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살 도현이 할머니 탄원서 “죽자니 아들에게 더 큰 죄” [취재후]
지난해 12월 6일.
그날도 68살 최 모 씨는 자신의 차량을 운전해, 논술 학원을 마치고 나온 12살 손자 도현이를 집에 데려다주고 있었습니다.
여느 때와 다르지 않은 하루였습니다. OO 아파트 사거리에서 좌회전한 차량이 갑자기 굉음을 내기 직전까지는요.
갑작스런 굉음과 함께 속도를 높인 차량은, 최 씨가 손쓸 틈도 없이 앞에 서 있던 차를 들이받았습니다.
이후에도 멈추지 않고 달렸고, 속도가 높아지는 차 안에서 최 씨는 역주행까지 해가며 어떻게든 사고를 피하려 노력했습니다.
차량 내부 블랙박스에 담긴 최 씨 음성엔 당시 당혹스런 감정이 고스란히 담겨있습니다.
"아이고 이게 왜 안 돼. 엄마. 이게 안 돼. 도현아, 도현아. 도현아. 도현아~!"
1차 사고 뒤에도 600m 넘게 더 달린 차량은 연석을 들이받은 충격으로 날아올라 6차선 도로를 넘은 뒤, 수로로 추락했습니다.
이 사고로 운전자 최 씨는 크게 다쳤고, 뒷자리에 탄 12살 도현이는 병원으로 옮겨졌지만 끝내 숨졌습니다.
[연관 기사]
‘급발진 의심’ 12살 도현이 사망, 아빠의 소명은… [KBS 뉴스9, 5월 22일]
https://news.kbs.co.kr/news/view.do?ncd=7681522
‘사고 전 마지막 기록’ 해외는 20초, 우리는 5초? [KBS 뉴스9, 5월 22일]
https://news.kbs.co.kr/news/view.do?ncd=7681523
■8년간 접촉사고 한번 없이 도현이 하원길 챙겼던 할머니
서울에 살고 있던 도현이 할머니 최 씨는 2015년 남편과 함께 아무 연고도 없던 강릉으로 왔습니다.
강릉으로 이사를 온 아들(도현이 아빠) 부부의 아이들(도현이와 도현이 여동생)을 돌보기 위해서였습니다.
강릉으로 온 뒤, 도현이 남매의 하원과 하교는 줄곧 할머니 담당이었습니다.
오후부터 일하는 도현이 엄마를 대신해 8년간 남매를 챙긴 겁니다.
사고를 당한 날, 학교를 마치고 들렀던 논술학원도 도현이가 3년 넘게 다닌 곳입니다.
사고를 당한 길도 도현이와 할머니가 3년 넘게 다닌, 그만큼 익숙한 길이었다는 겁니다.
■재판부에 제출한 할머니 탄원서엔 "죽자니 아들에게 더 큰 죄"
도현이 할머니는 이번 급발진 의심 사고로, 한순간에 손주를 잃고 동시에 손주를 숨지게 한 혐의로 피의자가 됐습니다.
최 씨는 사고 원인 규명을 위해 차량 제조사를 상대로 제기한 민사 소송에 탄원서를 냈습니다.
이 탄원서에는 사랑하는 손주를 잃은 안타까운 심정과 함께 그동안 최 씨가 어떤 마음으로 도현이를 돌봐 왔는지 잘 담겨 있습니다.
"저녁마다 도현이가 보고 싶고 죄책감이 들어 눈물로 밤을 지새우고 있다", "죽자니 아들에게 더 큰 죄를 짓는 것 같다"며, 도현이의 억울함을 풀어 달라고 했습니다.
사고 당시에 대해선 "브레이크를 계속 밟았지만, 속도는 줄지 않았고 너무나 무섭고 손자가 걱정돼 여러 차례 불렀다"고 적었습니다.
다른 차들과 부딪히지 않으려고 반대편 차선으로 운전까지 했지만, 사고를 막을 수 없었다고도 했습니다.
■올해 설에 아들에게 무릎 꿇고 사죄한 엄마
도현이 할머니와 도현이 아빠는 5분 거리에 살지만 사고 뒤 자주 만나지 못합니다.
만나면 서로 눈물만 나와 전화로 가끔 안부만 묻는다는 겁니다.
도현이 아빠는 아들을 잃고 처음 맞이한 올해 설에 어머니를 찾아갔다가 도망치듯 나왔다고 했습니다.
도현 아빠가 말한 이야기를 그대로 옮깁니다.
"도현이가 없는 상태에서 처음 맞는 명절을 보내야 하는데 사실 너무 두려웠어요.
어머니를 만나러 가기까지 정말 아내와 많은 얘기를 하고, 가서 울지 않고 정말 인사만이라도 드리고 오자고 했는데, 우리 도현이 잘 있으니까 하늘에서 잘 있으니까 앞으로 남은 싸움들도 해야 하고 잘 이겨내 보자 하는 마음으로 어머니께 인사를 드리러 갔는데 문턱을 넘어서는 순간 저희는 울면서 도망쳐 나올 수밖에 없었어요."
