하고 이 재원으로 금융 취약계층을 돕고 있다.

“은행 경쟁 촉진, 금융안정 해치지 않아야”

정부가 은행의 과점 체제를 깨겠다고 한 것에 대해서도 전문가들은 금융안정을 해치지 않는 수준이어야 한다고 권고했다. 어느 정도의 과점 체제가 합리적인지는 시대와 나라에 따라 다를 수도 있는 만큼 경쟁을 촉진하는 한도 내에서 이뤄져야 한다는 것이다.

익명을 욕구한 또다른 민간연구소 관계자는 “졸속으로 급속하게 온갖 얘기를 다하다 보니 어느게 진심인지 모르겠다”며 “제도개선 얘기만 했으면 진지한데, 돈잔치 뒤끝에 얘기하니 때리겠다는 몽둥이를 들기 위한 수단으로밖에 이해가 안된다”고 말했다.

최희진 기자 daisy@kyunghyang.com, 이윤주 기자 runyj@kyunghyang.com, 유희곤 기자 hulk@kyunghyang.com, 박채영 기자 c0c0@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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