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한강의 서촌은 어떻게 ‘문학 동네’가 됐나?

김규원 기자 2025. 4. 21. 13: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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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드 기획]15세기 안평대군부터 19세기 박효관·안민영까지… 수성동·옥류동·필운대 곳곳에 글과 그림 흐르네
한강 작가가 운영했던 서울 서촌의 ‘책방 오늘’. 김규원 선임기자

2024년 10월10일 한강 작가가 한국 최초로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됐다. 이때 유난히 떠들썩했던 동네가 하나 있었다. 서울 종로구 서촌이었다. 서촌은 그 발표 때까지 한강 작가와 아무 관련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의 수상이 알려지자 서촌 통의동의 ‘책방 오늘’과 서촌 누하동의 한 집에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책방 오늘’은 한 작가와 아들이 운영하던 곳이었고, 누하동 집은 한 작가가 사는 곳이었다. 그가 자주 다녔다는 음식점도 알려졌고, 그가 운영했던 ‘책방 오늘’에서, 거리에서 그를 본 적이 있다는 목격담도 쏟아졌다. 서촌은 한 작가와 함께 문학 동네가 됐다. 마치 영국의 바스(Bath)가 제인 오스틴과 함께 문학 동네가 됐듯.

노벨상 수상 한강 작가 책방으로 ‘떠들썩’

그러나 서촌이 오로지 한강 작가 덕분에 갑자기 문학 동네가 된 것은 아니다. 서촌은 600년의 문학 전통을 자랑하는 동네다. 서촌을 문학 동네로 빛낸 첫 자취를 만나려면 수성동에 가야 한다. 거기에 ‘시서화 삼절’(글과 글씨, 그림에 뛰어난 사람)로 꼽히던 안평대군 이용이 살았기 때문이다. 안평은 서촌의 문학 역사를 열었고, 많은 작품과 이야기를 남겼다.

안평대군은 1442년 수성동 자신의 집 ‘비해당’에서 당대 최고의 인물들과 함께 ‘비해당 소상 팔경 시첩’이란 시집을 펴냈고, ‘비해당 사십팔영’(비해당 48편 시)이란 연작시도 지었다. 비해당은 ‘게으르지 않은 집’이란 뜻으로 아버지 세종이 ‘시경’의 ‘증민’이란 시에서 가져와 붙여준, 안평의 호이자 집 이름이었다. 비해당의 위치는 정확히 알 수 없고, 수성동 언저리로만 추정된다.

‘비해당 소상 팔경 시첩’은 중국 후난성 둥팅호(동정호) 부근 소수와 상수의 8개 아름다운 풍경을 그린 남송 영종의 시를 모방한 연작 시집이다. 당대 유명 사대부와 승려 19명이 참여했고, 고려 때 선비 2명의 시를 더해 모두 21명의 시가 실렸다. 안평은 이영서에게 쓰게 한 ‘머리글’에서 “내가 남송 영종의 팔경시를 보고 (…) 그 경치를 상상했다. 그 시를 따라 짓고 그 경치를 그리게 해서 ‘팔경 시권’이라 이름 붙였다”고 밝혔다. 애초 이 시화집은 두루마리여서 ‘팔경 시권’이었으나, 나중에 접이책으로 바뀌어 ‘팔경 시첩’으로 불린다.

‘비해당 소상 팔경 시첩’엔 김종서, 정인지 등 세종 때의 최고 사대부들뿐 아니라, 박팽년, 성삼문, 신숙주 등 안평의 절친인 젊은 사대부들의 시가 모두 실렸다. 시와 함께 당대 최고의 화가였던 안견에게 ‘소상팔경도’ 8점을 그리게 해서 시집과 함께 묶었다. 그러나 현재는 시첩만 전하고, 팔경도는 전하지 않는다.

