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파일] "겨울에 이사할 집, 여름에 찾아요"..전세도 '입도선매'?
서울 잠실의 한 부동산 중개업자가 전셋값 고공행진 뉴스 좀 이제 그만 하란다.
"뉴스에서 자꾸 '미친전세, 미친전세'하니까. 집주인들은 전세보증금 올려받겠다고 난리고, 전셋집 구하는 사람들은 물건 나왔냐고 하루에도 수십통씩 전화를 해와 피곤하다"고 한다.
이런 현상이 꼭 뉴스 보도 때문만은 아니지만 괜히 미안해졌다.
매물이 없어 거래는 안 되고, 수수료도 못 챙기고 있는데 전화만 많이 받아서 짜증난다는 푸념을 듣자니 또 한 번 미안해졌다.
날씨도 더운데…. 그래도 공인중개사들 사정은 집 구하는 세입자보단 나아보였다.
다급한 마음에 집도 안 보고 계약금부터 덜컥 내놓는 세입자들을 보는 건 이제 흔한 일이다. 특히 잠실 지역은 신축 아파트이기 때문에 아파트의 품질이 균일하다. 오래된 아파트처럼 수도시설이나 보일러, 바닥 등의 파손을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거다.
그러니 집을 볼 필요도 없이 이사 날짜만 제대로 받을 수 있으면 부동산에서 알아서 계약해 달라는 거다.
가을에 결혼날짜를 받아놓은 신혼부부들은 계약금에 선금을 더 얹어주고라도 전세매물만 나오기를 기다린다. 한발 더 나아가 내년 1,2월에 살 집을 이 무더운 여름에 찾아다니는 사람들도 있었다.
벼가 익기도 전에 미리 사두는 '입도선매'가 따로 없다.
초중고교가 밀집한 지역에서는 이런 현상이 더욱 심했다. 내년 새학기를 앞두고 아이들 학교 근처로 이사하고 싶은데, 전세 대란이라니 미리미리 준비하자는 거다.학부모들 마음도 집 못구한 신혼부부들 만큼이나 초조해보였다.
부동산 전문가들은 이게 다 부동산 매매 실종 현상 때문이라고 한다.
집값이 더이상 오르지 않으니 사려는 사람도 없고, 전세만 찾는다는 얘기다.
수요와 공급의 완전 불일치. 당연히 가격이 오를 수밖에 없다.
정부가 이런 상황을 해결하겠다고 연일 대책을 내놓는데 해결의 실마리는 보이지 않고 입도선매 같은 '특이현상'만 심화되고 있다.
사실 전세보증금 6억, 8억, 10억 원짜리 집에 사는 돈 많은 사람들이야 어차피 금리도 낮은 판국에 비싼 전셋집에 사는 건 큰 부담이 아니다.
게다가 이 사람들은 언제든지 집값 상승이 기대되면 매매로 수요를 돌릴 사람들이다. 문제는 전세보증금 3억 원 이하의 집에서 살다가 훌쩍 뛰어버린 보증금 때문에 살던 곳에서 멀리멀리 이사가는 사람들이다.
전셋값 걱정에 결혼을 망설이는 예비 부부와 전학까지 고려해야하는 아이들에게 미안한 학부모들이다.
'목돈 안 드는 전세' 상품 처럼 전세자금 지원에 초점을 맞출 것이 아니라 전세매물 자체의 공급을 늘리는 대책이 필요한 이유다.
자금 지원에 초점을 맞추는 정책은 어차피 전셋값 상승과 맞물려 전세보증금 인상만 부채질할 우려가 있다.
공급을 늘리기 위해 꼭 아파트가 아니어도 양질의 다세대주택이나 다가구주택을 공공공급 형태의 전세로 제공하는 것도 한 방법일 수 있다. 또 월세 위주의 공공임대주택을 전세 상품으로 전환하는 것도 고려할 수 있다.
지금은 더 싼 전세를 조금이라도 늘리는 것이 가장 중요하기 때문이다.한상우 기자 cacao@s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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