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3 첫 모의고사와 개그맨 이경규의 말

칼럼니스트 최은경 2025. 3. 28. 0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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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달음 육아] 고3 엄마에게도 필요한 마인드, '대확행'

"언니 시험 잘 봐야 할 텐데..."

"잘 볼 거야. 내가 언니 시험 잘 보라고 기도했어."

"그랬어? 우리 기도처럼 언니가 시험 잘 봤으면 좋겠다."

오전에 둘째와 나눈 대화인데 그날 오후에 그렇게 말한 걸 후회했다. 뒤늦게 개그맨 이경규의 호통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서다.

"시험을 잘 보면 좋겠다니, 부모가 그런 마음을 가지면 안 되는 거예요. 내 아이가 열심히 노력해서 오늘 무탈하게 시험을 보는구나, 참 다행이다, 행복하다, 이렇게 생각해야지. 이게 바로 내가 생각하는 대확행이에요."

이경규씨가 실제로 한 말이 아니다. 이경규는 최근 책 '삶이라는 완벽한 농담'을 내고 한 유튜브에 출연해 자신은 '소확행이 아니라 대확행을 주장하는' 사람이라고 했다. '작고 확실한 행복'에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크고 확실한 행복'을 추구해야 한다는 것. 잠시 그의 말을 옮겨보면 이렇다.

이경규는 최근 책 '삶이라는 완벽한 농담'을 내고 한 유튜브에 출연해 자신은 '소확행이 아니라 대확행을 주장하는' 사람이라고 했다. ⓒ유튜브, 지식인사이드

"어머니가 도시락을 하나 싸준다. 어머니가 싸준 도시락을 먹으면서 행복하다. 이런 게 소확행? 아니에요. 어머니가 계시다는 자체로 행복한 거예요. 대확행을 늘려라. 우리는 사소한 것에서만, 뭘 줘야지 행복을 느낀다고 하는데, 살아있다는 자체만으로 행복한 거예요. 어머니가 도시락을 싸주지 않아도, 부모님이 많은 유산을 물려주지 않아도, 부모님이 계신 것만으로도 나는 고맙다.... (이렇게 저는) 소확행을 뒤집는 대확행을 주장하는 사람입니다. 내가 지금 직장에서 많은 돈을 받고 있다, 그래서 행복하다가 아니고, 내가 이 직장에서 일을 하고 있다. 그래서 행복한 거다. (나에게 일이 있다) 그럼요, 그런 대확행으로 가야 돼. 큰 걸 보고 가야해. ... 타인을 통해서 행복을 찾지 말고, 자기를 통해 행복을 찾으라는 거죠. 그게 대확행을 주장하는 내 학설이라는 거죠."

이경규의 말을 내 상황에 대입해 보면 나는 대확행이 아니고 소확행을 바란 거다. 큰걸 못 보았으니까. 이경규의 대확행에 따르면, 아무 일 없이 무탈하게 오전 8시까지 학교에 가서 시험이 끝나는 시간까지 하루 종일 책상에 앉아 문제와 씨름하고 있는 지금 아이의 존재 자체가 행복이란 말이다. 달리 반박할 말이 떠오르지 않는다. 모의고사 한 번으로 끝나는 고3 생활도 아니잖나.

아이가 시험을 잘 보면 좋겠다고 생각한 건, 점수 때문만은 아니었다. 나는 아이가 자신감을 잃을까 봐 겁이 났다. 자신감을 잃지 않으려면 어떻게든 시험을 잘 보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이 생각은 최근 나의 사고를 지배했다. 생전 가본 적 없는 동네 절까지 가봤으니까. 아는 동생에게 일요일 오전 10시에 법회가 열린다는 이야길 듣고 무작정 찾아갔다. 결과적으로는 잘못된 정보였다. 법회는 음력 보름에 열린다고 했다. 결국 나는 부처님 얼굴만 빤히 바라보다가 슬그머니 법당을 나왔다.