이 가운데 박팽년의 시를 보면, “나의 삶 아득해라 하늘의 동쪽/ 옛 자취를 밟으니 연자방아 돌리는 당나귀 같다/ 소상의 뛰어난 경치 공연히 듣고서/ 땅을 줄여도 서로 통할 길이 없다”라고 썼다. 성삼문은 “하얀 달빛은 마을을 감싸고/ 흩날리는 눈발은 바위 계곡으로 들어간다/ 가장 좋은 것은 비 갠 뒤 하늘/ 달 맑은 저녁에 돌아온다”고 노래했다. 신숙주는 “시는 소리 나는 그림이요/ 그림은 소리 없는 시다/ 세상에 오직 시와 그림만/ 사물을 그리는 데 아름다움과 추함을 표현한다”고 소상팔경 시와 그림을 함께 묘사했다.

조선 초기 문학, 예술 활동을 이끌었던 안평대군 이용의 집 비해당이 있던 서울 서촌의 수성동. 김규원 선임기자

‘비해당 사십팔영’은 친구 아홉 명이 안평이 제시한 48개의 제목으로 각자 48편의 시를 지은 것이다. 아홉 명 중 성삼문, 신숙주, 최항, 서거정, 김수온의 시가 남아 있다. ‘비해당 사십팔영’에서 48번째 시의 제목은 ‘인왕산의 저녁 종’(인왕모종)이다. 성삼문은 “인왕동(수성동)에 해가 저무니/ 종소리가 때를 알린다/ 방석에 기대어 일없이 있다보니/어느새 도성에 통행금지(밤 10시) 때가 됐다”고 읊었다. 신숙주는 같은 제목의 시에서 “뜰 나무는 빽빽해서 저녁 빛이 푸른데/ 한가한 집은 고적해서 그윽한 감회가 자란다/ 종소리 갑자기 깊은 깨우침을 일으키고/ 혼자 파란 등이 밤빛을 토하는 것을 본다”고 노래했다. 인왕동은 안평의 집이 있던 수성동의 다른 이름이다.

“하늘이 아낀 곳을 훔쳤다고 웃지 마시오”

아쉽게도 ‘비해당 소상 팔경 시첩’이나 ‘비해당 사십팔영’ 가운데 안평의 시나 글은 전하지 않는다. 그의 글은 그 유명한 ‘몽유도원도’에 실려 있다. 그림은 당대 최고의 화가인 안견이 그렸고, 안평은 1447년 이 그림에 ‘도원기’를 써 붙였다.

“1447년 4월20일 밤 잠자리에 들었더니 정신이 아른거려 나는 곧 깊은 잠에 떨어지며 꿈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갑자기 나는 박팽년과 어느 산 아래 도착했다. 산봉우리는 겹겹이 있고 깊은 계곡은 그윽했다. 복숭아꽃이 핀 나무 수십 그루가 늘어선 사이로 오솔길이 있었다. (…) 그때 몇 사람이 뒤따라왔으니 바로 최항과 신숙주였다. (…) 나와 서로 좋아하는 사람이 여럿인데 어찌 두세 사람만 동행해 도원에서 놀았던가. (…) 이들 몇 사람과 사귀는 도리가 두터워 함께 여기에 이른 듯하다. 이제 안견에게 말해 그림을 그리게 했다. (…) 꿈꾼 지 사흘 만에 그림이 완성돼 비해당의 매죽헌에서 이 글을 쓴다.”

안평은 안견이 이 그림을 그린 지 3년 뒤인 1450년, 자신의 꿈과 ‘몽유도원도’에 대해 이런 시를 썼다. “세상 어느 곳에서 무릉도원을 꿈꿨나/ 도사의 모습이 더욱 눈에 선하다/ 그린 그림으로 보고 오니 정말 호사구나/ 앞으로 수천 년 동안 대대로 전할 수 있을까?” 안평은 형 수양대군의 손에 비극적으로 죽었으나, 그의 글과 안견의 그림은 600년 가까이 전해지고 있다.

