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독하다 보면 슬그머니 싹트는 궁금증. ‘글쓴이는 어떤 사람일까.’ 번역 외서(外書)가 쏟아지는 시대지만 해외 저자는 만남의 문턱이 높죠. 한국 독자와 해외 작가 간 소통을 주선합니다.
개그맨 이수지 씨가 연기한 ‘제이미(Jamie)맘 이소담 씨’ 영상의 한 장면. 학군지 엄마들의 과도한 교육열을 소재로 삼았다. 유튜브 캡처
대한민국 사교육 1번지 중심인 서울 대지동(대치동 아님) 금묘(gold cat) 아파트. 금묘 조리원에선 예일대 박사 출신이 과학기술논문인용색인(SCI)급 논문을 들어 태교 영어를 강조하고, 아파트 반찬가게엔 버지니아 사티어의 ‘아기는 무엇으로 자라는가’가 꽂혀 있다.
금묘 영어유치원에 다니다 보니 한국어 발음이 이상해진 아이들. 하지만 ‘세종 유아 한국어 발음 학원’에서 교정하면 되니 문제 될 게 없다. 입학이 까다롭기로 유명한 ‘금묘인스티튜트’에선 종일 CM송이 나온다. 가수 아바의 ‘The Winner Takes It All’을 개사한 ‘정신교육송’ 가사는 이렇다.
‘외로워도 슬퍼도 견뎌야 해. 이 길 끝에는 의대가 있으니까. 이 길 끝에는 서울대가 있으니까. 승자가 모든 것을 가져가. 아무도 2등은 기억하지 않지. 너는 네 친구에게 지고 싶니? 지기 싫으면 오늘 이를 악물어….’
영국 옥스퍼드대 입학처장을 역임한 조지은 교수가 그린 학군지(학군이 좋은 지역) 풍경은 생각보다 사실적이고 촘촘했다. 언어학자이자 교육 전문가인 그는 최근 첫 소설 ‘서울엄마들’(헬로우코리안)을 펴냈다. 무대는 국제학업성취도평가 PISA에서 세계 1등을 차지한 금묘 아파트. 주인공은 엘리트 자녀 양성을 위해 내달리는 엘리트 부부 3쌍이다. 배우이자 소설가인 차인표는 책 추천사에서 “소설을 읽으며 우상을 쫓아 혼돈에 빠지고 휘청거렸던 ‘학부모로서의 나’를 돌아보게 됐다”고 했다.
영국인과 결혼해 영국에서 아이를 낳고 키운 그가 ‘제이미맘’보다 더한 디테일과 블랙코미디로 사교육을 그린 배경이 궁금했다. 그는 “언제부턴가 한국에선 ‘교육=희생’이 된 것 같다”며 “모든 걸 잡으려다 중요한 걸 놓치고 마는 평범한 대한민국 부모들을 위로하고 싶었다”고 했다. 12세, 16세 두 딸을 둔 엄마이기도 한 그를 20일 서울 광화문 동아미디어센터에서 만났다.
일타 강사와 사교육을 다룬 2023년 방영 드라마 ‘일타 스캔들’ 포스터.
개 훈련도 영어로?
―금묘 아파트 사람들은 영어 교육을 위해 개 훈련도 영어로 하고, ‘초등 의대반 학생을 위한 건강 도시락’을 사 먹인다. 허구인지 사실인지 헷갈리는 부분이 많은데 대치동 출신인가. “충청남도 소도시에서 나고 자란, 개천에서 용 난 케이스다. 95학번이다. 언어학자로 이중언어를 전공해 ‘영어유치원’ ‘공부감각’ 관련 책을 펴내고 강의를 하면서 학부모들을 정말 많이 만났다. 국적 불문하고 아이 부모들이 만나면 교육 이야기가 빠지지 않는다. 거기서 자연스레 얻은 정보와 상상력으로 책을 썼다. 사실인지 아닌지 헷갈리는 부분은 일부러 의도한 측면도 있다. 태교 관련 SCI 논문은 있지만 실제 조리원에서 그런 강의를 하진 않는 부분이 대표적이다.”
