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엄에 사표 던진 유일한 공직자, 류혁은 어떻게 '노!'를 외쳤나
[김성욱, 권우성 기자]
2024년 12월 3일 밤. 총 든 군인들이 창문을 깨부수고 국회에 난입하던 무렵, 대한민국 정부에 한 통의 사직서가 접수됐다.
'법무부장관 귀하 / 성명 류혁 / 주민번호 68****… / 위 본인은 금일 일신상의 사유로 사직하고자 하오니 허락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 2024.12.4 00:09'.
28년간의 공직 생활을 서둘러 끝내고 있는 이 짧은 사표는 '법과 질서의 확립'이란 구호가 박힌 법무부 메모지에 휘갈겨 쓰여졌다. 다급함이 역력한 손 글씨는 이렇게 끝마친다. '법무부 감찰관 류혁'.
|
▲ 류혁 전 법무부 감찰관. |
ⓒ 권우성 |
"물론 그때 결심이 어렵긴 했지만, 사실 제 인생에서 가장 힘든 결정은 아니었어요."
나긋나긋하고 주름진 웃음 속에 예상 밖의 답변이 돌아왔다. 류 전 감찰관을 지난 12일 서울 종로구 <오마이뉴스> 사무실에서 만났다.
"저와 반대로 과천 청사로 집결하던 차들의 행렬… 비현실적이었죠"
- 2024년 12월 3일 오후 10시 23분 비상계엄이 선포됐을 때, 항명의 뜻으로 사직한 공무원은 류 감찰관이 유일합니다.
"처음 하는 얘기인데, 사실은 그날 출근을 안 하려고 했어요. 집에서 갈까 말까 고민했습니다. 사표만 내면 되지, 굳이 갈 필요는 없잖아요. 차라리 안 가는 쪽이 마음은 더 편했겠지요. 그런데 TV에서 계엄 선포 장면이 계속해서 나오는 거예요. 대통령이 고압적인 모습으로 '일거에 척결한다'고 하는데, 속에서 뭔가 '울컥'하더라고요. 가야겠다 싶었죠. 밤 11시 좀 넘었을 거예요. 집이 마포거든요. 과천 청사에 도착하니 12시 조금 전이었던 것 같아요."
- 박성재 법무부 장관과 간부들이 회의를 하고 있었다고요.
"한 열댓명 정도 됐을 거예요. 평소 실국장 회의 인원보다 좀 더 많았던 걸로 기억합니다. 과장급인 분이 저를 보시더니 상석에 앉으라고 자리에서 일어서시더라고요. 앉지 않았죠. 장관이 말을 하고 있었는데 제가 중간에 끊었어요. '혹시 계엄 관련 회의입니까?' 박 장관이 아주 언짢은 표정으로 '네 그래요' 하더라고요. 곧바로 '그러면 저는 이 회의에 참석할 수 없습니다. 계엄과 관련한 일체 지시나 명령에 따를 생각 없으니 사직하겠습니다'라고 의사 표시를 했죠. 그랬더니 박 장관이 큰 소리로 '그렇게 하세요'라고 했어요. 불만조였습니다.
|
▲ 류혁 전 법무부 감찰관. |
ⓒ 권우성 |
"당연히 있었죠. 차를 타고 청사를 빠져나가는데 제 차 하나만 나가는 방향이었고 수많은 차들이 헤드라이트를 환하게 켜고 일렬로 줄을 지어 청사 쪽으로 들어오고 있더라고요. 다 공무원들이었겠죠. 정말 비현실적인 장면이었어요. 이게 뭔가 싶고… 그때 저는 제 차가 청사 출구에서 막힐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었습니다. 다행히 그렇지는 않더라고요. 나오자마자 집까지 냅다 밟았습니다(웃음)."
- 당일 새벽 2시 20분자 언론 기사에서 대통령의 계엄이 "내란죄에 해당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때는 비상계엄이 해제(오전 4시 30분)되기도 전이었어요.
