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벅도 안 된다…74년 된 긴자 이 카페 '1번 메뉴' 없는 까닭 [백년가게]
■ 김현예의 백년가게
「 시간의 힘, 믿으십니까. 백년을 목표로 달려가는 가게, 혹은 이미 백년을 넘어서 수백 년의 역사를 쌓은 곳들은 어떤 이야기를 갖고 있을까요. 일본 동네 곳곳에 숨어있는 ‘백년가게’를 찾아가 지금 이 순간에도 시간을 차곡차곡 쌓아가고 있는 상인들의 이야기를 전합니다.
」
왼손과 오른손. 그리고 얼굴의 근육과 눈빛까지 묘한 리듬을 탈 정도로 ‘온 신경을 집중해’ 내린 커피 한 잔을 마셔본 적이 있는지. 올해로 74년 된 카페 드 람브르(Cafe de L'ambre)' 얘기다. 화려한 도쿄(東京) 긴자(銀座)의 명품 숍 뒷골목을 걸어가다 보면 만날 수 있는 이곳. 스타벅스의 공세에도 꿈쩍 않은 일본 커피의 자존심으로 해외 여행객들에게도 이미 입소문 났다. 지난 23일 긴자에 있는 람브르를 찾았다.
“금연에 커피밖에 없는데, 괜찮으신가요?”
오렌지빛 간판을 지나, 나무문을 밀고 들어간다. 전통의 방울 소리와 함께, 이런 인사로 맞으면 제대로 찾았다. 람브르의 메뉴는 A4지 두면을 꽉 채울 정도로 많지만, 커피만 있다. 그것도 드립 커피만. 일본에서 커피 원두를 볶아(배전) 핸드 드립으로 내리는 배전 커피 원조 격인데, 지금도 이 방식을 고수하고 있다. 세계 최고령 바리스타이자, 일본 3대 커피 명인 중 한명으로 불렸던 세키구치 이치로(関口 一郎)가 전후인 1948년 문을 열었다. 세키구치가 지난 2018년 103세로 세상을 뜨면서 조카인 하야시 후지히코(林不二彦)가 이곳의 마스터로 2대째 자리를 지키고 있다.
‘1번 메뉴’ 없는 이색 카페
얘기가 에둘러 돌아왔지만 1번 메뉴가 없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한 인터뷰에서 세키구치는 이렇게 말했다. “넘버 원(No.1)은 이름 그대로, 완전무결한 가장 맛있는 커피여야 한다. 과거엔 존재했지만 대량생산하고 소비하는 시대인 지금엔 사라지고 없다.” 람브르엔 자랑할만한 1번 커피가 없다는 의미가 아니다. 외려 그 반대. 궁극의 커피, 그 맛을 집요하게 쫓고 있단 의미다.
커피 마스터의 리듬, 그리고 커피
이곳의 메뉴들이 세키구치의 손에서 태어났는데, 그중 가장 유명한 것이 바로 7번 커피, 호박의 여왕(Blanc et Noir)이다. 먼저 블렌드 커피를 내린다. 여기에 단맛을 더해 차갑게 한 뒤, 샴페인 잔에 따른다. 그 뒤엔 연유를 커피 위에 살짝 올려, 가죽으로 된 받침대에 얹어낸다. 섞지 않고 마시는 것이 포인트. 달콤한 디저트 커피라는 영역을 개척한 메뉴인데, 세키구치는 이 레시피를 여러 사람이 사용할 수 있도록 공개했다. 어지간한 자신감이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이다.
100세가 넘도록 현역으로, 생두를 10년 이상 숙성시켜 로스팅해 내는 방식으로 일본에서 ‘커피의 전설’로 불린 세키구치의 뒤를 잇는다는 부담이 어떨까. 20대부터 이곳에 합류해 40년 가까운 시간이 흐른 지금, 덤덤한 표정으로 그가 말했다. “자연스럽게 이곳에서 일을 하게 됐어요. 샐러리맨이 어릴 때부터 싫었던 것 같아요.” ‘좋아하는 일을 하고 있다’는 원숙한 겸양의 표현이다.
그런데 묘하다. 커피를 내리는 그의 동작은 절도 있으면서도, 리듬감이 넘친다. 우선 왼손. 적당히 잘 갈아진 보송한 원두를 천으로 된 필터에 담아 든다. 오른손으론 따뜻한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주전자를 잡는다. 왼손이 작은 원을 천천히 그리기 시작하면 오른손으로 조금씩, 물을 붓는다. 향이 번지면서 커피가 부풀어 오른다. 시선은 커피에 고정. 뜨거운 김이 올라와서일까. 얼굴과 입 주위 근육이 씰룩씰룩 움직인다. 양손과 얼굴의 근육은 물론 시선까지 온 정신을 몰입해 커피를 내리느라 생긴 오랜 습관처럼 보였다.
커피 한 잔에 담긴 마음
“커피는 맛으로만 마시는 게 아니에요. 그날의 기분, 날씨, 손님의 입맛에 따라 달라지는 거잖아요. 그러니 어떤 때 어떤 커피가 가장 맛있는지는 사람마다 다 다르지 않겠어요? 우리 커피를 손님들이 좋아해 주시면 고마운 일이지만, 입에 맞지 않는다고 할 분들도 있을 수 있고요. 손님이 또 오고 싶다고 여겨주시면 고마울 따름입니다.”
이곳에 온 한국 손님들이 즐겨 찾는 건 아이스 커피. 꽤 과정이 복잡하다. 커피로 스테인리스 통을 한 번 헹궈낸다. 잘 내린 커피를 여기에 담아 한눈에 봐도 연식이 오래된 냉장고로 가져가 냉동칸 얼음 위에 오랜 시간 손으로 굴린다. 이렇게 차갑게 식힌 커피를 같은 커피로 얼려 만든 얼음과 함께 낸다. 손님이 마지막 커피 한 모금까지 동일한 커피 맛을 느낄 수 있도록 하기 위한 수고로운 배려다.
손님과 함께 시간을 쌓아가는 카페
이 때문일까. 람브르 곳곳엔 쌓인 손님들의 ‘애정’이 많다. 손님이 만들어온 스테인드글라스로 만든 조명, 마스터가 커피를 내릴 때 쓰는 작은 구리 냄비가 그렇다. ‘손님이 반복해 찾아오고 싶은 그런 곳이어야 한다’는 마스터의 이야기는 현재 진행형으로 이어지고 있다.
도쿄=김현예 특파원 hyki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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