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방의 사건, 세계의 기록으로…4·3 기록, 세계유산 된다

허호준 기자 2025. 4. 3. 1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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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기록물, 이달 초·중순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 전망
4·3 당시 불법 군사재판을 받고 대구형무소에서 수감 중이던 문숙현이 1950년 2월 어머니에게 보낸 엽서. 제주4·3평화재단 제공

“어머님께. 그동안 기체후일향만강하오시며 가내 모든 분들이 여전하십니까. 저 한 몸도 여전히 건강하오니 안심하십시오. 제가 부탁드리고자 하는 것은 봄옷과 내복 상하의, 양잿물과 손수건, 일금 약 3천원을 보내주시면 영치할 것이니 그리 알고 보내주십시오. 그리고 형님과 늙으신 어머님, 처자식의 소식을 듣고 싶사오니 속히 답장하여 주십시오.”

1950년 2월 당시 대구형무소에 수감 중이던 문숙현(당시 25살)은 제주읍 삼도리의 어머니 앞으로 엽서를 보냈다. ‘불법 군사재판’을 받고 수감된 그가 보낸 이 엽서는 마지막 엽서가 됐다. 그해 6월 한국전쟁 발발 뒤 육지 형무소에 수감됐던 4·3 관련자들이 그렇듯이 그도 행방불명됐다. 75년 전 공포와 두려움 속에 썼을 빛바랜 엽서는 유산이 됐다.

’침묵과 금기의 역사’였던 제주4·3 기록물이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를 눈앞에 두고 있다.

제주도는 4·3 기록물이 지난 2월 국제자문위원회 심사를 거쳐 2일부터 17일까지 열리는 유네스코 집행이사회에서 최종 등재가 결정된다고 밝혔다. 4·3 기록물은 집행이사회 등재 심사대상 74건 중 57번째로 목록에 올라있다.

도가 유네스코 한국위원회 심사를 거쳐 2023년 11월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본부에 등재 심사를 신청한 기록물 명칭은 ‘진실을 드러내다: 제주4·3 기록물’(Revealing Truth: Jeju 4·3 Archives)이다.

1948년과 1949년 이뤄진 ‘군법회의 수형인 명부’와 명부에 담긴 인적사항. 제주4·3평화재단 제공

유네스코에 신청한 기록물은 문서와 엽서, 비디오, 오디오 등 모두 1만4673건으로 구성됐다. 제주도와 제주4·3평화재단은 “이번 등재를 신청한 기록물은 세계적 냉전과 한반도의 분단이 남긴 역사의 기억이며, 제주도민들의 자발적인 화해·상생의 노력으로 국가폭력의 극복과 해결을 이뤄낸 기록으로서, 과거사 해결의 모범적 사례가 담긴 총체적 기록물”이라고 밝혔다.

등재를 신청한 기록물 가운데는 1948년과 1949년 군사재판을 받아 유죄 판결을 받은 민간인 2530명의 이름, 본적, 항변, 판결 등이 적힌 ‘군법회의 수형인 명부’가 있다. 군사재판은 판결문과 재판 조서, 변호인 등 재판 요건을 갖추지 못해 ‘불법 군사재판’으로 평가됐고, 지금도 4·3 재심 재판이 증거와 진상규명 자료로 활용되고 있다. 또 당시 형무소에서 보낸 엽서와 1990년대 제주도의회 4·3 피해신고서, 증언 영상, 화해와 상생의 상징적 기념물로 알려진 제주시 애월읍 하귀리의 영모원 위령비 등도 기록물에 포함됐다.

제주지역에서는 2012년께부터 세계기록유산 등재를 공론화하기 시작했다. 제주도는 제주4·3평화재단과 함께 2017년부터 4·3 기록물의 세계기록유산 등재 작업을 추진해왔다. 그동안 등재 신청을 위해 기록물 정리와 국내외 심포지엄 개최, 민간 기록물 수집 운동, 4·3 당시 기록물을 중심으로 한 아카이브 특별전 등을 여는 등 세계기록유산 등재를 위한 절차를 밟아왔다.

특히 도는 2023년 2월에는 ‘4·3 기록물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추진위원회’를 출범시킬 정도로 기록유산 등재에 공을 들여왔다. 도와 재단은 4·3 기록물의 가치에 대해 “사건 당시 기록물은 2차 세계대전 이후 초기 냉전, 국가폭력, 민간인 학살 관련 자료들을 한 사건을 통해 한눈에 보여주는 세계적으로 희귀한 기록”이라며 “사건 이후 기록물은 과거의 역사를 화해와 상생으로 나아가기 위한 유족과 제주도민의 공동체 회복을 담은 세계적으로 선도적 사례에 대한 기록”이라고 평가했다.

제주도의회가 1994년 신고받은 ‘4·3 피해신고서. 제주4·3평화재단 제공

반영관 제주4·3평화재단 팀장은 “4·3 기록물은 당시 참혹했던 현실을 딛고 끊임없이 진실을 말한 유족들의 목소리와 진상규명 운동, 국가의 사과 등을 담고 있다”며 “등재되면 4·3이 걸어온 과거사 해결의 여정을 세계가 기억해야 할 기록으로 인정받는다는 의미를 가지게 된다”고 말했다. 홍호진 제주도청 4·3지원과장은 “최종 등재가 결정되면 4·3의 역사적 의미와 평화·인권 가치가 국제적으로 인정받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김창범 제주4·3유족회장도 “세계기록유산 등재는 4·3의 역사가 대한민국을 넘어 세계인이 기억해야 할 사건이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며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돼 인류의 유산으로 남게 되기를 기원한다”고 기대감을 내비쳤다.

제주4·3 기록물이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면 4·3이 한국 현대사의 한 사건을 넘어 세계 인권사의 중요한 사례로 자리 잡을 기회가 될 것으로 보인다.

유네스코는 기록유산 보존에 대한 인식을 증진하고, 가치 있는 기록유산의 접근성을 높이기 위해 1992년부터 ‘세계의 기억’(Memory of the World)이라는 이름으로 세계기록유산을 등재하고 있다. 국내에서는 1997년 훈민정음(해례본) 등재를 시작으로 지금까지 18건의 기록물이 등재됐다. 2011년엔 ‘1980년 인권기록유산 5·18 광주 민주화운동 기록물’이 등재됐고, 2023년엔 ‘4·19혁명기록물’과 ‘동학농민혁명기록물’이 등재됐다.

허호준 기자 hojoo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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