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러 약세 통한 경제 부진과 적자 해결 위해 제2의 ‘플라자 합의’ 노릴 듯 약달러 딜레마 해결 위해 100년물 국채 강매 검토…부작용 경고 속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지난 4월 14일(현지시간) 25%의 자동차 관세에 대한 추가 면제를 시사하는 발언을 했다. 연합뉴스
최근 국제사회에선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다음 행보가 ‘환율 전쟁’에 집중될 것이란 관측이 나온다. 관세로 이미 전 세계를 뒤흔든 트럼프 정부에게 달러 약세는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Make America Great Again)’ 하기 위한 필수 불가결한 조건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세계 경제의 기축통화인 미 달러는 그 수요만큼 고평가되는 게 당연한 이치인데, 만약 트럼프 정부가 이걸 고리로 전 세계를 압박하기 시작한다면 글로벌 금융질서가 흔들릴 수 있다.
미런 보고서가 뭐길래
트럼프 정부에서 경제정책을 주도하는 핵심 참모는 3명으로 압축된다. 스콧 베센트 재무장관, 케빈 해셋 국가경제위원회(NEC) 위원장 그리고 스티븐 미런 경제자문위원회(CEA) 위원장이다. 이중 미런 위원장이 지난해 11월 허드슨베이 투자사 재직 시절 발간한 41페이지짜리 ‘글로벌 무역 체계 재편을 위한 사용자 지침’(미런 보고서)이 최근 국내외에서 주목받고 있다. 이 보고서에는 관세의 필요성과 약달러 중요성 등 트럼프 정부가 좋아할 만한 내용이 방대하게 담겨 있다.
미런 위원장은 보고서에서 ‘기축통화국’인 미국의 위치가 고질적인 경제 부진, 제조업 붕괴, 무역 적자를 만들었다고 전제한다. 기축통화인 미 달러 강세가 미국 상품의 가격경쟁력을 지속적으로 떨어뜨리기 때문이다. 주요 6개국 통화 대비 달러의 가치를 보여주는 달러인덱스는 지난해 10월 100선에서 올해 1월 13일 110.18까지 상승했다. 통상적으로 달러 인덱스값이 100을 초과하면 달러의 가치가 상대적으로 높다는 것을 의미한다. 트럼프의 오락가락한 관세정책 여파에 지난 4월 15일 달러 인덱스는 99.48까지 떨어졌지만, 여전히 강달러 선에 근접하게 붙어 있다.
미런 위원장은 1985년 9월 플라자 합의 때처럼, 주요 정상들을 트럼프 대통령의 자택이 있는 마러라고 리조트로 불러 달러 약세를 유도하는 ‘마러라고 합의’를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플라자 합의는 1980년대 초반 달러가 강세를 보이면서 제조업 기반이 약해지고 실업률이 뛰어오르자, 미국이 뉴욕 플라자호텔에서 일본, 독일(서독), 프랑스, 영국의 협조를 이끌어 달러를 평가절하한 환율조정 협정이다. 이로 인해 달러는 1985~1988년 프랑화 대비 40% 이상, 엔화 대비 50%, 마르크화 대비 20% 하락했다.
하지만 1980년대와 지금 미국이 처한 상황은 매우 다르다. 플라자 합의 때는 설득할 대상 국가가 사실상 일본과 독일 등에 그쳤다면 지금은 경쟁국인 중국을 비롯해 일본, 한국, 중동국가 등 협상 대상국 자체가 너무 많다. 바로 이 때문에 미런 위원장은 관세라는 채찍과 방위비 분담이란 당근책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그는 “유럽과 중국 같은 무역 상대국들이 관세 인하를 대가로 통화 협정을 더 수용하게 될 것”이라고 밝혔다.
달러 약세를 인위적으로 만드는 데는 대가가 따른다. 강한 수요를 바탕으로 지탱하는 기축통화 지위가 흔들릴 수 있다. 바로 여기서 ‘트리핀의 딜레마’가 나타난다. 경제학자 로버트 트리핀이 만든 이 용어는 기축통화 발행국은 국제 경제를 위해 돈이 풀리면 풀릴수록 적자가 늘어나는 부작용을 떠안을 수밖에 없다는 가설이다. 기축통화 지위를 누리기 위해선 통화에 대한 강한 수요, 높은 달러 가치가 유지돼야 한다. 미런 위원장은 보고서에서 “기축 통화로서의 역설은 영구적인 쌍둥이 적자(무역·재정 적자)를 초래한다는 점”이라면서 “결국 시간이 지남에 따라 지속 불가능한 공공 부채와 외채 축적으로 이어지고, 결국 대규모 채무국 경제의 안정성과 기축 통화의 지위를 약화시킨다”고 말했다.
