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기만 해도 아찔한 '하늘다리', 이름에 얽힌 슬픈 사연
[오마이뉴스 오문수 기자]
▲ 산봉우리가 마치 흰 거위들이 모여 앉아 있는 것처럼 보여 백아산이라고 명명한 백아산 정상 모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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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라가기 험해 관광목장 주차장에서 정상까지가 2㎞ 정도 밖에 안되는 거리인데도 왕복 3시간 반쯤 걸렸다. 차에서 내려 산을 오르자마자 급경사가 나타나 등산객들의 호흡을 가쁘게 한다.
정상부는 거의 수직 절벽으로 되어 있어 비행기가 없던 시절이었다면 천혜의 요새랄 수 있다. 정상부로 통하는 길 하나만 막으면 접근이 거의 불가능할 만큼 깎아지른 절벽에 둘러싸여 있기 때문이다.
백아산 정상부 암석은 석회암으로 구성되어 있다. 석회암이 흰색을 띠고 있어 이것이 백아산 명칭의 유래가 되었으며, 과거 고려 시멘트에서 이곳의 석회석을 채취하여 시멘트의 원료로 사용하기도 했다.
백아산은 큰 규모의 산은 아니지만 울창한 숲과 맑은 물의 경관을 살려 자연 휴양림과 등산로 군데군데 쉬어갈 벤치가 마련되어 있었다. 정상으로 올라갈수록 험준한 칼날 능선이 펼쳐져 예쁜 소나무 숲과 산죽나무 길이 아름다웠다.
강풍 부는 '하늘다리' 앞에서 떨었지만…
▲ 어른들도 무서워하는 다리를 두번이나 왕복한 김가은(수완초 3)양이 아빠손을 잡고 웃고 있다. 고소공포증이 있다는 가은이 아버지는 결국 다리를 건너지 못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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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래에서 본 하늘다리 모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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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리 중앙에는 투명유리 조망창이 설치돼 하늘 위를 걷는 듯 짜릿한 스릴을 느낄 수 있다. '하늘다리'라 불린 연유가 있었다. 6·25 전쟁 당시 빨치산 주둔지였던 이곳에서 많은 사상자들이 생겼고 하늘로 돌아간 희생자들의 넋을 기리기 위해 다리를 '하늘다리'라 명명했다.
아내와 함께 절터바위에 도착하니 강풍이 불고 다리 초입에 세워진 간판이 흔들거리고 있었다. 간판에는 강풍이 불거나 악천후에는 다리를 건너지 말라는 경고문이 적혀 있었다.
▲ 화순군 북면 원리 방향에서 하늘다리를 건너면 곧바로 마당바위가 나온다. 산정상에 3백평 정도의 평평한 바위가 나오고 바닥에는 흙이 있다. 6.25전쟁무렵 토벌대와 빨치산 사이에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던 한국 현대사 비극의 현장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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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당바위 모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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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당바위쪽 끝까지 간 아내는 "빨리 건너오라!"며 손짓한다. 아내 옆에 서있던 어린 학생이 다리 위에서 폴짝폴짝 뛰며 아빠의 팔짱을 끼고 뭐라고 얘기를 하는 눈치다. 10여 분을 망설이고 있는데 성인 남녀가 어린 여학생과 함께 다리를 건너왔다. 필자는 김가은(수완초 3년)양을 붙잡고 대화를 시작했다.
"야! 너 대단하다. 안 무서웠냐?"
"하나도 안 무서워요. 아빠랑 같이 왔는데 아빠는 저쪽 끝에서 못 오신대요"
바람이 조금 잦아든 순간 가은이와 함께 왔던 분들이 다시 마당바위 방향으로 다리를 건너기 시작했다. "에이! 초등학교 3학년도 건너는데!"라며 앞사람 뒤 꼭지만 쳐다보고 건너가기 시작했다. 바람이 휘익 불자 다리가 흔들렸지만 이제는 돌아설 수도 없다. 다리를 건너니 가은이 아버지가 딸을 기다리고 있었다. 가은이 아버지가 계면쩍게 웃으며 말을 꺼냈다. "저도 고소공포증이 있어서요."
가은이 아버지의 말을 들으며 20여 년전 추억이 떠올랐다. 가족과 함께 뉴질랜드 남섬 배낭여행을 하는 동안 들른 곳 중 하나가 세계에서 가장 먼저 번지점프를 시작했다는 퀸즈타운 인근에 있는 카와라우 다리였다. 벌벌 떨며 번지점프 시작점까지 갔지만 도저히 용기가 나질 않아 돌아서려는데 당시 초등학교 2학년이던 딸이 내팔을 붙잡고 조르며 졸랐다.
