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원 '길바닥 이발', 500원 '거지 정식'...베이징 거리에서 만난 불황의 민낯 [칸칸차이나]

이혜미 2025. 4. 21. 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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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불황형 소비' 불티나는 14억 내수시장
사라졌던 거리 이발사, 지난해 전후 재등장
베이징 개업 10곳 중 8곳은 '저렴한 음식점'
中, 트럼프 관세 맞서려 '소비' 올인하지만
소비자 40%는 "소득 감소" 우려...동상이몽
베이징 시민들이 9일 아침 베이징 차오양구 용시공원에서 거리 이발을 하기 위해 줄을 서 있다. 베이징=이혜미 특파원

"워낙 불경기잖아요. 요새는 여성이나 젊은 사람들까지 거리에서 머리카락을 자른다니까요."

9일 오전, 중국 베이징 차오양구 용시공원 구석에서 하얀 가운을 입은 '거리 이발사' 리모씨가 이발기로 남성 손님의 머리카락을 다듬고 있었다. 발아래 소복이 쌓인 머리털을 치울 틈도 없이 다음 손님이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다. 리씨는 손님 세 명을 연거푸 해치우고 나서야 겨우 벤치에 앉아 한숨을 돌렸다.

이곳에서는 단돈 10위안(약 2,000원)이면 머리를 깔끔하게 정리할 수 있다. 샴푸 시설이나 유행 스타일 시술 기계는 없지만 '가성비'가 중요한 손님들이 꾸준히 찾는다. 부업으로 거리 이발을 하는 이씨는 하루에 한 시간만 이동식으로 자리를 잡고 영업을 한다. 집에서 가져온 거울을 공원 기둥에 붙이고 그 앞에 의자를 두기만 하면 영업 준비가 끝난다. "요즘 거리 이발사들이 부쩍 늘었어요. 단속도 심하고 경쟁이 치열해져서 손님이 전화를 주면 그곳으로 가서 머리를 잘라요."

베이징 곳곳에서 '거리 이발사'들이 다시 등장하기 시작했다. 현대식 미용실 등장과 공안의 단속, 제로 코로나 정책 등으로 대도시에서 한동안 자취를 감췄던 존재들이다. 이들이 다시 가위를 들고 거리로 쏟아져 나온 건 대략 지난해부터다. 중국 경제가 연속으로 마이너스 물가를 기록하며 1960년대 이후 최장 기간 디플레이션(경기침체 속 물가 하락) 구간에 진입한 시기와 맞아떨어진다.

20년 이상 베이징에 거주한 한 교민은 "코로나19 이전 경기가 좋았을 땐 한국의 고급 미용실 브랜드가 1선 도시(베이징·상하이 등 대도시)에 진출할 정도로 소비 수준이 높았다"고 말했다. 미용 비용을 지불할 정도의 소비 여력까지 바닥나기 시작했다는 증거가 바로 거리 이발사의 등장이라는 얘기다.

외모에 민감한 젊은이들까지 미용 가격에 예민해진 건 무시하기 어려운 '불황'의 징후다. 최근 중국 젊은이들 사이에서는 각종 클리닉과 헤어 관리 제품, 회원카드 가입 등을 권유하며 비싼 가격을 부르는 미용실을 비판하는 '138위안(약 2만8,000원) 이발 암살자'라는 신조어가 유행하고 있다. 중국 생활 정보 플랫폼 '다종뎬핑'에서 한 네티즌은 거리 이발소에서 머리를 자른 뒤 이렇게 썼다. "소비를 줄이기로 하면서 처음 시도해 봤는데, 미용실에서 50위안을 주고 하는 것보다 나쁘지 않았다. 기대 이상이다."


