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지 경찰 집안이라는 이유로.. 일가족 6명 몰살
[오마이뉴스 박만순 기자]
한국전쟁이 일어난 해인 1950년 9월. 보안서원들과 인민위원회 간부들이 전남 장흥군 대덕면 가학리 이국빈 집을 들이닥쳤다. 이들은 아무 설명도 없이 이국빈의 아들 이대진(1909년생)을 마을 공회당으로 끌고 갔다. "저런 쯧쯧"하며 마을 사람들이 혀를 찼다. 하지만 누구도 인민위원회 간부들을 제지할 순 없었다.
그 중 책임자는 마을 사람들이 모두 지켜보는 가운데 "이대진은 아들과 동생이 경찰로 반동 집안입니다. 그렇기에 사형을 집행합니다"라고 말했다. 말이 끝나자마자 보안서원들의 총구에서 불이 뿜어져 나왔다. 이대진이 해명할 수 있는 기회는 주어지지 않았다. 1950년 9월 9일 장흥군 대덕면 가학리 마을 공회당에서 있었던 일이다.
20여 일 후인 1950년 9월 30일 대덕면 보안서원들과 인민위원회 간부들은 또다시 이국빈의 집을 찾았다. 이번에는 이국빈과 그의 처 김서운례(1896년생)를 연행해 마을 뒷산에서 학살했다.
이국빈 내외가 마을 뒷산으로 끌려간 지 이틀 후인 10월 2일, 이번에는 이국빈의 며느리 홍금순(1905년생)과 손자 이상식(1939년생), 이상배(1948년생)가 끌려갔다. 세모자 역시 가학리 뒷산에서 죽임을 당했다. 긴 말은 필요 없었다. 단지 경찰 가족이기 때문이었다.
이국빈의 큰 손자 이상준은 장흥경찰서 경찰이었는데, 1948년 여순사건 당시 봉기군과 교전 중에 사망했다. 이국빈의 둘째 아들 이대순도 장흥경찰서 경찰로, 6.25 직후 후퇴했다. 전쟁 발발 후에도 피난을 가지 않았던 이국빈 가족은 결국 점령한 북한군(인민군)과 지방 좌익에게 반동 가족으로 몰려 6명이 떼죽음을 당했다.
경찰가족·지주·우익단체·기독교인은 살생부로
6.25가 발발하기 하루 전인 1950년 6월 24일 저녁 9시경 전남 장흥군 유치산에 있던 인민유격대(빨치산)는 장흥군 장평면 기동리 김형제(1887년생) 집을 습격했다. 이 과정에 김형제는 총격으로 사망했고, 그가 운영하던 정미소와 가옥이 방화되었다. 마침 비가 부슬부슬 내려 집이 전소되는 것은 면했다.
약 4㎞ 거리의 장평지서 경찰들이 출동했지만 이미 인민유격대는 사라진 후였다. 기동리에서 소문난 부자였던 김형제는 빨치산에게 금전적 협조를 하지 않아 학살당했다.
당시 장흥군에서 북한군과 지방좌익에 의한 학살사건, 일명 '적대세력에 의한 사건'은 인민군 점령시기(1950년 8~9월), 인민군 퇴각 이후 치안공백 시기(1950.9.28.~10월 초), 인민군 퇴각 이후 빨치산 활동 시기(1950년 10월 중순~1952년)에 발생했다.
첫 번째 시기에는 완도군 약산면 거주자들이 장흥군에 주둔하는 인민군의 정세를 파악하기 위해 대덕면에 왔다가 지방좌익에 의해 학살됐다. 두 번째 시기에는 장흥지역의 남쪽인 대덕면, 회진면, 관산면에서 활동하던 지방좌익에 의해 개인 또는 집안 일가가 학살됐다. 세 번째 시기에는 빨치산의 주요 근거지였던 유치면과 이웃한 장평면, 부산면에서 개인 또는 일가가 학살 당했다. 피해자들은 경찰, 공무원, 대한청년단원이거나 그 가족이라는 이유와 경제적으로 부유했다는 이유, 기독교 신자라는 이유로 학살되었다.(진실화해위원회, 『2009년 상반기 조사보고서』)
▲ 장흥군 적대세력에 의한 사건 피해지도(출처: 진실화해위원회) |
ⓒ 진실화해위 |
대덕면 228명, 장평면 112명, 장흥읍 102명, 유치면 75명 등 총 654명. 이는 한국전쟁 때 장흥군에서 발생한 적대세력에 의한 학살 피해자 수다. 그런데 회진면 14명, 용산면 20명, 안양면 22명 등은 같은 장흥군인데도 피해 정도가 차이가 크다. 왜 일까?