―입시에 행운을 가져다준다는 고양이 동상 ‘금묘’는 아파트의 정신적 지주와 같다. 아파트 사람들은 수시로 금묘를 만지고, 금묘의 수염이 사라지자 자신들의 성적이 도난당할 듯한 불안에 빠진다. “한국의 수능 이야기를 들으면 영국인들이 깜짝 놀란다. 수능일에 출근 시간을 늦추고, 듣기평가 때 비행을 못 하고, 종교와 관계없이 모두가 기도를 하고, 낙방할까 봐 미역국을 먹지 않는다니…. 한국 밖에서 24년간 학생과 교수로 지냈기 때문에 이 교육이라는 우상, 즉 금묘가 보였던 게 아닌가 싶다. 고양이는 수염을 잃으면 균형을 잃는데, ‘교육과 삶의 밸런스’를 이야기하기 위한 장치로 금묘의 수염 도난 사건을 배치했다.”
―엄마로 살 날이 길지 않다는 혼잣말, 듣기 좋으라고 ‘슈퍼맘’이라고 부른다는 워킹맘의 자조, 아이를 위해 늘 간단한 먹거리를 챙겨 다니는 모습…. 엄마라면 공감할 만한 대목이 많더라. “제목이 ‘서울 엄마들’인데 한국어로 썼고 영어 번역본도 출간 예정이다. 사실 부모는 만국공통으로 아이를 위해 열심인 사람들이다. 시대적으로도 딸 입에 넣어주려고 학교로 호떡을 들고 오던 ‘옛날 엄마’(사실 본인 이야기다)나 만능 매니저처럼 아이를 돌보는 ‘오늘날 엄마’나 목적은 똑같다. 자식이 잘되길 바라는 것! 하지만 그 양상은 나라마다 조금씩 다르다.”
―이수지 씨의 ‘제이미맘’ 영상을 둘러싼 반응이 뜨거웠다. 사실 영유아 엄마들은 학원 마케팅에 휘둘리기 쉽다. 영유아기는 아이가 말을 잘 듣고 인풋이 좋아서 아이에 대한 학습적 기대치가 높을 때니까. “지난해 초부터 책을 썼는데, 영상을 보고선 ‘앗, 비슷한 컨텐츠가 나왔네’ 싶었다.(웃음) 학군지 엄마들도 아이가 잘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교육을 서포트하는 거라고 생각한다. 다만 교육에 열심인 엄마들의 상황이 경제력과도 관련이 있다 보니 주목받는 게 아닐까 싶었다. 극성 엄마들이라고 손가락질하기 보다 교육 사다리에 목매도록 부추긴 사회가 문제라고 본다. 사회도 엄마 탓을 하는 게 아닐까.”
―은주 엄마는 ‘공부하라고 지시만 하는 그런 무책임한 엄마가 아니’라며 아이가 수학을 풀면 본인은 국어를 푼다. 마치 한석봉 엄마처럼. “한국의 어머니는 신사임당과 한석봉 엄마로 대표된다. 공부 못해도 엄마 탓, 키가 안 커도 엄마 탓하는 분위기가 있다. ‘엄마표’란 단어는 ‘부모표’ 또는 ‘엄빠표’로 바뀌어야 한다. 영국에선 살림과 교육 모든 측면에서 부부가 역할을 잘 분담하는데, 한국도 분위기가 상당히 바뀐 것으로 안다.”
교육 전문가로 ‘공부 감각, 10세 이전에 완성된다’, ‘언어의 아이들’ 등을 펴낸 조지은 옥스퍼드대 교수. 이설 기자 snow@donga.com
영국에도 대치동이?
―금묘 영어유치원에선 엄마가 한국말을 해도 아이가 벌점을 받는다. 이중언어 전문가로서 영어유치원은 어떻게 보나. “한국에선 세계 평균보다 3년 빠른 3.5세부터 영어를 가르친다고 한다. 중요한 것은 시기보다 ‘어떻게’다. 한국어와 영어를 혼돈하거나 영어에 대한 두려움을 느끼게 되는 경우가 생각보다 많다. 영국에선 영유아 시기엔 ‘스터디’란 단어를 쓰지 않는다. 10세 이전엔 엄마와 함께 즐겁게 영어를 습득하는 경험이 중요하다.”
