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상우의 내 몸 사용 교과서] 당신이 놓치고 있는 우울증의 신호

2025. 3. 14. 0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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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상우 동국대 일산병원 가정의학과 교수

드문 일이긴 하지만, 필자도 가끔 환자로부터 ‘명의’ 소리 들을 때가 있다. 의료 지식이 뛰어나서도, 인기 드라마 중증외상센터에 나오는 백강혁 교수처럼 탁월한 실력과 재능을 가졌기 때문도 아니다. 그저 평범한 의사일 뿐인데 어떻게 그런 말을 듣게 되었을까. 이유는 의외로 단순하다.

날씨가 추워질 때면 어김없이 찾아오는 여성 환자가 있다. 첫 진료 때 그는 수년간 지속한 복통과 흉통을 호소했다. 혹시 암이 아닐까 걱정되어 고가의 검진을 여러 차례 받았다고 했다. 유명 병원을 전전하며 검사비만 1년에 1000만원 넘게 썼지만, 돌아온 것은 “검사상 이상 없음”이라는 진단뿐이었다. 가족들마저 “혹시 꾀병이 아니냐”며 의심하기 시작하면서 환자는 점점 더 힘들어했다.

「 신체 언어로도 사인 보내는 질병
혼자가 아니라 함께 싸워야 효과
편견을 버리는 것부터 시작해야

진료 당시 환자는 자신의 증상을 필자에게 상세히 설명해 주었지만, 증상들의 연관성이 모호해 뚜렷한 질병을 특정하기가 어려웠다. 면담을 이어가다 보니 우울증(우울장애)이 의심되었고 환자의 증상과 대부분 일치했다. 그는 신체화 증상을 보이는 우울증 환자였다. 항우울제를 처방하고 반응을 지켜보았다. 다행히 소량의 약에도 빠르게 반응했고 오랫동안 지속한 증상 대부분이 사라졌다. 몇 년간 이어진 고통이 해결된 순간이었다. 이후에도 같은 시기마다 우울 증상이 반복되지만, 적절한 약 처방으로 안정적으로 관리하고 있다.

이 에피소드가 환자로부터 ‘명의’라는 말을 듣게 된 사연이다. 비법은 간단했다. 우울증에 대해 약간의 관심을 가지고 체크해 보았을 뿐이다. 덕분에 환자의 삶은 놀라울 정도로 호전되었다. 누구나 우울증 가능성만 체크해 보았다면 ‘명의’ 소리를 들었을 것이다.

우울증은 세로토닌·도파민·노르에피네프린 같은 신경전달물질의 불균형으로 발생하는 질병이다. 이 물질들은 감정뿐만 아니라 통증, 장운동, 수면 조절에도 영향을 미친다. 또한 우울증은 자율신경계의 균형을 무너뜨리고 스트레스 호르몬의 분비를 증가시키는 부작용도 가지고 있다. 이들로 인해 만성 피로, 무기력, 수면 장애, 두통, 소화불량, 변비, 설사, 근육통, 관절통, 심장 두근거림, 가슴 답답함, 어지럼증, 집중력 저하와 같은 신체 증상들이 생긴다.

이런 신체 증상들은 일반적인 질병에서도 관찰된다. 그래서 신체 질병의 해결에만 집중하다 보면 숨어있는 우울증을 놓칠 위험이 커진다. 부끄럽지만 필자도 소중한 분의 우울증을 놓친 적이 있다. 그것도 가까운 가족, 멀리 고향에 계신 어머니 이야기다. 어머니는 심장 두근거림, 호흡 곤란, 수면 장애와 같은 다양한 증상을 호소하셨지만, 멀리 떨어져 있는 탓에 전화로 “이 병원, 저 병원 가보라”는 말밖에 해드리지 못했다. 다행히 한 유능한 의사가 어머니의 내면에 숨어 있던 우울증을 발견해 치료해 주었고 모든 증상이 말끔히 사라졌다.

우울증은 신체화 증상을 일으키지만, 거꾸로 신체 질병이 우울증을 유발하기도 한다. 마치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는 문제와 같다. 우울증 탓에 신체 증상들이 나타났는지, 아니면 신체 질병이 우울증을 일으켰는지 선후 관계를 판단하기가 쉽지 않다. 사실 이 둘을 엄격히 구별할 필요는 없지만, 두 가지가 함께 존재하는지 점검해 보는 것은 중요하다. 왜냐하면 우울증을 해결해야 신체 질환도 빠르고 효과적으로 치료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울증을 해결하려면 이 병에 대한 오해부터 버려야 한다. 우울증을 정신 무장이 약한 낙오자들의 병으로 치부해선 안 된다. 우울증은 신경전달물질의 불균형이 일으키는 병이지, 개인의 의지나 능력 부족 때문이 아니다.

우울증 치료제에 대한 편견도 버려야 한다. 어떤 사람들은 영화나 드라마에서 본 장면을 떠올리며 ‘약을 먹으면 멍해지고 피폐해진다’고 생각한다. ‘약에 중독되어 끊지 못하면 어쩌나’ 하는 고민을 하는 경우도 있다. 다행히 최근 개발된 항우울제는 부작용이 크게 줄었고 효과도 대폭 향상되었다. 약물치료에 대한 불안은 이제 과장된 기우에 불과하다.

우울증을 앓는 사람들은 종종 도움을 요청하는 신호를 보낸다. 직접적인 말뿐만 아니라 신체 증상이나 행동 변화로도 나타날 수 있다. 이 신호를 외면하지 말고 관심을 기울이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나라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우울증·자살률 1위라는 불명예를 안고 있다. 반복되는 유명인의 자살 소식은 많은 사람의 마음을 아프게 한다. 우울증은 적절한 치료를 받으면 충분히 극복할 수 있는 병이다. 치료를 망설이지 말자. 우울증은 혼자가 아니라 함께 이겨내야 할 병이다. 작은 관심과 공감이 누군가의 삶을 바꿀 수 있다.

오상우 동국대 일산병원 가정의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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