1451년 안평은 현재의 부암동에서 꿈에서 본 도원과 같은 풍경을 찾은 뒤 무계정사를 지었는데, 여기서 친구들과 ‘무계 수창시’(무계동에서 주고받은 시)도 썼다. 안평의 시는 이렇다. “어느 해 밤 꿈에 봄 산을 다니다가/ 우거진 풀숲 사이의 도원을 찾아들었다/ 벼슬 버릴 마음 늘 품고 있었는데/ 오늘 풀을 베니 기쁜 얼굴이 나온다/ 땅이 외지니 즐겁고 여유가 넘치고/ 길이 막혔으니 문 두드릴 사람도 없다/ 당연히 이곳은 전생에 나의 자연이었을 테니/ 하늘이 아낀 곳을 훔쳤다고 웃지 마시오.”

수성동에 살았던 안평의 이야기는 조선 중후기 대표적 소설 ‘운영전’의 소재가 됐다. 이 소설의 다른 이름 ‘수성궁 몽유록’이나 비극적 결말은 모두 안평의 삶이 모티브가 됐음을 알려준다. 다만, 운영전에서 그려진 안평의 삶은 실제 안평의 삶과는 거리가 있다. 예를 들어 안평의 집은 비해당이었고 수성궁이라고 불린 적이 없었다. 수성궁(壽成宮)은 안평의 집이 아니라, 안평의 형인 문종의 후궁들의 거처였다.

조선 중기에 서촌을 대표하는 사대부이자 문학인인 김상헌의 집은 육상궁(오른쪽 대문) 서쪽(큰 나무 뒤쪽)에 있었다. 김규원 선임기자

양란 시기에 서촌 장의동에선 유명한 사대부 형제가 활동했는데, 바로 김상용, 김상헌 형제다. 특히 김상헌은 병자호란 때 강경파의 대표자로 조선 후기에 서인, 노론 사대부의 이념적 스승이 됐다. 김상헌은 서촌에 대한 여러 글과 시를 남겨 조선 중기 서촌을 대표하는 문학인이라고 할 만하다.

먼저 그는 서촌에 대해 연작시를 남겼다. 하나는 그가 청나라에 잡혀 있던 시절 지은 ‘근가십영’(집 근처 10편 시)이다. 자신이 살던 현재 무궁화동산 부근의 집 무속헌에서 본 주변의 10가지 풍경을 그린 연작시다. 먼저 현재의 인왕산과 그 기슭을 노래한 ‘필운산’을 보자. 필운산은 인왕산의 다른 이름이다. “한양의 여러 산이 삼각산(북한산)을 모시는데/ 한 줄기 구불구불 오른쪽 필운산을 지었다/ 골짜기가 나뉘어 열려 물과 돌이 맑고/ 산과 언덕이 서로 달려 용과 뱀이 살아 있는 듯하다/ 산머리엔 늘 오색구름이 보이니/ 좋은 기운 가득해서 금빛 궁궐을 향한다/ 내 집에선 책상처럼 이 산을 마주하니/ 어떻게 돌아가 하루 내내 바라볼까.” 그의 집은 현재의 청와대 옆 무궁화동산과 교황청 대사관 일대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김상헌은 ‘근가십영’ 외에 현재의 무궁화동산에 있던 자신의 집을 그리는 시도 썼다. “천 리 오랑캐 모래땅에 날마다 바람 부니/ 천지가 모두 어둠 속으로 들어간다/ 내 집은 본디 맑고 깨끗한 땅에 있으니/ 날리는 붉은 먼지 하나 받아들이지 않는다.”(‘날마다 바람 부니’(일일풍)) 김상헌은 인왕산에 대한 기행문도 남겼는데, ‘서산에서 놀다’(‘유서산기’)라는 작품이다. 서산은 인왕산의 다른 이름이다.

그의 자손들은 대대로 서촌에 살면서 조선 제1의 권력 가문으로 이름을 높였다. 이른바 ‘장동 김씨’들이다. 이들은 서촌에 많은 글을 남겼다. 김상헌의 손자 김수항이 옥류동(옥인동)에 청휘각이란 누각을 지은 뒤 쓴 시다. “층층 벼랑 중턱에 작은 정자를 지으니/ 동쪽의 번화한 곳에서 멀리 떨어졌다/ 반평생 물과 돌을 좋아하는 고황(고질)이 들어/ 늘그막에 즐기며 산속 우렛소리를 듣는다// 처마 사이로 짙은 안개가 옷을 적시고/ 베개 밑의 폭포 소리가 꿈을 깨운다/ 이제부터 이 골짜기에 물색(풍경)을 더할 테니/ 사람들은 소중히 시를 보내오라.” 김수항의 청휘각이 있던 옥류동은 현재의 옥인동 47번지 일대로 상류에 ‘옥류동’이란 글씨가 바위에 새겨져 있다.

