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보영의 정상에서 쓴 편지] 24. 제왕산~능경봉~골폭산 : 부디 포기하지 않고 나아가기를
해발 1232m 골폭산 강릉·평창 사이 위치
일제 잔재 ‘고루포기’ 대신 ‘골폭’ 명칭 사용
싱그런 연둣빛 녹음 펼쳐진 4월 산 등반
제왕산 출발 코스 상제민골 거슬러 이동
근엄한 고사목·기암괴석·풍광 만끽
3.5㎞ 산길 걷다 보면 마주하는 능경봉
끊임없는 오르막 지나 골폭산 정상 도착
어떤 대상에 열렬히 사로잡혔을 때 이따금 헷갈립니다. 정말 그 대상에 빠진 것인지, 아니면 그 대상에 빠진 자기 자신의 모습에 빠진 것인지. 순전한 사랑은 어떤 형태를 하고 있을까요? 물아일체라고 하지요. 그 대상에 대한 사랑이 너무 뜨거워서 자기 자신마저 녹아 사라진 모습일까요? 아니면 대상과 나를 끊임없이 분리하고 거리 두며 객관화하는 상태를 말하는 걸까요? 그렇다면 자기 자신을 잃지 않고 적당한 선에서 관망하는 상태를 순전한 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는 걸까요?
산을 생각하는 마음은 언제나 이렇게 복잡합니다. 너무 좋은데 어떨 때는 산을 몰랐다면 인생이 좀 평온하게 흐르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요. 젊어서 오르기 시작해 내 안의 용기와 열정을 확인할 수 있었던 산은 저에게 아직은 안식과 휴식의 공간이라기보다 도전과 극복의 공간입니다. 그 안에는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주체화하는 동시에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타자화하고, 끊임없이 자기 자신에 대해 확신하는 동시에 끊임없이 자기 자신에 대해 불신하는 시간이 순서도 없이 뒤섞여 흐릅니다.
매해 이맘때면 움트는 봄기운 속에서 저는 평창의 하늘과 강릉의 바다를 생각합니다. 5월 중순이면 이곳 일대에서 50㎞와 100㎞ 국제 트레일러닝 대회가 열리기 때문입니다. 어느덧 10년을 맞이한 이 대회에 1회부터 출전했으니 달려온 청춘의 시절을 기억하는 장소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대관령과 선자령 등 바람이 불어오는 언덕에서 나 역시 바람이 되어 달리는 길. 평창과 강릉의 크고 작은 산, 이름 설은 산을 알게 된 것도 이 때문입니다.
흔히 고루포기산이라고 알려진 골폭산은 평창군 대관령면과 강릉시 왕산면 사이에 있는 산입니다. 해발 1232m의 높은 산으로, 산행 도중 횡계리 쪽으로 하산하면 평창의 명소인 라마다호텔&리조트와 연결되지요. 고루포기산이라는 이름은 왕산면 고루포기 마을에서 유래합니다. 하지만 고루포기산의 본래 이름은 골폭산입니다. ‘신산경표’에 따르면 고루포기(コルポキ)란 일제강점기 당시 골폭산의 가타카나 발음이기 때문입니다. 골폭산은 국토지리정보원에서도 인정한 이름이므로 앞으로는 고루포기산이 아닌 골폭산으로 불러야겠습니다.
골폭산은 앞서 소개한 대로 횡계리 쪽에서 오를 수도, 안반데기 쪽에서 오를 수도, 인근의 제왕산(840m)과 능경봉(1123m)과 연계해 오를 수도 있습니다. 제왕산과 능경봉과 골폭산으로 이어지는 천고지 능선은 백두대간에 속하는데 그중 대관령을 사이에 두고 북쪽에 솟은 고봉 제왕산은 고려 말 우왕이 성을 쌓고 피난한 곳이며, 남쪽에 솟은 고봉 능경봉은 산정의 영천(靈泉)에서 기우제를 지낸 곳이라고 합니다. 맑은 날에는 울릉도도 보인다고 하니 그 모습이 부쩍 궁금합니다.
오전 9시, 제왕산에 오르기 위해 들머리인 국립대관령치유의숲으로 향합니다. 과거에는 비포장길이었던 곳이 아스팔트 도로로 깔끔하게 둔갑했습니다. 4월의 산은 연둣빛 녹음으로 싱그럽습니다. 더 일러서도 더 늦어서도 볼 수 없는, 오직 이 계절에만 감상할 수 있는 자연의 오묘한 빛깔입니다. 등산로 입구에 식당과 카페, 펜션 같은 편의시설이 있으나 다소 이른 시간인 까닭에 문은 닫혀 있습니다. 출발 전 따뜻한 모닝커피 한 잔이 간절했으나 아쉬움을 접고 산으로 들어섭니다.
출발지에서 제왕산까지는 약 4㎞. 상제민골을 거슬러 제왕산 정상으로 이어지는 산길은 비교적 완만합니다. 노란 모자를 쓰고 앞서 걸어가던 등산객이 있었는데 걸음이 잰지 어느 틈엔가 사라지고 보이지 않습니다. 설마 바람에 나부끼는 산개나리를 잘못 본 것일까. 평일 아침이라 사람 그림자 하나 없습니다. 그 빈 길을, 어디선가 날아든 새 한 마리가 청아한 음색으로 채웁니다. 그리고 그 배경은 바람과 햇살과 나무가 저마다의 음영으로 채웁니다.
‘임금 제(帝) 자’와 ‘왕 왕(王) 자’를 쓰는 제왕산은 과연 높은 분의 위상을 떠올리게 합니다. 세월을 짐작조차 할 수 없는 고사목과 기암괴석이 이 산의 근엄을 더하고, 정상에서 바라본 풍광은 절로 이 길이 우리나라의 백두대간임을 가슴으로 인정하게 합니다.
너무 높아서 구름도 넘지 못한다는 대관령의 첩첩한 골짜기에 갇힌 지금 심정이 어딘지 망연하기도 하지만 갈 길이 멉니다. 제왕산에서 능경봉까지 3.5㎞의 산길을 서둘러 이동합니다. 오후에는 비 소식이 있습니다. 저 멀리 어둠이 무리지어 몰려옵니다.
능경봉을 거쳐 골폭산까지는 끊임없는 오르막길입니다. 넘어온 줄도 모르게 여기부터는 평창입니다. 어쩐지 산의 분위기도 미묘하게 달라진 것 같습니다. 천고지 산답게 골폭산 곳곳에는 아직도 흰 눈이 쌓여 있습니다. 며칠 전 경기 북부의 산에 핀 진달래 위로 흰 눈이 쌓인 기묘한 사진을 본 적이 있는데 정말이지 종잡을 수 없이 변하는 기상 앞에서 웃어야 하는지 울어야 하는지 알 수 없습니다. 그래도 내심 반가운 마음으로 모처럼 흰 눈을 밟아 이윽고 골폭산 정상에 도착합니다.
다가오는 5월이면 저는 아마도 이 산 어딘가를 달리고 있을 것입니다. 한때 고루포기산에 대해 들었을 때 ‘포기’라는 단어가 뇌리에 박혔고, 산세가 워낙 험하고 거칠어 ‘오르는 사람들이 지레 고루 포기하게 되는 산인가?’ 하는 엉뚱한 상상을 한 적이 있습니다.
숫제 함부로 포기하지 않고 이 산을 넘을 수 있기를 잠시 바랐습니다. 산정에 서서, 이국의 고원처럼 아름다운 안반데기마을의 고랭지 배추밭 전경을 바라봅니다. 마치 치열한 도전 끝에 찾아오는 깊은 평화 같습니다. 작가·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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