―소설 속 은주와 수지는 선행을 해둔 덕분에 잠시 밴드나 알바에 눈 돌려도 1등을 유지한다. 사실 많은 부모들이 사춘기 변수를 대비해 선행을 시킨다. “선행도 아이가 받아들이느냐 아니냐를 잘 봐야 한다. 그럼에도 선행 중심은 시험문제 풀이식 공부라 아이의 내공에 얼마나 영향을 줄까 싶다. 인공지능(AI) 시대에 지식 공부에 매몰되는 건 옳지 않다. 사고력은 즐겁고 여유있을 때 자란다. 초등학생이 고등학교 문제를 푸느라 시간이 없으니 호기심을 가질 여유가 없다. 제일 중요한 게 관찰인데 관찰을 못 하면 챗GPT와 경쟁이 안 된다.”
―영국에도 대치동과 선행이 있나. “일부 엘리트 교육에 관심 있는 이들도 있겠으나, 보편적으로는 학원과 선행은 없다. 특히 선행은 인지적으로 시기에 맞는 적기(適期) 교육을 하는 게 맞다고 본다. 대신 책을 읽거나 하나의 주제에 대해 글을 쓰는 숙제는 많다. 10세 이전에 책상 공부에 매몰되면 나중에 ‘쿠크다스 멘탈’이 될 가능성이 높다. 다른 사람 이야기를 듣고 같이 무언가를 해야 언어 공감 능력이 자라나 멘탈이 튼튼해지기 때문이다. 사실 문해력 논란도 순리에 맞지 않게 학습 속도를 마음대로 바꾸다 보니 불거진 게 아닌가 한다. 모국어 습득 시기, 책에 빠져들 시기 등을 놓치고 나중에 시키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학교 잘 보낸 엄마들은 자기들이 다 잘해서 그런지 아는데, 그게 아니더라고’라는 대목이 나온다. ‘될놈될 안될놈안될’ 인가. “금묘 아파트 2층은 정보력, 3층은 유전, 4층은 1타 코디네이터(학업 관리사)와 유전 등이 강점이다. 소설에서는 4층이 1등 하다가 2층이 추월한다. 유전이냐 정보력이냐…. 그건 모르는 거지만 아이들은 기본적으로 엄마랑 같이 있는 걸 너무 좋아한다. 유전도 맞고 시험공부 머리가 따로 있기도 하다.”
―학군지에서 끝까지 ‘멱살 잡고’ 가면 입시에선 성공 확률이 높아진다는 이야기가 있다. ‘돼지맘’ 출신 컨설턴트들이 과목별 단원별로 부족한 부분을 짚고 딱 맞는 학원과 강사를 안내하는…. “하지만 우리가 생각해 봐야 할 부분은 ‘진짜 공부란 무엇인가’다. 사고력을 키우려면 거듭 강조하듯 ‘경험’과 ‘독서’가 중요하기에 정보력, 유전, 1타 코디를 활용해 죽어라 공부하는 이유를 되짚어 볼 필요가 있다. 영국 아이들은 ‘벽돌책’을 많이들 읽는데 결국 이런 독서력이 사고력으로, 어려운 논문을 쓰는 능력으로 이어진다. 이들이 문제 풀이를 잘하는 건 아니다.”
2004년 방영된 드라마 ‘러브스토리 인 하버드’의 한 장면.
하버드대 출신 치킨 가게 사장님
―한국의 입시제도를 생각하면 ‘진짜 공부’를 생각할 여유가 없는 게 사실이다. 내신과 수능부터 챙겨야 좋은 대학에 간다. “물론 입시제도 변화까진 갈 길이 멀다. 하지만 이제는 한 번쯤 멈추고 패러다임을 바꿀 토대를 마련할 여건을 갖췄다. 콩나물교실 시절엔 변별력이 시험의 목적이었다. 지금은 AI 시대인 데다가 학생 수도 적어서 상상력과 표현력을 키우는 교육을 할 수 있다. 행복을 교육 목표로 삼을 수 있는 시대인 것이다. 아이들도, 세상도 변하는데 교육만 제자리에 머물러선 안 된다. 이해보다 표현에 방점을 둔 교육이 필요하다. 모든 교육 관계자와 학생 학부모가 새로운 교육 패러다임에 대해 사유하면 한 스텝씩 바꿔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
―공부가 확률상 아이의 안정된 미래를 설계할 가장 좋은 길이어서 내달릴 수밖에 없다는 자조도 있다. “영국에는 랭킹 문화가 없다. 영국인 시누이도 대학이 필요가 없어서 안 갔지만 전혀 열등감이 없다. 대학은 재능을 발휘하기 위한 하나의 과정이다. 학교에서도 등수가 없고, 역사 과학 수학을 잘하는 아이가 있을 뿐이다. 아예 차별이 없진 않지만, 학벌과 상관없이 사회의 모든 직업이 비슷하게 인식된다.”
