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저임금 상승→처우 양극화→중소·중견 기피 심화→근로활동 포기 ‘악순환’
최근 국내 주요 기업들이 ‘조직슬림화’에 방점을 둔 긴축경영에 돌입하면서 취업 활동을 일시적으로 포기하는 취업준비생(이하 취준생)들이 늘고 있다. 특히 이들 중에는 소위 명문대라 불리는 상위권 대학 졸업생들이 유독 많은 편이었다. 명문대 출신 취준생 중 상당수가 오로지 대기업 취업만을 목표로 삼은 채 기약 없는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물론 눈을 낮춰 중소·중견기업 취업에 도전하면 얼마든지 취업에 성공할 수 있지만 그들 역시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해를 거듭할수록 벌어지는 대기업과 중견·중소기업 간의 처우 격차 때문이었다. 신임사원 처우 격차가 심각하다 보니 어떻게든 대기업에서 사회생활을 시작해야 결혼·출산까지 계획할 수 있다는 인식을 가진 이들이 상당수 존재했다.
중견·중소 합격이 반갑지 않은 명문대 졸업생들 “잠깐 쉬더라도 대기업만 계속 도전”
채용플랫폼 잡플래닛이 고용보험 등으로부터 수집한 약 127만건의 연봉 데이터를 분석한 자료에 따르면 2024년 기업 규모 기준 평균 연봉 인상률은 대기업 9.0%, 중견기업 5.7%, 중소기업 3.7% 등이었다. 지난 2023년 대기업 2.8%, 중견·중소기업 3.0% 등과는 확연히 다른 결과다. ‘기업 규모가 작을수록 성장의 기회가 많고 가능성도 높다’는 공식이 깨진 것이다.
대기업과 중견·중소기업 간의 신입사원 연봉 격차 또한 커지고 있다. 지난달 한국경영자총협회가 2023년 고용노동부 고용형태별 근로실태 조사 자료를 분석한 결과에 따르면 사업체 규모별(초과급여 제외) 300인 이상 사업체 대졸 정규직 초임은 평균 5001만원이었다. 직원수 30~299명 규모 사업체(3238만원), 5인 미만 업체(2731만원) 등에 비해 압도적으로 높은 수준이었다.
초임 연봉부터 연봉 인상률까지 전부 대기업에 비해 중견·중소기업이 크게 뒤처지면서 취준생의 대기업 선호 현상은 갈수록 심화되고 있다. 특히 고학력·고스펙 일수록 대기업 선호 기조가 뚜렷한 편이다. 심지어 중견·중소기업 취업에 성공하고도 입사를 포기하고 잠시 휴식기를 가지며 대기업 취업에 다시 도전하는 이들도 적지 않다.
이화여대를 졸업한 정민지 씨(26·여)는 “지난해 상·하반기 공채에 연속으로 탈락하면서 몸도 마음도 지쳐 지금은 모든 취업 준비 활동을 멈춘 상태다”며 “취업 준비 기간이 길어지면서 불안한 마음에 중소기업 2곳과 중견기업 1곳에 원서를 넣어 합격했지만 막상 입사를 하려고 하니 오히려 더 불안한 마음이 생겨 모두 입사를 포기했다”고 말했다. 이어 “대기업과 중견·중소기업 간에 신입 연봉 차이가 큰데다 나름의 장점인 연봉 인상률까지 대기업이 앞서다 보니 도저히 취업할 마음이 생기지 않았다”고 토로했다.
연세대학교를 졸업한 이영미 씨(28·여·가명)는 “집에서는 많아지는 나이에 적당한 곳을 알아보고 취업을 하는 것이 어떻겠냐고 말씀하시기도 하지만 대기업과 중견·중소기업의 처우 차이를 보면 도저히 눈을 낮출 수가 없다”며 “시간이 좀 더 걸려도 무조건 대기업에 입사하는 게 유리하다는 판단으로 힘든 취업 준비 기간을 버티고 있다”고 설명했다.
성균관대를 졸업한 김수형 씨(30·남·가명)는 “중어중문학과를 졸업한 뒤 대기업 인사 직무에 취업을 희망해 약 1년 반 동안 20곳이 넘는 대기업 계열사에 지원했지만 모두 탈락했다”며 “지금은 심리 상태가 안 좋아져 잠시 취업 준비를 쉬고 있는데 주변에 대기업에 입사자들이 하는 말이 전부 ‘시작이 중요하다’는 말 뿐이라 눈을 낮추고 싶지는 않다”고 성토했다.
전문가들 사이에선 대기업과 중견·중소기업의 처우 양극화 현상이 앞으로 더욱 심화될 가능성이 크다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중견·중소기업 상당수가 장기 불황에 대비해 연봉 상승률을 낮추고 신규 투자를 줄이는 등 지난해보다 보수적인 기조를 펼칠 것이라는 이유에서다. 더욱이 최근 몇 년간 최저시급이 가파르게 오르면서 물가상승 압박이 커져 대기업에 비해 상대적으로 자본력이 약한 중견·중소기업의 처우는 쉽게 개선되기 어려울 것이라는 분석도 적지 않다.
김대종 세종대 경영학과 교수는 “처우는 취업준비생들이 직장을 선택할 때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기준 중 하나다”며 “일부 대기업의 신입 초봉이 중소기업보다 2배 가량 높은 곳도 있기 때문에 대기업에 대한 선호도가 커질 수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이어 “국내 기업 대부분이 중견·중소기업이기 때문에 임금 격차가 과도하게 벌어지게 되면 실제 근로자의 업무적 역량에 비해 취준생들의 눈높이만 대폭 높아져 종국엔 청년 근로자수가 줄어드는 악순환에 빠질 수 있다”고 우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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