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징어 게임'이 불질렀다…미국 작가 16년 만의 파업 [이태환의 세상만사 경제학]

2024. 10. 12. 0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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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환의 세상만사 경제학] 콘텐트 무역과 요소가격 균등화
2024년 부산국제영화제의 개막작은 넷플릭스의 ‘전, 란’이었다. ‘충무로’로 통칭하던 전통적인 영화제작사가 아닌 다국적 스트리밍 플랫폼 회사의 작품이 개막작으로 채택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한국 영화산업도 넷플릭스 등 OTT에 점령당하는 것이 아니냐는 우려와 함께, 다국적 기업의 막강한 자금동원력이 한국 영화계에 새로운 바람을 일으키고 콘텐트 수준을 한 단계 높일 수 있다는 긍정적인 분석도 나온다.

작년 파업에 돌입한 미국작가조합 회원들이 캘리포니아 할리우드 넷플릭스 앞에서 행진하고 있다. [AFP=연합뉴스]
넷플릭스는 지난 몇 년 간 한국 외에도 전세계 영화나 TV드라마 등 콘텐트 산업 전반에 걸쳐 엄청난 변화를 이끌어 왔다. 그리고 1997년 넷플릭스가 설립된 미국 캘리포니아에서는 이러한 변화 중 부정적인 영향들이 최근에 더 강조되는 분위기다. 2023년 5월, 미국작가조합은 할리우드에서 16년 만에 전면적인 파업을 벌였다. 넷플릭스 등 온라인 동영상 서비스가 콘텐트 시장을 장악하면서 작가들에 대한 급여, 일하는 방식, 고용 기간 등이 모두 악화되고 있다는 것. “우리들을 우버 기사 취급하지 말아라”라는 것이 이들의 슬로건이었다. 당시 나온 보도에 따르면 지난 10년 간 미국 TV 작가 및 프로듀서의 주당 임금 중간값은 23%나 떨어졌다고 한다. 작가조합의 관점에서는 전통적인 영화제작사나 지상파 방송사와는 매우 다른 넷플릭스의 제작 관행이 주된 비난의 대상이었다. 우버 기사처럼 필요할 때만 불러모아 프로젝트를 진행시키고 일 끝나면 다시 돌려보내는 계약방식이 작가들의 근로 환경을 불안정하게 만들고 협상력을 약화시킨다는 논리다. 이것도 맞는 말이지만, 사실 미국 콘텐트 작가들의 처우가 열악해진 더 큰 원인은 따로 있었다. 콘텐트 무역의 확대와 이에 따른 국제적 경쟁 심화 때문이다. 한마디로, ‘오징어 게임’ 때문에 미국 작가들이 파업에 이르렀다고 할 수 있다.
미국 TV 작가·PD 임금 10년새 23% 급락
전 세계적으로 화제를 모은 넷플릭스 드라마 ‘오징어 게임’. [사진 넷플릭스]
‘오징어 게임’을 비롯한 K-콘텐트의 약진이 왜 미국 작가들의 처우를 악화시켰는지 따져보기 위해서는 국제무역에 관한 경제이론들을 좀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일단 리카도의 비교우위론. 고전 경제학의 대표적 이론들 중 하나다. 국제무역이 왜 발생하느냐. 두 나라가 있을 때 어느 한쪽이 다른 쪽보다 상대적으로 더 잘 만드는 상품이 있을 것이고, 각각 자기가 상대적으로 더 잘 만드는 것을 생산해서 서로 수출하면 둘 다 이익을 본다는 내용이다. “비교우위가 있는 곳에 특화한다”는 결론은 대부분의 독자들이 접해보셨으리라 믿는다.

리카도 이후 학자들은 이런 비교우위 자체가 왜 발생하는가에 관심을 가졌는데, 헥셔와 올린은 나라들 사이에 생산요소의 부존량이 다르다는 데 주목했다. 프랑스 남부 지역은 포도나무를 기르기에 좋은 넓은 토지가 있고, 따라서 와인 생산에 비교우위가 생긴다. 아르헨티나나 오스트레일리아는 초지가 아주 넓어서 목장이 많고, 싸고 맛있는 소고기를 많이 수출한다. 영국에서 산업혁명이 가장 먼저 시작된 중요한 이유 중 하나는 석탄 매장량이 많아서 증기기관을 돌릴 연료를 값싸게 구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나라마다 어떤 생산요소가 풍부한가에 따라 좀 더 적은 비용으로 생산할 수 있는 상품이 달라지고, 이것이 비교우위 발생의 원인이 된다는 것이 헥셔-올린 이론이다. 핵심은 “나라마다 상대적으로 싼 생산요소가 있다” 정도로 정리할 수 있겠다. 예나 지금이나, 무엇인가를 값싸게 만들 수 있다는 것은 경쟁력의 원천이다.