"아빠! 이게 뭐가 무서워요. 우리 가족의 명예를 걸고 뛰어내려 봐요."
"딸아! 우리 가족 중에 영어하는 사람은 나밖에 없는데 나 죽으면 너희들 어떻게 한국에 돌아갈 거야?"
그때 눈 딱감고 뛰어내릴걸 하고 후회하기도 했지만 높은 절벽에서 아래를 쳐다보면 아직도 무섭다. 절터바위쪽 하늘다리에서 나와 함께 다리를 못 건너던 분은 나이든 내가 건너는 걸 보고 용기를 내서 따라왔다고 한다.
현대사의 비극 간직한 백아산
▲ 정상으로 가는 길은 좁고 가파른 길이었다. 요즈음 등산로를 손질해서 그렇지 제대로 된 길이 없던 옛적에는 천연요새였다고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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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늘다리를 건너 정상으로 가는 길가에는 산죽들이 널려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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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아산은 석회석으로 된 산봉우리가 마치 흰 거위들이 모여 앉아 있는 것처럼 보여 백아산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하얀 거위'라는 뜻의 '백아(白鵝)'. 그러고 보니 산 정상부가 하얀 거위를 닮은 것처럼 하얗다.
1614년 이수광이 편찬한 우리나라 최초의 문화백과사전이랄 수 있는 <지봉유설>에는 "거위는 귀신을 놀라게 한다" "거위는 능히 도둑을 놀라게 하고, 또 능히 뱀을 물리친다"고 기록하고 있으며 "그 똥은 뱀을 죽인다"는 기록도 있다.
▲ 백아산 등반에 나선 등산객들 모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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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깎아지른 절벽아래에는 절벽사이에서 흐르는 물이 고여 샘을 이루고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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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해방 이후부터 1950년 6·25 전쟁 때까지 전라남도 화순군 백아산 일대에서는 국군과 빨치산 사이에 전투가 벌어졌다. 백아산은 인천 상륙 작전으로 남한에 고립된 북한군과 좌익 게릴라들이 순창 회문산 및 지리산 등과 더불어 아군과 수많은 전투를 벌였던 격전지 중 한 곳이다.
전라남도 지역에서 활동한 무장 유격대의 근거지는 백아산이었다. 백아산은 높이 810m에 이르는 험준한 산악 지대이며, 주변에는 수많은 골짜기가 형성돼 있어 유격 활동을 전개할 수 있는 천연의 요충지였다.
백아산 기슭에는 1950년 9월 25일 도당 유격대가 설치됐고, 10월 5일에는 조선 인민 유격대 전남 총사령부가 발족됐다. 백아산 빨치산 유격대 사령부는 노치리 놀치 뒷산 높이 약 700m 고지에 있었고, 노치와 동화 계곡 등에 진지를 구축했다.
이들은 산속 곳곳에 발동기와 연자방아를 두고 식량을 조달하고, 바위와 작은 굴속에서 솟아나오는 샘물로 연명하며, 장기 항전을 펼쳤다. 박영발과 김선우가 지휘하는 전남 유격대는 백아산, 조계산, 백운산 일대에 약 2000명 정도가 있었다. 백아산 일대는 '낮에는 대한민국, 밤에는 인민 공화국'이라는 상황이 1951년 봄까지 지속됐다.
토벌대는 백아산 토벌 작전이 장기화됨에 따라 광주의 미 고문단에게 공중 지원을 요청했다. 그리하여 일본 오키나와에 있던 미군 전폭기가 공격에 나섰다. 토벌대의 공격에 앞서 미군의 전폭기가 출동해 백아산과 화학산 등지를 여러 차례에 걸쳐 폭격했다. 당시 전폭기 1대가 유격대에 의해 백아산에 추락할 정도로 빨치산의 저항이 강했다.
▲ 등산로 초입에 놓인 지팡이들. 백아산 등반을 마친 등산객들이 나중에 백아산을 등반하는 사람들을 위해 두고 갔다. 흐뭇한 미소를 짓게 만드는 장면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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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아산은 빨치산과 토벌대 그리고 지역 주민에게 고통과 좌절을 안긴 슬픔의 무대였다. 2003년부터 백아산 철쭉제와 함께 6·25 희생자를 위한 위령제가 진행되고 있다.
'귀신을 놀라게 하고, 도둑도 놀라게 한다'는 하얀 거위 '백아(白鵝)'. '하늘다리'에 놀랐고 한국현대사의 아픔을 간직한 역사에 다시 한번 놀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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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여수넷통뉴스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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