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명]‘전세 모럴해저드’ HUG에 또 낙하산?
한국 주택 시장에는 다른 나라에 없는 독특한 두 가지가 제도가 있다. 선분양과 전세다. 내 집 마련 희망자들은 지어지지도 않은 아파트를 사기 위해 미리 돈을 지불하고, 세입자들은 수 천, 수 억 원의 돈(보증금)을 집주인에 빌려준다. 국민은 얼핏 불안해 보이는 이 제도에 의지해 전재산이나 다름없는 거금을 건네며 보금자리를 마련해 왔다. 물론 안전장치가 없는 것은 아니다. 불완전한 제도지만 떠받쳐 온 정책기관들이 있기에 큰 탈 없이 굴러왔다. 그중 대표적인 곳이 바로 주택도시보증공사(HUG)다.
HUG는 주택 시스템의 중추적인 역할을 맡고 있지만 일반에겐 잘 알려지지 않았다. 그간의 핵심 업무가 건설사들을 상대로 하는 아파트 분양보증이었기 때문이다. 외환위기 시절 민간공제조합이 부도 건설사들의 뒤처리를 감당 못할 지경에 이르자 정부가 공적자금을 투입해 대한주택보증을 설립했다. HUG의 전신이다. 정부 산하기관인 HUG가 아파트의 준공을 책임져주기에 수분양자들은 목돈을 미리 내고도 집을 날릴 걱정을 할 필요가 없다. 글로벌 금융위기 시절에도 여러 건설사가 무너졌지만 HUG가 역할을 하면서 선분양 제도는 굳건히 유지돼오고 있다.
요즘엔 일반인들에게도 HUG가 꽤나 익숙한 기관이 됐다. 개인들이 가입하는 전세금반환보증 때문이다. 2018년 만해도 약 29조 원이었던 전세금반환보증 잔액은 지난해 말 기준 약 105조 원으로 껑충 뛰었다. 100조원이 넘는 전세금이 떼일 염려 없이 세입자와 집주인 간 오갈 수 있도록 밑단을 받쳐주는 셈이다.
그런데 이 전세금반환보증이 HUG에 시한폭탄이 되고 있다. 전세사기·깡통전세가 전국적으로 터지면서 HUG가 대신 물어주고 있는 보증금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해 9241억원을 기록한 데 이어 올해는 4월까지 8000억 원을 넘었다.
건설사 부실까지 엎친데덮친격으로 터지면서 HUG는 이미 지난해 13년만에 적자로 돌아섰다. 2022년 재무제표에 따르면 보증금비용(7933억 원)과 책임준비금전입액(6048억 원) 등 약 1조4000억 원에 달하는 보증사고 비용을 지불했다. 적자로 인해 자본금이 줄어들자 부랴부랴 국회에서 현재 자본금의 60배인 보증 한도를 70배로 늘려줬으나 이는 언발에 오줌누기에 불과하다. 2022년 시작된 부동산 침체기를 버텨왔던 중소 건설사들이 이제 하나둘 씩 파산하고 있어 수습해야될 분양보증 사업장은 앞으로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 또 대위변제 전세금도 연말까지 2조~3조 원에 달할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온다. 신용평가사의 한 관계자는 “이대로라면 정부의 증자 즉, 공적자금 투입은 예정된 수순”이라고 진단했다.
수익이 아닌 정책적 소명을 존재의 이유로 삼는 공적 기관은 때에 따라 적자를 볼 수도 있다. 아니, 필요 시엔 적극적으로 적자를 봐야 한다. 경제 외생 변수의 충격으로 건설업계가 초토화됐을 때 HUG가 집을 완공시켜 주지 않아 수분양자들이 큰 재산을 잃고 길로 나 앉는 일은 없어야 한다.
그러나 대규모 전세대출보증 부실은 다른 성질의 문제다. HUG가 금융회사들의 ‘묻지마 전세대출’이 횡행하도록 보증서를 남발해 결국 전세값의 폭등 및 전세사기와 무리한 갭투자, 깡통전세 판을 깔아 준 것은 시장의 실패가 아닌 명백한 제도의 실패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는 엄밀히 말하면 HUG의 책임이라기보단 문재인 정부의 무리한 서민 전세지원 확대 정책 탓이다.
이런 가운데 HUG 사장 인사의 난맥상도 전 정권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정치인 출신의 비 전문가인 김현미 장관 시절부터 낙하산 인사들이 HUG의 수장 자리를 꿰찼다. 그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HUG의 사장은 국토부 장관이 친여 인사들에게 챙겨주는 자리로 전락했다. 결국 낙하산들의 부적절한 처신은 도마에 올랐다. 관리 감독 당국인 국토부와 HUG의 수장이 정신차리고 전세보증 정책을 펼쳤더라면 지금과 같은 상황은 막을 수 있지 않았을까.
이번 정부라고 다르지 않다. 최근 반년째 공석이던 사장 자리에 비전문가가 잡음 끝에 임명이 되더니 그마저도 석연찮은 이유로 자진사퇴했다. 정치인 출신인 원희룡 장관은 대규모 낙하산 인사에 대한 지적(본지 4월14일자 8면 참조)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친여 인사들을 계속 국토부 산하 기관에 꽂아 넣고 있다. 현재 재공모 절차가 진행중인 HUG 사장 역시 주택 정책의 경험이 없는 이가 내정됐다는 이야기가 들려온다.
정책의 실패를 지적하면 이 정부가 전가의 보도처럼 꺼내는 해명이 있다. 전 정부에서 비롯된 일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번 정부는 달라야 하지 않을까. HUG 사장이 누가 될지 지켜볼 일이다.
이혜진 기자 hasim@sedaily.comCopyright © 서울경제.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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