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세사기 빌미 줬던 巨野, 이번엔 혈세로 '묻지마 先구제' 강행
청약예금 등 투입된 주택기금
사기피해자 3만명에 현금지원
5000만원만 지급해도 1.5조원
이미 쪼그라든 기금 더 고갈
결국 추경 등 재정으로 메꿀판
다른 사기 피해와 형평성 논란
17일 국토교통부에 따르면 지난달 20일까지 누적 기준으로 총 1만4001명이 전세사기피해지원위원회 심의를 통해 피해자로 인정받았다. 현행 특별법에 따라 피해자로 인정받은 사람에게는 거주하는 주택에 대해 우선매수권이 생기고, 이를 한국토지주택공사(LH)에 양도한 뒤 공공임대로 계속 거주할 수 있다. 피해자가 원하면 최장 20년까지 주거 안정을 보장받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 같은 지원 방안 확대에도 불구하고 피해자들이 '집주인에게 돌려받지 못한 보증금을 정부가 직접 구제해달라'고 요구하면서 그 간극을 메우는 게 쉽지 않은 상황이다. 더불어민주당 등 야당이 주도해 국회 본회의에 직회부한 전세사기특별법 개정안은 주택도시보증공사(HUG)를 비롯한 공공기관이 전세사기 피해자의 임차보증금반환채권을 매수해 보증금을 돌려주는 '선(先)구제, 후(後) 회수' 방안을 담고 있다.
전세사기 피해자에게서 채권 매입 신청을 받으면 기관은 공정가치 평가를 거쳐 매입하는 방식이다. 매입 비용은 주택도시기금을 통해 지원을 받도록 규정한다.
채권 매입 가격은 '주택임대차보호법'에 따라 우선변제 보증금 비율 이상이 되도록 규정하고 있다. 우선변제금은 서울 5500만원, 과밀억제권역 등은 4800만원, 안산·파주·평택 등은 2800만원, 그 밖의 지역은 2500만원이다. 국토부는 내년까지 3만명가량이 전세사기 피해자로 인정받을 것으로 예측하고 이들에게 최소 5000만원씩 선구제가 이뤄지면 최소 1조5000억원이 소요된다고 추정했다. 만약 피해자 평균 보증금인 1억4000만원을 전부 돌려준다면 4조2000억원가량이 필요하다. 국토부 고위 관계자는 "개정안 통과 시 주택도시기금에서 '수조 원'이 피해자에게 지급될 것으로 추정한다"고 설명했다. 반면 민주당은 개정안 통과에 따른 필요 재원이 최대 1조1700억원 수준이라고 추산한다. 피해자 평균 보증금을 1억3000만원으로 잡고 피해자가 3만명까지 늘어난다는 가정은 유사하지만 선구제액으로 보증금의 30%를 대입해 산출했다.
문제의 핵심은 주택도시기금 재정 상황이 갈수록 악화돼 결국 재정 투입이 불가피하다는 점이다. HUG에 따르면 지난해 주택도시기금 여유자금 운용 평균 잔액은 20조2280억원으로 전년(43조647억원)보다 53% 줄었다. 주택도시기금은 부동산 소유권 이전 등기 시 매입하는 국민주택채권·청약저축 등으로 조성되는 기금이다. 청약예금이 줄고 부동산 거래가 감소하자 기금이 보유한 여유자금도 말라가고 있다.
국토부 관계자는 "개정안은 공포한 날부터 1개월 뒤 시행하도록 돼 있는데 올해 주택도시기금 운용계획이 이미 나와 있어 현실적으로 기금에서 선구제를 실현하기 어렵다"며 "당장 시행하려면 추가경정예산 편성이 불가피하다"고 설명했다. 이 기금은 분양주택 융자·신생아특례대출 확대 등 무주택자들의 주택 구입이나 전세자금 지원을 위해 조성된 것이어서 전세사기 피해자에게 지급하는 게 합의되지 않았다는 것도 문제다.
개정안에 담긴 내용을 구체적으로 실행하기 위한 세부 계획이 마련되지 않은 상태에서 개정안만 통과되면 오히려 혼란이 가중될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국토부 관계자는 "개정안에서 규정하고 있는 채권 매입을 위한 '공정가치' 평가가 무엇인지 전문가들에게 의견을 수렴할 시간이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근본적으로는 '사기' 사건에 대해 정부가 직접 구제하는 선례를 남기는 것이 적절한지도 문제로 지목된다. 조주현 건국대 부동산학과 명예교수는 "전세사기 피해자를 다른 사기 피해자보다 우선해서 구제해야 한다는 사회적 합의가 있었는지 따져봐야 한다"고 말했다.
서진형 광운대 부동산법무학과 교수는 "정부가 임차인에게서 매입하는 채권은 사실상 회수가 어려운 부실 채권일 가능성이 높다"고 지적했다.
전세사기 특별법이 본회의에 직회부된 상황이지만 실제 안건 상정 여부는 전적으로 김진표 국회의장 뜻에 달린 만큼 민주당은 김 의장을 향해 법안 상정을 요구하고 있다. 김 의장이 전세사기 특별법 개정안을 상정해 민주당이 단독 처리한다면 국회가 다시 대통령 거부권(재의요구권) 정국에 빠질 수 있다. 민주당은 총선 결과를 내세워 법안 수용을 촉구하겠지만 지금까지 윤석열 대통령은 야당이 단독 처리한 법안에 대해 거부권을 행사해왔다.
전세사기 특별법 개정안이 다시 국회로 넘어오면 재표결을 거쳐야 하는데 200인 이상 찬성이 요건인 만큼 재의결은 쉽지 않다. 이달 말 21대 국회가 종료되면 전세사기 특별법 개정안은 자동으로 폐기된다. 이때 야당이 새 국회에서 다시 유사 법안을 제출할 가능성이 크다.
[김유신 기자 / 위지혜 기자 / 전경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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