"죽을 때 죽더라도 찍소리는 하고 죽자 싶었어요. 사직서를 내고 난 뒤니까 그렇게 말할 수 있었던 것도 있고요. 법조인이라면 다들 비슷하게 판단할 수 있었다고 봐요. 특히 1995~1997년 12.12(군사쿠데타)에 대한 기소와 재판을 거치면서 12.12는 내란이라는 확실한 정의가 내려졌거든요. 그때 제가 초임 검사 시절이었는데, 12.12 판결문을 정독했던 기억이 납니다. 거기 비춰봐도 이번 계엄은 100% 내란이라고 지금도 확신해요. 무슨 '전공의를 처단'합니까? 대단히 사적인, 개인 맞춤형 계엄이라는 게 명백하죠.
|
▲ "계엄 따를 수 없다" 류혁, 국회 청문회 증언 지난해 12월 3일 윤 대통령이 계엄을 선포한 직후 소집된 법무부 회의에 참여를 거부하고 사직서를 낸 류혁 법무부 감찰관이 2월 4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윤석열 정부의 비상계엄 선포를 통한 내란 혐의 진상규명 국정조사 특별위원회' 2차 청문회에 증인으로 출석해 답변하고 있다. 류 감찰관은 비상계엄 당시 당일 자택에서 계엄 소식을 접하고 비상소집에 따라 즉시 과천 청사로 출근해 박성재 법무부 장관에게 '계엄 관련 회의냐'고 물은 뒤 '그렇다'는 답변을 듣자마자 '따를 수 없다'며 직을 던졌다. |
ⓒ 남소연 |
- 판단도 빨랐지만, 곧바로 행동으로 옮기는 건 또 다른 문제인 것 같아요. 어떻게 가능했나요?
"이렇게 얘기하기가 좀 그렇긴 하지만, 사실 제게 이번 일은 별로 어렵지 않았어요. 제가 2006년에 삼성에서 나올 때 너무 힘들었기 때문에, 그때와 비교하면 오히려 쉬운 결정이었거든요(웃음)."
- 무슨 일이 있었나요?
"제가 1997년부터 검사 생활을 하다가 2005년에 삼성전자로 가게 돼요. 서울대학교 전자공학과 출신이기도 하고, 제가 1994년에 사법시험 2차 시험을 보고 나서 최종 결과가 나오기 전까지 한 6개월간 삼성전자 반도체 엔지니어로 일한 적도 있었거든요. 그때만 해도 경제가 팽창하던 시기고 기업에 인력이 부족한 때라 그런 식으로도 취직이 됐었어요. 제가 스물 여섯 때였는데, 사법시험 결과와 상관없이 와이프랑 결혼을 하기로 돼 있었기 때문에 사법시험 치자마자 결과가 나오기도 전에 바로 취직부터 했었습니다.
그런데 결과가 합격이어서 검사로 임관하게 됐고 삼성전자에서는 금방 나오게 됐어요. 짧은 기간이었지만 그때 삼성 다니면서 공부를 엄청 했습니다. 반도체 쪽이 정말 정말 어렵거든요. 고통스러운 전자기학 공부에 비하면 사실 법 공부는 가성비가 지나치게 좋은 거예요(웃음). 특히 한 달 반 정도 반도체 팹(제조시설)에 들어가 일해보기도 했는데, 현장에서 반도체에 대해 상당히 많이 알게 된 기회였죠. 제가 연구개발 분야에 기여할 수 있을 정도까지는 못 되겠지만, 법조인 중에 반도체 레이아웃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아마 저밖에 없을 거라 생각해요. 어쩌다 보니 희한한 이력이 만들어진 건데, 검찰 조직에서는 저의 이런 이력을 활용할 생각을 전혀 안 하더라고요.
반면에 제 이력을 알고 있는 삼성 쪽에서는 제가 필요하다고 했어요. 검사 9년 차가 되면서 검찰에 대해 나름 실망도 쌓여가고 있었고, 법무부가 싫기도 했던 무렵이었죠. 그때 사실 제가 잘 나갔거든요. 동기들 중에 법무부에 제일 먼저 들어간 것도 저였고요. 보통 법무부에 한 번 갔다 오면 다음에는 좋은 자리가 보장되기 때문에 검사들은 법무부 근무를 선망해요. 근데 저는 뭔가 안 맞더라고요. 차라리 당시 일류였던 삼성이라는 회사가 더 좋은 회사가 되는 데 내가 뭔가 기여할 수 있는 게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결국 삼성행을 택했죠. 후에 들어보니 법무부에서 일하다 퇴직한 검사는 제가 처음이라고 하더라고요.