친정엄마 생각이 났다. 친정 엄마는 아빠를 대신한 가장이셨다. 평일에는 공장에서 일을 하고 주말이면 산에 가셨다. 등산이 아니라 절에 기도하러 가는 게 목적이었다. 엄마는 쉬어야 할 날에 쉬지 않고 그렇게 절에 가서 기도했다. 자식들 잘 되게 해달라고. 경기도에 사는 엄마가 시험 때면 몇 번이나 '기도빨'이 좋다는 대구 팔공산에 있는 절까지 가서 밤새 기도를 하고 오셨다. '폭싹 속았수다'에서 금명이(아이유 역) 대사처럼 '꿈을 꾸는 계절이 아니라, 꿈을 꺾는 계절'을 보냈던 건 엄마 오애순(문소리 역) 이야기만은 아니었다. 우리 엄마도 그랬다.  

그런데도 나는 그때마다 서운할 법한 말을 쏟아부었다. 피곤한데 뭐 하러 그 먼데를 가냐. 그런다고 내가 시험을 잘 보냐... 금명이처럼 나도 뒤늦게 그 마음을 알 것 같다. 공부를 대신해줄 수 없으니 그거라도 하면서 위안을 삼았던 거였는데... 뭐라도 하면 자식 일에 도움이 되는 기분이라도 드니까 그런 거였을 텐데, 나는 엄마의 그 마음을 전혀 알아주지 못했다. 알려 하지 않았다. 그나마 엄마의 기도로 내가 이렇게라도 사는 건지도 모르는데 말이다. 

법당을 나오는데, 절 입구에 '수능 기도비 문의는 전화로'라고 써 있는 글귀가 보였다. 아, 이런 것도 하는구나. 엄마가 절에 등 달고 돈 냈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돈도 없다면서 쓸데없이 절에 돈 낸다고 했던 그때의 나는 이제 여기 없다. 벌써 전화를 걸어 "수능 기도비가 얼마냐"라고 묻고 있었으니까. 나도 별 수 없는 엄마로구나, 싶었다. 이번에는 내 딸이 나에게 '엄마는 뭐 하러 그런 걸 해'라고 할지도 모르겠다.

솔직히 지난해인 2학년 12월까지는 얘가 공부를 하는 건가, 싶은 마음이 컸다. 열심히 하는 것 같지 않았다. 올해 1월부터는 좀 달랐다. 꾸준히 공부했고 방학 기간 두 달 동안 2주에 한 번 친구를 만날 정도로 외부 출입이 거의 없었다. 선행 없이 고등학교에 입학한 아이였다. 출발이 다른 아이들과의 경쟁은 쉽지 않았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아이는 처음부터 경쟁할 마음이 없는 것 같았다. 내가 속상해하고 불안해할 때마다 그때마다 남편은 말했다. "그래도 학교 잘 다니잖아." 이 남자는 이미 대확행을 알고 있었나 보다. 미안하다, 가까이 있었는데 몰라봤다.

집에 오길 하루 종일 기다린 내 마음과 달리, 아이는 친구와 저녁을 먹고 온다고 했다. '아, 연어 구이했는데...' 아쉬운 마음은 내 문제일 뿐이다. 저녁을 먹고 들어온 아이는 뭐 이렇다 할 말이 없다. 잘 봤으면 먼저 와서 조잘조잘 했을 텐데... 아이에게 시험 결과를 들은 것도 아닌데 '열심히 해도 안 되네, 어쩌나, 어쩌나' 하는 마음이 앞섰다. 그렇다고 먼저 물을 용기도 없다. 이런 나를 달래는 게 먼저일 것 같아 집을 나섰다.

힐링 요가 수업에 예약을 걸어둔 터였다. '이를 어쩌나' 걱정되는 마음은 어두운 조명과 뜨근한 방바닥 온도 이슈로 언제 그런 일이 있었나 싶게 사라졌다. 대신 졸음과 사투를 벌이는 나만 있었다. 눈꺼풀은 내려앉는데 동작은 계속되었다. 나는 이제 눕는데 옆 사람은 벌써 일어나서 두 손을 합장한 채 머리 위로 뻗고 있다. 내가 일어나서 두 손을 합장한 채 머리 위로 뻗으면 옆 사람은 누워서 두 다리를 들어 올리고 있다. 릴레이가 아닌데 나는 바통을 넘겨 받은 사람처럼, 한 박자 느린 동작을 늘어진 테이프 마냥 수행하고 있다. 입술이 바짝 말랐다. 실내가 건조하다 못해 목구멍이 깔깔한 기분이다. 아무리 침을 삼켜도 목구멍에서 수분감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미리 립밤을 챙겨 바르지 않은 나를 원망했다.