―소설에선 하버드대와 서울대 출신 아빠들이 사회적으로 방황하다가 ‘하버드치킨’‘서울대치킨’으로 대박을 낸다. 학벌주의를 비판하기 위한 장치인가. “영어에는 학벌주의란 단어 자체가 없다. 영국에서 의사는 박봉에다 봉사직에 가깝고, 옥스퍼드대 면접을 하면 학생들이 ‘졸업 후 아버지 식료품점을 이어받겠다’라고 한다. 소설에서 치킨집을 연 남편에게 변호사 아내가 CEO(최고경영자)라고 적힌 명함을 주는데, 옥스퍼드에선 직업 귀천이 없으니 그럴 필요가 없는 셈이다. 언어학자로서 뿌리 깊은 직업 차별 인식은 언어로 바꾸면 어떨까 한다. 존중 이면에 차별이 있는 ‘사’가 들어간 직업의 용어를 바꾸고, 편견을 바꾸는 노력이 필요하지 않나 싶다.”
―‘성공하는 아이의 조건은 착한 아이, 고분고분한 아이’라는 구절이 나온다. “양면적인 메시지가 있다. 훈련하기에 좋은 아이들이 학습 관리가 잘되지만, 그렇지 않은 아이들도 다크호스일 수 있다. 그건 부모가 발견하는 거다. 내 아이가 어떤 부분에 강점이 있고 어떤 학습환경에 잘 맞을지 관찰해야 한다.”
―아이가 학습엔 재능이 없는 것 같아도 사교육을 놓긴 쉽지 않다. 밑빠진 독에 물 붓기 같은데도 부족한 부분을 더 채우게 된다. “물론 하고 싶은 것만 할 수는 없다. 끝까지 해내는 과정 역시 중요한 공부다. 하지만 본인만의 관심사가 반영되지 않은 학교는 아이에게 굉장히 슬픈 공간일 것이다. 남들과 비교해서 똑같은 길로 가는 것에 브레이크를 걸 사람은 부모밖에 없다. 입시를 알고 교육을 알고 아이를 알아야 한다. 그리고 믿고 기다려야 한다. 옥스퍼드대 동료 교수도 성인이 되고 한참 뒤에 원하는 길을 찾았다. 세상에 한두 사람이 온전히 자기를 믿어 준다면 시기와 재능은 다르더라도 결국 발현될 거라고 본다.”
―소설에서 수능 만점자 어머니가 비결을 묻자 ‘학습 분위기’를 언급한다. 금묘 아파트는 모든 것이 입시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분위기, 얼마나 중요한가. “가정과 학교 분위기는 중요하다. 경쟁적인 분위기가 아니라 심리적으로 편하고 호기심을 북돋워 주는 분위기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질문을 마음껏 하고 토론할 수 있어야 앞서 말한 사고력을 키우는 공부가 잘 된다. 학군지의 다같이 공부하는 분위기 측면에선, 억압적인 분위기는 아니라고 본다. 경쟁에 얼마나 잘 맞는지는 아이마다 다르니 분위기 타는 것도 나름인 셈이다.”
―사춘기 이야기도 나온다. 교육전문가라는 사람이 문을 떼고 와이파이 끄고 휴대전화 수거하고 종이랑 연필만 주라고 조언한다. ‘마음에 멍이 들어야 아이들은 정신을 차린다’면서. “자녀 방문을 떼 버린다는 이야기에 영국 지인들 표정이 심각해진다. 부모로선 소통의 의지를 드러낸 것이지만, 사춘기 아이들은 모욕감을 느낄 수 있다. 자유를 박탈당하는 거니까. 아이와 협의해서 정해야 할 문제 같다. 봉선아는 딸 수지랑 떡볶이 먹으면서도 공부 이야기만 하는데, 이건 대화가 아니다. 소통하는 방법을 아는 게 우선이다.”
조지은 교수는 충남에서 나고 자라 95학번으로 한국에서 대입을 치렀습니다. 영국에서 24년간 학생과 교수로 생활했고, 12세 16세 두 딸을 둔 엄마이기도 하지요. 글로벌 책터뷰 ‘서울엄마들’<하>편에선 그런 그가 한국 사교육을 소설로 출간한 배경을 알아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