김수항의 아들 가운데 김창업은 문학과 예술에 모두 뛰어나 조선 3대 연행기(베이징 방문기)인 ‘노가재 연행일기’를 썼고, 스승 송시열의 초상을 그렸다. 그가 1715년 아버지의 옥류동 집과 누각을 고친 뒤 지은 시는 슬프다. “이끼가 바위 글자를 꾸미고/ 단청이 물가 정자를 빛나게 하네/ 아버지가 맡긴 집이니/ 아들이 어찌 조급하게 하랴// 무너진 집을 일으키자 사람들 모두 좋아하는데/ 서글픈 마음에 나 홀로 술이 깼네/ 단풍나무와 소나무를 반드시 공경할지니/ 도끼가 찾아들지 않게 해야겠네.” 1689년 기사환국 때 아버지가 사약을 받고 떠난 슬픔과 두려움을 표현한 시다.

조선 후기 영조 이금은 젊은 시절 서울 서촌의 창의궁에 살면서 여러 편의 시를 남겼다. 창의궁에 있던 커다란 백송의 밑동. 김규원 선임기자

왕은 물론 서민들도 노래한 곳

조선 후기의 전성기를 연 영조와 정조도 서촌의 문학 활동에 참여했다. 영조는 1712~1721년 연잉군 시절 사저인 창의궁에서 살았다. 현재 통의동 금융감독원 연수원 일대다. 그때 ‘양성헌 팔영’(양성헌 8편 시)이란 연작시를 지었다. 양성헌은 창의궁의 한 건물이자 영조의 호였다. “누각에 기대 먼 곳을 바라보니/ 인왕산이 가리켜 보이는 곳에 있다/ 갑자기 연기와 아지랑이에 싸이지만/ 산은 언제나 한가하다.”(‘양성헌팔영’ 중 ‘서쪽으로 인왕산을 바라보다’) 영조는 자신이 살던 창의궁에 대해서도 시를 썼다. “창의궁은 그 어떤 곳인가/ 어의궁과 같다고 감히 견주랴/ 용흥궁이라고 부르기엔 덕이 부족하다/ 어필을 걸었으니 감히 만의 하나인가/ 동네는 장의동으로 다섯 궁을 품고 있다.”(‘창의궁’)

정조도 서촌에 대해 여러 편의 시를 남겼는데, 대표적인 것이 ‘국도팔영’(서울의 8편 시) 중 ‘필운대의 꽃과 버들’이다. 필운대는 필운동 배화여대 일대다. “필운대의 곳곳마다 번화함을 과시하라/ 만 그루 수양버들에 만 그루의 꽃이다/ 가벼이 덮인 아지랑이는 좋은 비를 맞이하고/ 새로 재단해 씻은 비단은 밝은 놀을 엮어놓은 듯하다.” 정조는 현재의 신교동 서울농학교 뒤 언덕인 세심대에 올라 이런 시도 지었다. “한가로운 날 꽃핀 봄철에/ 세심대에서 세속의 떠들썩함을 씻는다/ 두 산(인왕산, 백악)은 진정 한 집이고/ 천 그루 나무는 한 정원이다/ 고운 하늘빛은 화장한 듯하고/ 치솟는 땅 기운은 높다/ 앉은 자리엔 백발이 많으니/ 내년에도 또 오늘처럼 마시자.”

