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익주의 고려, 또 다른 500년] “정치의 잘잘못은 사람 때문” 풍수 아닌 실력으로 성장

2024. 10. 11. 00: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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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남경은 어떻게 조선의 서울이 됐나


이익주 역사학자
조선 왕조가 개창되고 한양으로 천도한 것이 1394년 10월 25일(음력)의 일이니, 서울은 지금까지 꼭 630년 동안 수도의 자리를 지켜왔다. 그럼 그전에 서울은 어땠을까? 삼국시대에는 한강 유역을 차지하는 나라가 주도권을 장악했다고 알려져 있다. 이 말은 지금 서울 지역이 전략상 요충지였음을 의미하지만, 반대로 삼국 모두의 변경이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전쟁의 위험이 상존하고, 주인이 여러 번 바뀌는 땅에서 안정되고 풍요로운 삶을 누리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그럼, 서울은 언제부터 도시로 발전했을까?

「 고려초엔 양주, 1067년 남경 승격
평양·경주 다음 세 번째 지방 거점

문·숙종 때 천도 주장 잇따랐지만
여진 정벌, 왕조교체설에 발목

교통 이점 2대 도시로 자력 성장
풍수 거부한 조선 새 수도로 선택

우리나라 풍수의 창시자로 알려진 도선국사 진영. 남경(서울)으로 천도를 예언한 『도선기』가 고려 문종 때 주목받았다. [사진 디지털영암문화대전, 서울역사박물관, 중앙포토]

왕실의 근거지인 개경(지금의 개성)을 수도로 삼은 고려 왕조는 지방에 거점 도시를 만들었다. 개경 호족 출신이라는 왕실의 한계를 극복하고, 지방 세력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여 지방 통치를 효과적으로 하기 위함이었다. 그 첫 대상은 평양이었다. 삼국 통일 후 오랫동안 신라 영토에서 벗어나 있던 평양에는 위협적인 지방 세력이 없었고, 고려 왕실이 일찌감치 점령해서 배후 거점으로 삼았다. 게다가 당시 유행하던 풍수에 따르면 평양은 우리나라 지맥(地脈)의 뿌리가 되는 길지였다. 고려는 평양을 서경(西京)으로 높이고 우대했다. 두 번째는 경주였다. 신라의 1000년 수도 경주는 전국에서 문화 수준이 가장 높은 곳이었다. 그뿐 아니라 신라 경순왕이 스스로 항복한 덕분에 고려에 적대적인 감정도 없었다. 경주에는 동경(東京)을 설치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지금의 서울에 주목했다.

풍수 시조 승려 도선의 천도 예언
지금 서울은 고려 초에 양주(楊州)라고 불렸고, 983년 전국 12목에 지방관을 파견할 때 양주목이 되어 광주목과 함께 양광도(楊廣道)의 어원이 되었다. 그 뒤 잠시 양주로 강등되었지만, 1067년에 갑자기 남경(南京)으로 승격되어 서경, 동경과 더불어 3경 가운데 한 자리를 차지했다. 그때 국왕 문종이 남경 천도를 꿈꿨기 때문이다. 문종 대(1046~1083년)는 고려 500년 역사에서 가장 평화롭던 시기이다. 그런데, 왜 천도를 생각했을까?

북한산의 신라 진흥왕 순수비. 도선이 “무학이 길을 잘못 찾아 여기에 이른다”고 새겨놓았다고 알려졌으나 추사 김정희가 직접 답사해 진흥왕 순수비임을 밝혔다. [사진 디지털영암문화대전, 서울역사박물관, 중앙포토]

우리나라 풍수의 시조인 승려 도선(827~898)이 지었다고 하는 『도선기』가 문종 때 주목되었다. “개국 후 160여 년 뒤에 목멱양(木覓壤)에 도읍할 것이다”라는 구절 때문이었다. 목멱양이란 목멱산 아래 땅이란 뜻이고, 목멱산은 지금 서울 남산의 본래 이름이다. 918년에 고려가 건국되었으니, 그로부터 160여 년이 지난 문종 때 지금 서울로 천도하게 되리라는 예언이었다. 또 『삼각산명당기』라는 책에는 “임자년 안에 땅을 파면 정사년에 성스런 아들을 낳을 것이요, 삼각산에 제경(帝京, 황제의 서울)을 건설하면 9년째 되는 해에 온 세상이 조공을 바칠 것이다”라는 구절이 있었는데, 마침 임자년(1072년)과 정사년(1077년)이 모두 문종 재위 기간에 들어 있었다. 이런 비록(秘錄)을 믿고 천도를 추진했던 것이다. 문종은 즉위 후 일성으로 선왕의 사치를 비판하고 시정했던 검소한 국왕이었지만, 그런 그가 막대한 비용이 들어가는 천도를 추진했을 만큼 도선의 위력은 대단했다.