전남 장흥군은 북쪽으로는 화순군, 보성군과 경계를 이루고, 남쪽으로는 바다에 면해 있으며 고흥군, 완도군과 접해 있다. 장흥군 북부는 산악지대로 유치면 가지산이 자리해 있는데 가지산은 한국전쟁기 빨치산의 근거지가 돼 적대세력에 의한 피해가 빈번했다. 유치면, 장평면이 대표적인 사례다. 또 장흥군 남쪽에 있는 대덕면은 완도 지역으로 진주하려던 인민군이 다수 주둔했다. 그 탓에 지방좌익 활동이 두드러졌고, 적대세력에 의한 사건도 많이 발생했다.
한국전쟁기 북한군과 지방좌익에 의한 학살 피해 규모는 1952년 공보처 통계국이 작성한 <6·25사변 피살자 명부>에 수록되어 있다. 이에 의하면 장흥군 피해자 수는 654명으로 장흥군 북쪽과 남쪽에 피해자가 집중적으로 발생했다. 654명 중 제1기 진실화해위원회에서 진실규명 된 이는 68명에 불과하다.
두 손 묶고 무차별 폭행
1950년 10월. 장흥군 회진면 진목리 삭금마을에 사는 박규남(당시 26세)은 삭금교회 장로였으며 대한청년단 활동을 하였다. 같은 마을에 사는 박양운(당시 26세)은 완도군 청산도로 피신하기 위해 마을 초소 아래 바닷가에 배를 준비해놓고 숨어 있었다. 하지만 소재가 발각된 박규남과 박양운은 지방 좌익에 의해 바닷가 부근으로 끌려가 구타 당해 죽임을 당했다.
이후 남은 가족들은 생명의 위협을 느끼고 마을 야산으로 피신했다. 그러나 이들도 발각돼 마을 입구 바닷가에 있는 옥돌바위로 끌려가 몽둥이로 구타당해 죽었다. 죽은 이는 모두 8명이었다. 1950년 10월 3일과 4일에 있었던 일이다. 박규남·박양운 두 집안에서 총 10명이 죽은 것이다. 시신을 수습한 마을 주민들에 따르면 죽은 사람들 모두 두 손이 묶인 상태였다고 한다.
다른 지역에서는 이장과 경찰 가족이 죽임을 당했다. 1950년 11월 20일 장흥군 유치면에서 활동하던 빨치산은 장평면 용강리에 있던 장평면사무소 등지를 습격했고, 나머지 빨치산은 장평면 우산리, 봉림리 등지로 가 이장과 경찰 가족 등을 학살했다.
이날 장평면 우산리에 오후 5시경에 나타난 빨치산은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사람들에게 마을에 있는 사장나무 앞 공터로 모이라고 했다. 이윽고 주민들이 모이자 이장과 경찰 및 그 가족과 일가 등 열 가족이 호명되었고, 이름이 불린 사람들은 농기구와 몽둥이로 구타당해 학살당했다. 빨치산들은 이들 시신을 사장나무 부근에 있는 방공호로 옮겨 매장하게 했고, 피해자 집을 불 지른 후 마을을 떠났다.(진실화해위원회, 『2009년 상반기 조사보고서』)
▲ 증언자 이종철(이국빈의 손자) |
ⓒ 박만순 |
그는 이후 70여 년을 살아오면서 '빨갱이 가족'이라고 손가락질 받지는 않았다. '빨갱이'한테 죽임을 당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국가로부터 보상을 받은 것도 없다. 전쟁에 참여한 군인과 경찰이 죽으면 '국가유공자'로 대우받지만, 우익단체 가담자나 기독교인이라는 이유로 죽은 이들은 어떤 보상도 받지 못했다.
지난 2005년 출범한 제1기 진실화해위원회는 '적대세력에 의한 사건'도 진실규명 했다. 하지만 이들은 국가를 상대로 한 민사소송 과정에서 보상 대상에서 빠졌다. 가해자가 대한민국이 아니라 북한과 지방 좌익이라는 이유였다. 이렇기에 '적대세력에 의한 사건' 피해자 유족들은 역차별을 호소한다. 보도연맹사건, 형무소사건, 부역혐의 사건은 전쟁이 발발한 지 반백 년 만에 진실규명과 명예회복이 되었고 일부 보상까지 되는데, 자신들은 그렇지 못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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