조선 후기 필운대는 봄나들이 명소였다 . 수많은 사람이 몰려들어 꽃구경하고 시 짓고 술 마셨다 . 이를 ‘필운대 풍월’이라고 불렀다. 1735 년 암행어사로 유명한 박문수는 ‘ 필운대 ’ 라는 시에서 “ 그대는 노래하고 나는 웃으며 필운대에 올라가니 / 오얏꽃 희고 복숭아꽃 붉게 모든 나무에 피어 있다 / 이런 풍광으로 이런 즐거움으로 / 해마다 태평한 술잔에 길게 취한다 ” 고 노래했다 . 조선 후기 대문장가인 박지원은 ‘ 필운대 꽃구경 ’ 이란 시를 썼다 . “ 새 울음과 모습이 각각인 것은 제 뜻이고 / 곳곳에 꽃이 피는 것은 저 하늘에 달렸다 / 유명한 정원에 앉아보니 머리 까만 아이들은 없고 / 흰머리들만 지난해와 다른 서글픔을 견딘다 .” 박지원의 친구 이덕무도 “ 구름 갠 서쪽 성곽 ( 필운대 ) 에 봄옷 차림으로 거니니 / 아지랑이 백 길이나 날아오른다 / 날마다 해지도록 늦어짐을 사양 말라 / 꽃다운 때 이 놀이 얼마나 다행한가 ” 라고 노래했다 .

18세기에 들어서면 사대부만이 아니라, 중인과 평민들도 서촌에서 문학 활동을 시작했다. 대표적인 모임은 천수경, 장혼, 김낙서 등으로 이뤄진 옥계시사(옥류동 시모임), 또는 송석원시사였다. 대표 격인 천수경의 시다. “맑고 얕은 옥계수/ 아늑한 청풍계 산기슭/ 천 년 전 왕희지와 사안의 놀이가/ 지금은 벌써 옛일이 됐네/ 아름다워라, 우리 시모임의 글벗들이여/ 예전엔 우리 함께 대빗자루 타고 놀았지/ 산이 높으면 물도 더 길어지니/ 흰머리 때까지 영원히 서로 따르세.” 옥계와 송석원은 현재의 옥인동 47번지 일대이고, 청풍계는 청운초등학교 뒤쪽 일대다. 다른 회원인 김낙서는 청풍계(청운동)의 시모임 모습을 이렇게 그렸다. “옥계 시냇물에 술잔 띄우고/ 청풍계 산기슭에 나란히 앉았네/ 난정 모임 뒤에 그 누가 있었나/ 우리 모임의 기약은 오래된 인연일세/ 술에 취하고 덕에 배부르니/ 거문고와 피리만 좋아하는 게 아닐세/ 푸닥거리를 했으니 병에 걸리지 말고/ 늙을 때까지 서로 찾아다니세”

조선 후기 서촌 필운대는 봄에 ‘필운대 풍월’의 명소였고, 수많은 문학 활동이 여기서 이뤄졌다. 김규원 선임기자

조선 3대 시조집 ‘가곡원류’도 필운대에서

조선 때 서촌 문학 활동의 마지막 불꽃은 필운대 일대에서 타올랐다. 박효관이 제자 안민영과 함께 1876년 필운대의 운애산방에서 조선 3대 시조집 중 하나인 ‘가곡원류’를 펴냈다. 고구려 을파소부터 안민영까지 모두 856수의 전통 시조가 실렸다. 이 시조집은 전통 시조 문학을 집대성한 것이었다. 먼저 박효관의 시조를 읽어보자. “임 그린 사랑 꿈에 귀뚜라미 넋이 되어/ 길고 깊은 가을밤에 임의 방에 들었다가/ 날 잊고 깊이 든 잠을 깨워볼까 하노라.” 제자 안민영의 시조는 스승 시의 댓구와 같다. “어리고 성긴 가지 너를 믿지 않았더니/ 눈 (오면 핀다는) 기약 능히 지켜 두세 송이 피었구나/ 촛불 잡고 가까이 사랑할 제 그윽한 향기조차 떠돌더라.”

서촌은 15세기 안평의 수성동에서 19세기 박효관·안민영의 필운대까지 조선 문학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공간 중 하나였다. ‘가곡원류’를 마지막으로 서촌의 문학은 조선과 이별하고 20세기로 넘어간다.

글·사진 김규원 선임기자 ch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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