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이 '험한 것'을 깨웠다

이송희일 영화감독 2025. 4. 23. 15: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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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송희일의 견문발검] 극우가 걱정이라면 차별금지법을

[미디어오늘 이송희일 영화감독]

▲ 4월19일 자유통일당이 서울 종로구 동화면세점 인근에서 개최한 '국민저항권 광화문국민대회'에서 참가자들이 손팻말을 들고 구호를 외치고 있다. ⓒ연합뉴스

확실히 윤석열이 '험한 것'을 깨웠다. 계엄도 계엄이지만, 서부지법 폭동에서부터 극우 난동에 이르기까지 내란 소동으로 저 깊은 지층에 잠들어 있던 괴물들이 마침내 눈을 떴다.

헌법재판소의 탄핵 인용에도 불구하고, 부정선거 음모론과 중국 혐오가 파죽지세다. 극우 정치인과 기독교 우익이 불을 지르듯 중국 혐오를 방화하고 있다. 그 결과, 지난 서울 구로구청장 보궐선거에서 자유통일당 이강산 후보가 32%라는 놀라운 지지율을 기록했다. 극우 후보의 전례없는 약진, 상당히 불길한 징조다.

하지만 그보다 더 충격적인 사건이 일어났다. 4월19일, 윤석열 어게인을 외치는 극우 청년들이 서울과 부산 도심을 행진하며 “짱개는 꺼져라” 등 혐오의 악취를 쏟아냈다. 특히 중국 유학생 거리에서 공포를 조성하고 폭력을 유발하는 과정에서 한 중국인이 병원에 실려가고 말았다.

단언컨대, 스스로를 '자유대학'이라 부르는 저 극우 청년들은 이슬람을 쫓아내자며 횃불을 들고 행진하는 북유럽 신나치들과 판박이다. 공포를 조장하며 이슬람 사원을 공격하는 서유럽 극우들을 빼닮았다. 심지어 유대인 거리를 습격했던 히틀러 유겐트와 흡사하다. 차이가 있다면 나치 자경단이 갈색 셔츠를 입은 반면에, 우리 극우 청년들은 과잠을 입었다는 점이다.

1920년대 유럽의 역사적 파시즘이든, 지금 전 세계에 번지는 '극우의 팬데믹'이든, 길거리의 공공연한 혐오가 사태의 발화점이라는 데에는 차이가 없다. 혐오의 언어는 물리적 폭력의 선제적 정당화다. 홀로코스트는 유대인 상점에 붙인 나치의 혐오 스티커에서 시작됐다는 걸 잊지 말아야 한다.

▲ 파울 요제프 괴벨스 (Paul Joseph Goebbels). 사진=나무위키

“민주주의에 대한 최고의 농담은 항상 이런 거다. 그것은 바로 민주주의가 자신을 파괴하는 수단을 그 불구대천의 원수들에게 주었다는 것이다.”

나치 선전부장 요제프 괴벨스의 말이다. 나치가 합법적으로 의회를 장악할 수 있었던 대의제의 취약성을 비웃고, '표현의 자유'를 무한하게 허가함으로써 소수자 박해 수단을 제공하는 것에 대한 조롱을 담고 있다.

근대 민주주의가 발흥하면서 등장한 '표현의 자유'는 공론장과 시민권 확장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하지만 오늘날 표현의 자유라는 담론장은 극우의 배양지가 되고 있다. 성소수자, 장애인, 이주노동자, 중국인 등 온갖 혐오들이 표현의 자유라는 타락한 알리바이 속에서 무한히 증식되고 있는 것이다.

표현의 자유는 공공선과 시민권 확장에 기반해야 한다. 타인을 배제하고 시민권을 축소하는 것이라면 당연히 제지되어야 한다. 민주주의와 혐오의 자유는 결코 양립할 수 없다. 혐오의 방치가 곧 민주주의에 대한 위협이다.

그런데 저렇게 거리에서 혐오를 쏟아내며 내일의 유겐트를 자처하는 극우 청년들을 과연 법적으로 제재할 수 있을까? 또 혐오의 공장이나 다름없는 유튜브를 민주적으로 통제할 수 있을까? 현재 법으로는 불가능하다.

하지만 딱 하나 가능한 게 있다. 차별금지법. 거대 양당이 끊임없이 좌초시킨 그 차별금지법 말이다. 조기대선을 앞둔 지금에도 민주당 후보들이 여전히 '나중에'와 '사회적 합의'를 외치며 미루려고 하는 그 차별금지법 말이다. 혐오와 차별을 방치하면 사회의 우경화가 심화되고 민주주의가 침식된다는 숱한 경고와 절절한 호소에도 귀 닫고 눈 감은 채 모르쇠로 일관해왔던 그 차별금지법 말이다.

▲ 2022년 5월26일 차별금지법제정연대 관계자들이 서울 여의도 국회 앞에서 차별금지법 제정 요구 단식투쟁을 마무리하는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모든 해법의 열쇠는 아닐지언정 차별금지법은 민주적 공동체를 위한 최소한의 안전장치다. 기독교 보수표 못 잃는다며 그런 차별금지법을 줄곧 유예시킨 '나중에 정치'는 혐오의 면허증을 발급하는 나쁜 정치였다. 극우 세력이 혐오와 차별을 먹어치우며 증식하는 데 일조했다. 당연하게도 오늘날 한국 사회의 우경화에는 국힘뿐 아니라 민주당에도 그 책임이 명백하다.

차별금지법 하나 제정하지 못하면서 겉으로 민주주의를 걱정하는 척하는 위선을 이제 집어던질 때도 됐다. 극우 정치와 적대적 공존을 통해 계속 생명을 연장하는 게 전부라면 과연 그 정치가 민주주의와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혐오의 방화범들을 방관한 채 어떻게 극우 정치의 불길을 끄겠다는 건가.

혐오와 차별은 도미노와 같다. 어느 한 사람이 배제되는 순간, 그다음, 그다음도 차례차례 무너지고 끝내 당신 순서가 된다. 자유대학처럼, 저렇게 거리에서 사람의 비말로 형성하는 미세 파시즘을 방치하면 점점 자라나 끝내 괴물이 되는 것이다. 실제로, 한국은 이미 미세 파시즘의 번식지다. 모든 곳에 혐오의 고름이 흘러내린다.

극우가 걱정되는가? 민주주의가 걱정되는가? 그러면 먼저 차별금지법부터 제정하자. 아주 간단한 방정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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