집에 오니 밤 11시가 가까이 되었다. 이렇게 하루가 가나보다. 술 한 잔 한다던 남편이 들어왔다. 드디어 방에 있던 큰아이가 나왔다. 눈치를 보니 표정이 나쁘지 않다.

"아, 수학 다 풀고 무려 30분이나 남았는데... 쉽다고 생각했는데 어이없게 앞 문제에서 몇 개나 틀린 거 있지. 뒷 문제 3개 빼고 다 풀었는데... 지금 다시 풀어보니, 다 맞을 수 있는 거였어. 아, 이번 등급이 참... 어이없네."

진짜 쉬웠는데 실수로 틀렸는지 한 등급도 오르지 않은 수학 점수에 본인도 무안해서 그랬는지 알 길은 없다. 얼굴이 발그레한 남편이 기분 좋게 웃으면서 말했다.

"그럴 수 있지. 그래도 늘 시간이 부족했는데 이번에는 남았다니... 그 말을 들으니까 오히려 아빠는 좋다. 네가 아쉽다고 하니 시간이 남으면 안 풀리는 것보다 푼 것 맞는지 체크하는 것도 필요할 것 같아. 실수를 줄이면 다음에는 더 나아질 거야. 고생했고, 수고했어."

아이가 듣고 싶은 말이었을 거다. 아빠의 격려에 아이는 뭔가 더 신이 난 듯 말했다. 내가 하려는 말을 거둘 만큼 아빠의 말은 그대로 충분했다. 옆에 있는 나까지 기운이 날 만큼. '그래, 그거면 됐지. 다음에 더 잘하고 싶다잖아. 적어도 좌절은 하지 않았으니 얼마나 다행이야, 진짜 다행이다' 속으로 말했다.

남편은 언제나 가족이 듣고 싶은 말을 기꺼이 해준다. 오늘도 그랬다. 남편의 말을 가만 듣고 있자니, 이번에는 이경규가 딸 예림이랑 나눈 대화가 생각났다. '취기를 빌어 딸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이라는 질문을 받고 나눈 둘의 이야기였다.

'취기를 빌어 딸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이라는 질문을 받고 나눈 둘의 이야기. ⓒ유튜브

이경규 : "조금은 철학적인데..."

예림 : "무섭다."

이경규 : "아빠는 언덕이야."

예림 : "비빌 언덕?"

이경규 : "응, 비빌 수 있는 언덕이야. 그러니까, 마음껏 비비라고. 소떼나 양 떼도 비빌 언덕이 있어야지, 살아가는 거야. 그게 남편이 될 수도 있고 다른 사람이 될 수도 있고 근데, 너의 비빌 언덕은 아빠다. 아빠는 너의 비빌 언덕이다, 이렇게 생각하라고."

예림 : "그럼 결혼해서도 계속 비벼도 되는 거야?"

이경규 : "(하하하) 비벼야지, 비벼야지. 비벼 비벼 비벼. 오케이?

예림 : "오늘부터 제대로 비벼보겠어."

둘 : "비빌 언덕을 위하여, 짠."

아빠를 닮아 유쾌한 예림이다. 그리고 오늘 나는 내 딸의 비빌 언덕을 옆에서 직관했다.

*칼럼니스트 최은경은 편집기자로 일하며 두 딸을 키우는 직장맘입니다. 그림책 에세이 「짬짬이 육아」, 성교육 대화집 「이런 질문, 해도 되나요?」, 일과 사는이야기를 담은 에세이 「아직은 좋아서 하는 편집」을 펴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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