스티븐 미런 백악관 경제자문위원장은 지난해 11월 관세 부과가 필요한 이유를 담은 일명 ‘글로벌 무역체계 재편을 위한 사용자 지침’ 보고서를 만들었다. 연합외신
하지만 미런은 약달러와 동시에 기축통화로서의 달러 패권을 유지한다는 상충하는 목표를 모두 달성하겠다고 한다. 딜레마를 해결하기 위해 꺼내든 카드는 100년물 미국 국채 강매다. 사실상 이자는 거의 지급하지 않는다. 이와 동시에 외국의 미 단기 국채 보유에 대해선 ‘사용료’를 부과한다는 것이다. 이를 통해 미국의 재정건전성을 개선하고 기축통화 지위도 유지한다는 구상이다.
미런 보고서 이행될지도…“한국 대비해야”
경제학자들은 미런 보고서의 많은 내용이 잘못됐다고 평가한다. 스티븐 카민 전 연방준비제도이사회 국제금융과장은 파이낸셜타임스(FT) 기고에서 기축통화국 지위가 미국에 해롭다는 것은 잘못된 해석이라며 “달러는 실제로 해외 사업 활동을 촉진하고 자본 비용을 낮추며 지정학적 영향력을 확대한다”고 말했다. 그는 미국 무역 적자 수준도 미국의 높은 경제성장률과 낮은 실업률 수준을 볼 때 문제가 아니며, 미국 제조업 종사자 비중이 줄어든 건 달러 강세 때문이 아닌 생산성 향상 때문이라고 덧붙였다.
모리스 옵스펠드 UC버클리대 경제학 교수도 브루킹스연구소 보고서에서 “2002년부터 2008년 금융위기까지의 기간은 달러화 급락에도 불구하고 무역 적자가 증가했다”며 “환율만으로는 무역수지를 가늠하기에 충분하지 않다. (중략) 무역수지는 국내 지출 등 다른 요인에 의해 결정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좌충우돌하는 트럼프 대통령 스타일상 충동적으로 환율을 건드릴 가능성은 그럼에도 남아 있다. 베센트 장관은 지난 4월 15일 야후파이낸스와의 인터뷰에서 중국이 자국이 보유한 미 국채를 무기로 미국 경제를 위기에 빠뜨릴 수 있다는 지적에 “우리가 쓸 수 있는 ‘큰 도구(big tool kit)’가 있다”고 답했다. 이를 두고 교역국과의 환율 협상이 시작될 수 있다는 전망이 제기됐다.
마러라고 합의가 실제 이행되면 미국 경제는 뇌관에 빠질 수 있다. 신현호 경제칼럼니스트는 “강달러가 미국 제조업 노동자들의 희생을 기반으로 금융시장과 소비자들이 이익을 보게 했는데, 약달러로 제조업 노동자를 살린다면 금융시장은 자본 유입 측면에서, 소비자들은 물가 측면에서 희생할 수밖에 없다”며 “제조업 노동자와 월스트리트를 동시에 살린다는 건 실현 불가능한 과제”라고 말했다.
미 외교지 ‘포린 어페어스’도 “미국의 규제권에 들어오는 나라들은 러시아가 2018년 그랬던 것처럼 국제교역에서 달러 비중을 줄이는 행보를 할 가능성이 높다”라며 “미국 국채 보유에 대해 손실을 감수하도록 강요하면 미래의 매수자들이 떠나게 될 것이고, 신용평가 기관에 의해 (국채가) 채무불이행으로 분류될 수도 있다”고 부작용을 경고했다.
그럼에도 미국에 안보를 의존하는 한국으로선 만일에 있을 환율 전쟁에 대비해야 할 필요가 있다. 박창균 자본시장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실질적으로 미국에 무역 흑자를 내는 주요 나라는 중국과 한국, 일본, 독일인데 100년 국채를 떠안기면 그걸 살 국가는 중국이 아닌 한국과 일본”이라며 “트럼프 대통령은 관세를 끝까지 고집하는 대신 그에 상응하는 대가, 즉 달러 약세 조정, 방위비 인상 등을 요구할 가능성이 있다. 우리 입장에서 줄줄이 새는 돈이 나오기 시작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