그렇게 삼성에서 1년 6개월 있었는데, 처음엔 좋았어요. 기술 문제로 생긴 큰 소송도 하나 해결했고, 나름대로 인정도 받아서 최연소 임원까지 올라갔었죠(웃음). 서른 여덟 살 때예요. 그런데 시간이 갈수록 회사는 점점 제가 '검찰 출신 법조인'이라는 쪽에 방점을 찍어가는 것 같았어요. 저는 '전자공학 출신 법조인'이라는 데 방점이 찍히길 바랐는데… 제가 원하는 대로 굴러가 주진 않았던 거죠. 그렇다고 하기 싫은 일을 억지로 하고 싶진 않았어요. 말을 안 들을 수밖에 없었죠. 결국 퇴사하기로 결심했는데, 그때가 제일 어렵고 힘든 시기였어요.
|
▲ 류혁 전 법무부 감찰관. |
ⓒ 권우성 |
"저밖에 없을 것 같네요."
- 특이한 삶의 경로가 혹시 계엄의 순간에 다른 목소리를 내는 데 일조했을 수 있을까요?
"그럴 수도 있겠네요. 저는 최고의 길을 가다 인생 행로가 한 번 꺾여봤으니까요. 검사 출신인 윤 대통령은 '내가 수사해봐서 다 아는데' 스타일이지만, 사실 검찰은 다양성이 많이 떨어지는, 아주 획일적인 조직이에요. 서울 법대생 10명만으로 구성된 엘리트 조직과, 엘리트는 아니지만 다양한 배경과 경험을 가진 10명으로 된 두 조직을 놓고 비교 실험을 하면 엘리트 조직이 의사결정의 질이 더 떨어진다고 하잖아요. 동종교배와 순혈주의는 토론과 보완이 안 되니까요. 검찰은 순혈주의에 가깝다고 봐야겠죠.
저는 이게 비단 조직 차원이 아니라 개인 차원에서도 똑같이 적용될 수 있다고 봐요. 윤 대통령은 얼마나 다양한 경험이 부족했으면 계엄 같은 시대착오적인 일을 꿈꿨을까요? 구석에 틀어박혀 철저하게 유리돼 있었다는 증거 아니겠어요. 다양한 경험과 자극이 결국 나다운 인생을 살 수 있게 돕는 건데요. 그런 면에서 저는 사실 취미 생활을 통해 의도치 않게 선한 영향을 많이 받아온 것 같아요. 제가 취미가 좀 많거든요(웃음). 철인 3종, 마라톤, 별 보기, 모형 만들기, 탐조, 오토바이까지…"
|
▲ 류혁 전 법무부 감찰관이 지난 12일 서울 종로구 <오마이뉴스> 사무실에서 진행된 인터뷰에서 자신이 직접 찍은 천체 사진들을 보여주고 있다. |
ⓒ 김성욱 |
"일단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게 됐어요. 제가 마라톤 클럽, 철인 3종 클럽, 별 보기 클럽, 탐조 클럽을 나가는데, 거기서 만난 친구들 중에는 택배하는 사람도 있고 퀵 배달하는 사람도 있고 설비 엔지니어도 있고 선생님도 있고 소방관도 있고 경찰관도 있어요. 검사들이 일반적으로 많이 만나는 부류는 아니죠. 피의자가 아니고서는요.
이 사람들 한 명 한 명의 삶을 오랜 기간 조금씩 접하게 되면서 제가 깨달은 게 있어요. 검찰 조직에서 통상 말하는 사회 지위의 고하를 떠나서, 한 사람 한 사람에 존경심을 갖지 않을 도리가 없다는 거예요. 특히 취미 생활을 한다는 것 자체가 자기 만족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자기 삶을 사랑하는 사람들이라는 뜻이거든요. 대부분의 검사들이 가진 선입견과는 다르게, 무슨 직업을 갖고 있든 간에 사람들은 최선을 다해 자기 일을 하고 있고, 거기에 보람을 느끼고 있고, 자투리 시간을 내서 여기저기에 모이고 있었어요. 그렇게 만난 개개인들 모두가 자신의 위치에서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던 거죠. 우주의 별처럼요.