먹는 것도 '거지 정식 세트'만 불티나게 팔린다

베이징 시민들이 14일 중국 베이징 차오양구에 있는 프랜차이즈 식당 '난청샹'에서 '3위안 아침 식사'를 비롯한 저렴한 음식을 먹기 위해 줄을 서 있다. 베이징=이혜미 특파원

불황의 그림자는 미용뿐 아니라 기본 의식주에도 짙게 드리웠다. 14일 오전 6시, 출근 시간 훨씬 전인데도 베이징 중심업무구역(CBD) 내 프랜차이즈 식당 '난청샹'에는 아침 끼니를 해결하려는 노동자로 가득했다. 어림잡아 25명 정도가 아침 식사를 하고 있었고, 배달 플랫폼 유니폼과 의자 옆에 둔 청소 도구, 안전모 등으로 추측건대 대부분 배달 기사 등 비정규 노동자나 농민공(농촌을 떠나 도시에서 일을 하는 사람)인 듯했다.

대표 메뉴는 '3위안 조찬'이다. 두유와 쌀죽, 쏸라탕(중국식 수프) 등 7가지 메뉴를 단돈 3위안(약 600원)에 무한리필로 먹을 수 있다. 오후 특정 시간대에는 배달 기사에게 40% 할인을 해주기도 한다. 가장 비싼 메뉴인 작은 훠궈는 불과 22위안(약 4,400원) 정도다. 난청샹은 최근 베이징에만 매년 70여 개 이상의 매장이 새로 문을 열 정도로 폭발적으로 성장하고 있다.

인근 공사장에서 인부로 일하는 20대 남성 류모씨는 중국식 아침 식사용 꽈배기인 요우티아오와 '3위안 아침 식사'를 시켜 총 5.8위안(약 1,130원)을 지불했다. 아침 7시 30분까지 출근하는 그는 거의 매일같이 이곳에서 식사를 한다며 "월급과 생활비를 생각하면 한 끼에 10위안 이상을 지불하는 건 무리"라고 말했다. 베이징시 기준 월 최저임금은 2,420위안(약 48만 원)이다.

난청샹처럼 가성비가 좋은 식당을 일컫는 '거지 정식 세트(穷鬼套餐)'라는 인터넷 밈(meme·온라인 유행 콘텐츠)도 생겼다. 최근 중국 요식시장 업황을 관통하는 키워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2023년 패스트푸드 체인 맥도널드는 메뉴 전반의 가격을 인상하면서도 햄버거와 음료수를 하나씩 골라 13.9위안(약 2,700원)에 먹을 수 있는 '1+1 내 마음대로 조합' 메뉴의 가격은 그대로 뒀다. 소비자들이 이를 두고 "가난한 이들이 배를 채울 수 있도록 배려했다"고 극찬하면서 '거지 정식 세트'는 중국 요식업계에서 따라가지 않을 수 없는 트렌드가 됐다.

베이징의 노동자들이 안전모와 업무 도구를 가게 밖에 둔 채 14일 중국 베이징 차오양구에 있는 프랜차이즈 식당 '난청샹'에서 아침 식사를 하고 있다. 베이징=이혜미 특파원

루이싱커피는 가장 공격적으로 저가 전략을 벌이는 중국 토종 커피 브랜드다. "루이싱커피 가격의 심리적 마지노선은 9.9위안(약 1,900원)이라는 표현이 있을 정도다. 평균 15위안 정도인 음료 가격이 부담스러울 뿐 아니라, 9.9위안을 넘으면 손해 보는 느낌이라는 의미에서다. 대표적인 '불황형 소비'다.