그러면 이렇게 만들어진 비교우위는 영원할까? 물론 미국이나 러시아만큼 땅덩이가 크다면 한동안은 다른 나라가 토지라는 생산요소에서 우위를 갖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노동이나 자본같은 생산요소 시장에서는 무역이 계속 진행되면 비교우위가 점점 사라지는 방향으로 요소가격이 조정된다는 것도, 여러 경제학자들이 밝혀낸 사실이다. 즉, 영원한 비교우위란 존재하기 어렵다는 얘기다. 가장 간단히 생각해볼 수 있는 것은 생산요소 자체가 이동하는 경우다. 국가 A가 있는데, 이웃 나라 B에서는 노동력이 부족해서 임금이 상대적으로 높고, 그래서 인건비 때문에 노동집약적 상품에는 비교우위가 없다. 어떻게 될까? A국 사람들이 B국으로 일자리를 구하러 이민을 가면서 B국의 임금이 낮아질 것이다. 요즘 필리핀 가사도우미가 이슈가 되고 있는데, 그 아이디어의 출발점도 한국과 필리핀 사이의 엄청난 임금 격차다. 하지만 생산요소가 국경 너머로 이동하지 못하는 경우에도, 무역만으로도 생산요소 가격의 격차는 줄어들 수 있다. 이것이 바로 국제무역에 의한 ‘요소가격 균등화’ 현상이다. 이것을 밝혀낸 대표적 경제학자들 이름을 따서 스톨퍼-새뮤엘슨 정리라고도 한다.

두 나라가 각각 비교우위가 있는 상품에 특화하는 방식으로 교역을 하게 되면, 각자 수출하는 상품을 그 전보다 더 많이 만들게 된다. A국에서 인건비가 싸서 노동집약적인 섬유산업에 비교우위가 있다면, 그래서 옷을 만들어서 계속 수출을 한다면, 국내수요만 충족시킬 때보다는 훨씬 많이 만들어야 할 것이다. 생산량이 늘어나면 노동수요가 늘어나고, 이 과정에서 인건비가 올라갈 수밖에 없다. 옷 생산에 비교우위가 없던 수입국 B에서는 반대되는 현상이 일어난다. 외국에서 옷을 수입하면 국내에서 만들어진 옷에 대한 수요는 예전보다 줄어든다. 수요가 줄고 생산량이 줄면 고용도 같이 줄어들고, 임금이 낮아지게 된다. 애초에 인건비가 낮아서 비교우위가 있던 나라에서는 인건비가 오르고, 인건비가 비싸서 비교우위가 없던 나라에서는 인건비가 낮아지는 것이다. 이렇게 국제무역은 서로 다른 나라 사이에서 임금 차이를 줄여주는 역할을 한다. 자본에 대한 이자나 임대료 등 다른 생산비용에 대해서도 똑같은 논리를 적용할 수 있다.

필리핀 가사도우미도 임금 격차가 출발점
넷플릭스 영화 ‘전, 란’. 올해 부산국제영화제 개막작으로 선정돼 화제를 모았다. [사진 넷플릭스]
한국 등 아시아권 콘텐트의 미국 수출이 매우 어렵던 시절, 미국의 방송작가는 기본적으로 한국보다 높은 임금을 받고, 그 외 다른 처우도 훨씬 좋았다. TV 드라마를 예로 들어보면, NBC, ABC같은 주요 채널에서 방영하는 드라마는 보통 한 시즌에 스무 편 정도가 제작되었고, 이걸 1주일에 한 편씩 공개했다. 작가들은 제작사가 따로 마련해준 공동작업실에 정기적으로 모여서 일을 했다. 드라마 한 시즌 참여하면 1년 가까이 돈 받으면서 출근할 곳이 생겼다는 얘기다. (‘쪽대본’과 밤샘작업, 열정페이 등으로 상징되던 한국의 드라마 제작 현실을 돌이켜 보자!) 그런데 넷플릭스 드라마는 보통 한 시즌에 여덟 편, 길어야 열 편쯤 되고, 이걸 다 찍은 다음 한꺼번에 공개해 버린다. 고용기간이 몇 달 정도로 짧아지는 것이다. 프로젝트마다 단기계약을 맺다 보니 공동작업실도 안 주고 임시회의실 정도만 제공을 한다. 열악해진 작업환경. 미국 작가들은 넷플릭스를 비난한다. 하지만 ‘오징어 게임’처럼 상대적으로 값싼 콘텐트, 즉 한국 작가들이 훨씬 열악한 환경에서 상대적으로 낮은 임금을 받으면서 집필한 작품들이 OTT 플랫폼을 타고 미국으로 수출되면서, 요소가격 균등화가 일어나고 있는 것이 근본 원인이다. 콘텐트 시장이 분리되어 있을 때 높은 임금과 좋은 작업환경을 누리던 미국 작가들이 시장 개방과 함께 임금 하락 압력에 노출되는 것. 이는 중국산 제품의 수입을 막으라고 파업하는 러스트벨트의 제조업 노동자와 다를 바 없는 상황이다.

한국과 미국 사이에서 작가들, 배우들, 스태프들의 임금이나 작업환경의 격차는 콘텐트 교역이 증가하면서 앞으로도 계속 줄어들 것이 예상된다. 영화 ‘전, 란’은 10월 11일에 한국과 미국에서 동시에 서비스가 시작된다. 올해 상반기에는 ‘오징어 게임’ 시즌 2 주연배우의 회당 출연료가 급격히 높아진 것이 화제가 되기도 했다. 스톨퍼-새뮤엘슨 정리는 지금도 우리 눈앞에서 끊임없이 작동 중이다.

이태환 세종대 경제학과 교수. 서울대와 스탠포드대에서 공부하고 삼성경제연구소에서 한국경제의 다양한 측면을 연구했다. 주변의 사회문화 현상을 경제학으로 해석하고 이야기 나누는 것을 좋아한다. SERICEO에서 5년 간 ‘세상만사 경제학’ 강의를 맡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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