제가 아까 계엄 선포를 보면서 '울컥'했다고 했잖아요? 사실 굉장히 불쾌하고 화가 많이 났던 것 같아요. 왜냐면 계엄 선포문에는 그 순간에도 열심히 자기 빛을 발하고 살아가는 한 사람 한 사람의 소소한 일상에 대한 존중심이 전혀 안 느껴져서요. 깡그리 무시하고 사람을 그냥 개나 소, 돼지 취급하는 거죠. '이 자가 사람들이 말을 안 하고 있으니까 막 해도 되는 줄 아나' 싶은 거예요. 대통령의 저 거친 언어를 보세요. 도대체가 사람들의 평온한 일상과 삶에 관한 배려에 대해 무엇을 아는 자인가 싶지 않아요? 그 불쾌감, 거기서부터 그날 제 행동이 나왔던 것 같아요."
- 일상의 취미 생활이 계엄 때 'NO'를 외치는 데 도움을 줬다는 건가요?
"얼핏 상관 없는 것처럼 보이는데, 사실인 것 같아요. 저의 가장 오래된 취미는 모형 만들기예요. 1974년 유치원 다닐 때 문방구에서 산 조그만 자동차가 제 첫 작품이었다는 걸 확실히 기억해요. 오늘도 TBM-3 어벤저라고, 2차 세계대전 당시의 비행기를 만들다 나왔죠. 조악하긴 하지만 가끔 기계공작도 하고, 용접도 좀 해요. 작년에 '아카데미과학 K-방산 프라모델 콘테스트' 심사위원까지 했습니다(웃음). 모형의 가장 큰 매력은 만들다 보면 제 마음이 평정을 찾게 되고, 고요해진다는 거예요.
어떻게 보면 제 취미들이 상당히 다른 것들 같지 않아요? 예를 들면 마라톤과 별 보기는 굉장히 상이한 활동 같잖아요. 실제로 한번은 별 보기 클럽에서 만난 한 친구가 저한테 '마라톤은 우리 활동이랑 너무 다르지 않아?' 하고 물은 적이 있어요. 제가 그랬죠. '겉보기엔 다른 것 같아도 근본에 있어서는 같은 취미야. 결국 내 마음 속을 들여다 보고, 복잡한 현실 속에서도 마음의 평온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취미는 다 똑같거든.' 그 친구는 얼마 뒤 마라톤에 빠지게 됩니다(웃음).
저는 바른 판단을 하는 데에는 건강한 몸, 마음의 여유가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저는 감찰관으로 일하면서도 매일 아침 5시 30분에 일어나 한 시간씩 운동을 했어요. 일주일 중 5일은 한강을 뛰고, 나머지 이틀은 자전거를 타거나 트레이닝을 했죠. 운동을 마치고 7시 15분쯤 지하철을 타면 안정적으로 8시 반 전까지 과천 사무실에 도착하는 루틴이었어요.
|
▲ 류혁 전 법무부 감찰관이 지난 12일 서울 종로구 <오마이뉴스> 사무실에서 진행된 인터뷰에서 자신이 직접 만든 천체 망원경 등의 장비들을 모형으로 제작한 사진을 보여주고 있다. 그는 "프라모델을 만들면 마음의 평정심이 찾아온다"고 했다. |
ⓒ 김성욱 |
"전혀요(웃음). 제가 그렇게 살았다면 여태 여기서 살아남았을 수 있었겠어요? 제가 사표 쓰기 전까지 저희 동기들 중에 남아있는 사람이 심우정 검찰총장이랑 저, 딱 둘 뿐이었거든요. 그런데 이런 생각은 듭니다. 지금의 윤 대통령이나, 그 주변을 맴돌면서 궤변을 늘어놓고 있는 검찰 선배들이나, 다 '조직을 위한다'면서 검찰 조직 내에서 목소리가 컸던 사람들이거든요. 그런 사람들 치고 조직을 망치지 않고 나간 사람이 없어요. 옷 벗자마자 얼굴 싹 바꿔서 전관 예우 받으면서 떵떵거리는 선배들도 마찬가지고요.