"왜냐하면, 어머니가 제가 들어가고 아내가 뒤따라 들어왔는데, 어머니가 갑자기 오셔가지고 무릎을 꿇고 미안하다고 사죄한다고 미안하다 울며불며 어머니가 그렇게 하는데 어머니 잘못이 아닌데 어머니를 그동안 탓하고 미워했던 적도 한 번도 없는데, 왜 우리를 죄인처럼 만드는지…."
"물론 어머니도 충분히 미안한 감정들 수 있고 그렇지만 정말 우리도 굳은 마음 먹고 갔는데 어머니가 무릎 꿇고 비는 모습을 보는 순간 그냥 도망쳐 나왔어요. 도망쳐 나와서 갈 데는 없고 바닷가로 가서 바닷가에서 (아내와) 둘이서 정말 하염없이 울었던 것 같아요."
"왜, 도대체 평소에 어떤 잘못을 이렇게 많이 했기에… 우리 가정에 도현이는 저의 삶에서 가장 큰 기쁨이었고, 도현이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순간이 저희한테 기쁨이었는데, 지금은 부를 때마다 슬픔으로 바뀌었잖아요. 어머니는 어머니대로 또 고통 속에 살아가고 계시고…."
■전문가들 "급발진 특징 모두 들어간 사고" vs 국과수 "차량 결함 없어"
한순간에 도현이 가족을 풍비박산 낸 사고에 대해 전문가들은 급발진의 전형적인 특징이 다 들어가 있는 사고라고 입을 모읍니다.
급발진 연구회 회장인 김필수 대림대학교 미래자동차학부 교수는 "이 사건 같은 경우에는 수백 건의 사고 중에서도 급발진일 가능성이 굉장히 큰 사고"라고 평가했습니다.
급발진사고에서 나오는 각종 특징이 한꺼번에 포함돼 있다는 겁니다.
김 교수는 "급가속이 될 때 엔진의 굉음이 들린다든지, 배출가스 자체가 하얗게 뿜어지면서 불완전연소가 되고 있다는 점, 또 운전자 얘기지만 브레이크가 딱딱해서 전혀 듣지 않았다는 이러한 세 가지 특징만 보더라도 급발진의 가능성 어느 때보다도 높은 사건"이라고 말했습니다.
또 사고 시간이 상당히 길었는데, 이렇게 길수록 운전자가 실수할 가능성이 작아진다는 점과 실제로 운전자가 뭔가를 하려다 '이게 안 된다'는 음성까지 녹음돼 있다는 점도 급발진 사고 가능성을 높여주는 정황이라고 지적했습니다.
교통사고 전문 변호사이자 유튜버이기도 한 한문철 변호사도 "60대 할머니가 600m 이상 달리는 동안 계속 가속페달을 밟았다는 점, 운전 중 다급하게 손자 이름을 부르거나 '이게 안 돼'라는 말을 했다는 점 등을 보면 급발진이 의심된다"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경찰 의뢰로 사고 차량을 점검한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은 차량에서 결함을 발견할 수 없었다고 경찰에 통보했습니다.
사고 직전 차량 기록(EDR) 등을 보면 브레이크를 밟지 않고, 가속페달을 밟은 것으로 나오고, 브레이크에도 문제가 없어 차량 결함이 확인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제조사 상대 소송 제기..."왜 떠났는지는 알아야 할 거 아니에요"
도현이 아빠는 차량 제조사에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했습니다.
재판 과정에서 제조사와 다투면서 차량에 결함이 있었다는 걸 입증하기 위해서입니다.
현행 제조물 책임법상 차량 결함은 소비자가 입증해야 합니다.
하지만 일반 소비자가 고도의 기술력이 집약된 전자장치인 자동차의 결함을 입증하는 게 쉬울리 없습니다.
2010년부터 교통안전공단이 운영해온 '자동차리콜센터'를 통해 접수된 766건의 급발진 의심 사고 중 차량 결함이 인정된 사고는 단 한 건도 없었습니다.
이 때문에 손해배상 소송조차 도현이 아빠에겐 쉽지 않은 선택이었습니다.
"왜 언제 끝날지 모르는 또 엄청난 비용이 들어가는 이 길고 지루한 싸움을 시작했냐면, 왜 너무나도 평온했던 일상을 보내고 있었던 우리 도현이가 왜 이렇게 하늘나라에 갈 수밖에 없었던 건지 사고 원인 규명을 해야 할 거 아니에요? 아버지로서 아들이 왜 왜 갑자기 이렇게 우리 곁을 떠나게 됐는지는 알아야 할 거 아니에요."
도현이 할머니 최 씨는 도현이를 숨지게 한 혐의(과실치사)로 경찰에 입건돼 있습니다.
도현이 아빠는 엄마의 무혐의 입증을 위해서도 민사 재판에서 차량 결함을 확인해야 합니다.
오늘(23일)은 이 민사재판의 첫 변론기일이었습니다.
도현이 아빠는 첫 재판에 출석해 시민 1만 7천여 명이 보내온 연명부와 탄원서를 제출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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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재우 기자 (jjw@k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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