미슐랭 별을 훈장처럼 단 파인다이닝 레스토랑에서도 '거지 정식 세트'로 분류되는 가성비 메뉴가 출시됐다. 미슐랭 3스타 중식 레스토랑인 '신룽지'는 일반 객단가가 800~1,000위안(16만~20만 원) 수준이지만 지난해 398위안 저가 정식 세트 메뉴를 내놨다. 상하이에 본점을 둔 이 식당은 베이징에서도 영업했는데, 지난해 경영난을 버티지 못하고 폐점했다. 평균 가격이 4,400위안(약 88만 원)에 달하는 미슐랭 식당 EHB는 클래식 세트 메뉴의 구성을 크게 바꾸지 않았는데도 가격을 3분의 1로 낮췄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고급 식당은 줄줄이 폐업하고 저가 메뉴를 앞세운 식당만 간신히 생존하는 새로운 생태가 고착화하고 있다. 올 초 글로벌 부동산 컨설팅 기업 존스랑라살(JLL)이 발표한 '2024 베이징 상업용 부동산 시장 보고서'에 따르면, 지난해 베이징에서 문을 연 매장 가운데 76%가 패스트푸드, 베이커리, 음료 등 객단가가 낮은 매장이었다. 반면, 중국 요식업 전문 매체 훙찬망에 따르면 지난해 상하이에서 이용자 1인당 가격이 500위안(약 10만 원) 이상이었던 고급 레스토랑 수는 1년 만에 2,700개에서 1,400개로 반토막 났다.

중국의 배달 플랫폼 '메이퇀'의 유니폼을 입은 배달 기사가 14일 이른 아침 베이징 차오양구에 있는 프랜차이즈 난청샹에서 식사를 하고 있다. 베이징=이혜미 특파원

내수 시장으로 '트럼프 관세' 버틸 수 있을까

시진핑(가운데) 중국 국가주석이 중국의 최대 정치 연례행사인 양회가 개막한 지난달 4일 베이징 인민대회당에 입장하고 있다. 베이징=로이터 연합뉴스

'소비'는 올해 중국의 최대 화두다. 지난달 열린 중국 최대 연례 정치 행사 '양회'에서 리창 국무원 총리가 발표한 '정부공작보고'에서 '소비'라는 표현은 31번 등장했다. 연이어 발표된 '소비 진흥 특별 행동 방안'을 통해서도 중국은 최저임금을 인상하고, 건설 프로젝트로 고용을 확대하며, 소비 여력 확보를 위해 휴가를 보장하는 등 소비 진작 유인책을 쏟아냈다.

'미중 관세 전쟁' 국면에서도 중국은 '소비' 카드를 방패막이로 앞세웠다. '14억 내수 시장'이 받쳐주고 있는 만큼, 145%라는 천문학적인 대(對)중국 관세로 인한 수출 피해를 국내 소비로 상쇄하겠다는 전략이다. 관영 인민일보는 최근 사설에서 "국내 수요 확대를 장기 전략으로 삼고, 소비를 경제 성장의 주요 원동력이자 균형추로 삼고, 초대형 시장의 이점을 최대한 활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미용실 갈 여유도, 그럴싸한 식당에서 여유롭게 밥 한 끼 할 돈까지 아껴야 할 정도로 얼어붙은 소비심리를 얼마큼 반전시킬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트럼프 관세'가 발효된 9일 전후(8~11일) 미국 투자은행 모건스탠리가 중국에 거주하는 2,034명을 대상으로 진행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응답자의 40%는 오히려 소득 감소를 우려하고 있다. 다음 분기에 돈을 더 쓸 것으로 예상하는 사람은 23%에 불과했다. 절반에 가까운 중국 소비자(44%)는 자신이나 가족이 실직할까 봐 우려하고 있었다. 이는 2020년 같은 설문조사가 시작된 이래로 가장 높은 수치다. 응답자의 39%는 '트럼프 관세'로 인해 1년 전보다 실업을 더 우려한다고 응답했다. 모건스탠리는 "중국 경제에 대한 소비자들의 신뢰가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2022년 이래 최저 수준으로 떨어졌다"고 분석했다. 중국 당국과 관영 매체들이 경제 자신감을 북돋우기 위해 돌림노래처럼 부르는 "소비심리가 살아나고 있다"는 말이 미심쩍게 들리는 이유다.

베이징= 이혜미 특파원 herstory@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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