그런데 어느 조직이나 마찬가지겠지만, 검찰이나 공무원 사회에도 여전히 그런 쪽으로 흐르지 않고 정도를 지키는 사람들이 남아 있다고 저는 생각해요. 제가 대검찰청 마라톤 동호회 회장 출신인데, 여기 계셨던 분들이 그런 분들이 많았다고 자부합니다(웃음). 지금은 거의 다 퇴직자들이 됐지만, 아직도 모여요. 참 좋죠. 동호회원들 중에는 검사들보다는 방호원이나 운전원, 청원경찰, 일반직 계장 분들이 더 많았어요. 생각해보면 검찰이라고 검사들만 있는 건 아니잖아요. 예전에 대검에 포클레인 하나가 난입해서 돌진한 유명한 사건이 있었는데 그때 유일하게 맨몸을 던져 막으려고 애쓰다 다쳤던 분이 주OO씨라고, 청원경찰인데 저희 동호회원이었죠. 대검에서 방호원으로 30년 넘게 일하다 퇴직한 유OO 총무도 저희 동호회셨고요. 이런데 제가 무슨 조직 부적응자겠어요(웃음)."
"상황은 주어지죠, 그때 어떤 선택을 내리시겠습니까"
- 하지만 이번 계엄 선포 때 다른 공무원들 중에서는 류 전 감찰관처럼 공개적으로 반대 표시를 한 사례가 하나도 없었습니다. 시민들 입장에서는 대한민국 공직 사회에 실망할 수밖에 없는 상황 아닌가요?
"저도 좀 실망스럽긴 한데, 다행히 계엄이 일찍 해제되는 바람에 공직자들이 능동적이고 적극적으로 움직일 시간도 좀 없었던 게 아닌가 싶기도 해요. 이렇게 생각하지 않으면 그동안 너무 불안한 나날들이 이어졌기 때문에, 이런 식으로 스스로 위안을 삼은 거기도 하지만요. 실제로 한 후배가 제게 자기도 선배처럼 거부하지 못한 게 후회가 되고 부끄럽다고 토로한 적도 있어요. 그때 제가 해줄 수 있는 말은 '나는 좀 생각이 빨랐을 뿐이고, 너도 시간이 조금 지났다면 나와 똑같이 행동했을 거라고 생각한다'는 것뿐이었죠. 저는 친위 쿠데타가 좀더 지속됐다면 분명 항거하는 공직자들이 더 나왔을 거라고 믿습니다."
- 그렇지만 비상식적인 계엄이 벌어진 지 두 달이 지난 지금까지도 시민들은 아직 책임 있는 공직자들로부터 제대로 된 사과는커녕 이렇다 할 설명조차 듣지 못한 상태입니다. 한국 사회를 이끌어온 리더십이 비관적인 상황 아닌가요?
"저도 법조인의 한 사람으로서, 28년 동안 검찰과 법무부에 몸담았던 한 공직자로서 부끄럽습니다. 그러나 책임이 있는 사람들에게는 결국 그에 마땅한 책임이 돌아갈 거라고 저는 굳게 믿고 있어요. 제가 운동과 취미, 건강과 마음의 평정심을 강조한 것도 연결되는 얘기 같아요. 이번 사태를 겪으며 느낀 건 사람에게 '상황은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내가 '상황'을 만들기만 할 수 있다면 인생이 참 수월하겠지만, 삶에 있어 대부분의 중요한 순간들은 '주어지는' 것이더라고요. 그런데 그때, 그 '상황'이 얼마나 압도적인가와 상관 없이, 어떻게 움직이는가는 전적으로 나에게 달려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선택은, 이전까지 각자가 어떻게 살아왔는가에 따라 좌지우지되는 것 같아요.
이번에 제게 주어졌던 상황은 '계엄 선포'와 그에 따른 '법무부의 회의'였죠. 아무리 엄혹한 계엄이라 할지라도, 그걸 따르고 안 따르고는 결국 제 마음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그 결과 생기는 불이익은 제 책임이겠지요. 그날 밤 저는 제 나름대로 선택을 했고, 그에 따를 후과를 각오했습니다.
|
▲ 류혁 전 법무부 감찰관. |
ⓒ 권우성 |
- 여전히 계엄 사태의 한가운데를 지나고 있는 시민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이 있을까요?
"사실 많은 사람들에게 속 터지는 시간일 거라고 생각해요. 지리하고 말도 안 되는 저들의 여론전을 계속 지켜봐야 하니까요. 그나마 저 같은 법조인들은 법정에서 하도 질 나쁜 범죄자들의 억지를 많이 봐와서 익숙하거든요(웃음).
분명히 말하고 싶은 건, 이번 일은 생각보다 긴 레이스가 될 거라는 겁니다. 마라톤으로 치면 울트라마라톤(100km 경주) 같은 거죠. 저는 탄핵이 된다 해도 겨우 2~3부 능선까지밖에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지금은 한 1부 능선 정도 왔을까요. 12.12 때는 이미 죽은 퇴물 권력을 한참 지나 응징하는 건데도 그렇게 힘들었거든요. 하물며 이번 건은 현직에 있는 권력들을 향해 책임을 묻고, 무너진 법을 다시 세우는 일이에요. 단순히 정권 바꾼다고 해서 끝날 문제가 절대 아니고요, 아주 아주 오래 걸릴 일입니다.
제가 울트라마라톤도 해본 적이 있는데, 절대 조급하면 안되거든요. 길게 보고, 천천히 뛰어야죠. 그런데 그렇게 천천히 뛰고 있다고 해서 울트라마라톤 하는 사람의 의지가 약한 건가요? 아니잖아요. 저는 지금 계엄 사태를 겪고 있는 모든 시민들의 마음도 비슷한 거 아닌가 싶어요. 정의를 회복해야 한다는 강한 의지가 눈으로 보이지 않을 뿐, 다들 마음 속 깊이 간직한 상태잖아요. 저들처럼 겉으로 폭력을 쓰고, 혐오를 쓰고, 악을 쓰고, 폭동을 일으키지 않고 있을 뿐이죠. 저도 그렇고요.
|
▲ 류혁 전 법무부 감찰관. |
ⓒ 권우성 |
"사실 아직 정하지 못했어요. 그래서 조금 불안해지고 가끔 우울해지긴 하는데, 그럴 때마다 달리기를 합니다. 다만 지금까지처럼 나답게 인생을 살아가는 거죠. 일단 6월에 경남 고성에서 하는 철인 3종 대회에 나가야 돼서 준비를 잘 해야 되고요. 3월에도 마라톤 대회가 있고. 5월에는 몽골에 탐조인들하고 같이 새보러 가기로 했고요…
저도 다른 시민들처럼 저의 위치에서 저의 일상을 잘 지켜나가는 게 중요한 때인 것 같아요. 그렇다고 아까 말한 것처럼 의지가 약해진 건 아니니까요. 필요하면 언제라도 촛불 하나라도 켜고 나갈 각오를 품고서, 저도 서서히 제 일상을 찾아가려고요. 웃으면서요.
Copyright © 오마이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교문 밖으로 쫓겨난 극우... "감히 민주화의 성지에, 동문들이 고려대 지켰다"
- 홍준표, 명태균 만난 적 없다더니... 사진도 나왔다
- 곽 사령관 부하들 "대통령이 의원 끌어내라 지시했다고 들었다"
- [단독] "난감" 단국대, 해병대 '김계환 추천서'에 결국 석좌교수 임용
- [박순찬의 장도리 카툰] 창간 25주년을 축하합니다
- 육사가 12.3 내란에 꽂은 비수... 사관학교 교육과정 살펴보니
- 오세훈, "아이들 밥 주는 게 싫다고 사퇴했던..." 질문에 정색
- "25살 청년 오마이뉴스, 100살까지 쭉 나아가길"
- 707특임단 작전관 "코브라 타이, 포박용 맞다", <오마이뉴스> 보도 사실 확인
- 김두관 "아무리 당대표지만 '중도 보수' 동의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