천도를 결정하고 한 해 뒤에 남경에 새 궁궐이 완성되었다. 이제 국왕이 옮겨올 일만 남았는데, 어찌 된 일인지 그러질 못했다. 기록에는 나와 있지 않지만 개경 귀족들의 반대가 심했기 때문일 것이다. 시간이 갈수록 천도는 추진 동력을 잃어 갔다. 결정적으로 정사년이 되어도 왕자가 태어나지 않고, 9년이 지나도 조공을 바치는 나라가 없었다. 믿고 싶은 대로 믿은 결과였다. 이렇게 해서 문종의 남경 천도는 흐지부지 끝났지만, 아들 숙종이 아버지의 뜻을 이었다. 숙종은 조카 헌종을 쫓아내고 왕위에 오른, 조선의 세조와 같은 인물이었다. 그 약점을 천도를 통해 만회하고자 했고, 이런 국왕의 마음을 김위제라는 술사(術士)가 읽었다. 그는 『도선답산가』라는 책에서 “송도(松都, 개경)의 운이 다하면 어디로 가려는가? 동짓날 해 돋는 곳에 넓은 땅이 있네. 후대에 어진 이가 그곳에 큰 우물을 파니 한강의 어룡(魚龍, 물고기와 용)들이 바다로 통한다”라는 구절을 인용해서 왕에게 남경 천도를 권했다. 동짓날 해 돋는 곳이란 개경의 동남쪽에 있는 남경을 가리키며, 남경을 흐르는 한강의 북쪽 땅은 왕조가 영원히 이어지고 온 세상이 조공해 올 명당 중의 명당이란 해설을 덧붙였다.

숙종 때 청와대 자리에 “궁궐 건립” 기록

용산이라는 지명은 고려 숙종 때 남경 천도를 논의하는 과정에서 처음 보인다. 1861년 김정호가 제작한 ‘대동여지도’에 수록된 ‘경조오부도’에는 무악에서 만리재를 거쳐 한강까지 이어지는 산세가 분명히 나타나 있고, 그 끝에 ‘龍山(용산)’이라는 지명이 적혀 있다(화살표 부분). [사진 디지털영암문화대전, 서울역사박물관, 중앙포토]

숙종은 남경에 직접 행차해서 지세를 살피는 열성을 보였고, 사람을 보내 궁궐 자리를 정하게 했다. 그들이 돌아와서 보고하기를, “신 등이 노원역과 해촌(海村), 용산 등에 가서 산수를 살펴보았는데 모두 도읍을 세우기에 적합하지 않았고, 오직 삼각산 면악(面嶽)의 남쪽이 산수 형세가 옛 문헌에 부합합니다”라고 했다(『고려사』 숙종 6년 10월 8일). 이에 따라 면악 남쪽에 남경 궁궐을 새로 지었다. 면악은 뒷날 백악으로 불리다가 지금의 북악산이 되니, 북악산 남쪽에 고려 궁궐이 건립된 것이다. 시간이 한참 흘러 조선 개국 후 한양에 궁궐터를 정하면서 고려 숙종 때 지은 궁궐이 너무 좁으니 그 남쪽의 평평하고 넓은 터로 하자는 말이 나왔고, 그 말을 좇아서 경복궁 자리가 정해졌다. 이것을 거꾸로 읽으면 경복궁 북쪽, 즉 청와대 자리가 옛 고려 궁궐터가 되는 셈이다. 지금 서울 한복판에 1000년 전 고려궁궐이 숨어 있을 수 있으니, 청와대 일대를 잘 보존해야 할 이유다.

고려 숙종 때 지금의 서울인 남경에 건립한 궁궐은 경복궁 북쪽, 청와대 일대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사진 디지털영암문화대전, 서울역사박물관, 중앙포토]

숙종의 강력한 왕권으로도 남경 천도는 끝내 이루지 못했다. 반대도 반대지만, 때마침 동북쪽 국경이 소란스러워지고 여진과 전쟁을 시작하게 된 것이 중요한 원인이었다. 그만큼 천도는 안팎의 조건이 모두 갖추어져야만 할 수 있는 어려운 일이었다. 숙종의 남경 천도와 관련해서는 재밌는 야사가 전한다. 먼저, ‘용손십이진설(龍孫十二盡說)’이다. 용의 후손인 고려 왕실이 12대가 지나면 끝난다는 이야기다. 숙종은 15대 국왕이고, 태조의 6대손이지만, 왕건의 시조 호경(虎景)으로부터 따지면 꼭 12대가 된다. 용손이 끝나면 다음은 누가 왕이 될 것인가? 이어 나오는 것이 ‘십팔자위왕설(十八子爲王說)’ 또는 ‘목자득국설(木子得國說)’로, 이씨가 왕이 된다는 이야기다. 오행으로 풀이해서 신라는 금덕(金德)이고 고려는 수덕(水德)이니, ‘수생목(水生木)’에 따라 다음은 목덕(木德)인 이씨가 주인이 될 것이라는 그럴듯한 풀이가 뒤따랐다. 숙종이 이 말을 믿고 불안했던 것일까?

조선 후기 이중환의 『택리지』에도 비슷한 이야기가 전한다. 옛날에 도선이 비기를 남겼는데, ‘왕씨를 잇는 자는 이씨이고 한양에 도읍한다’고 했다. 그래서 고려 중엽에 윤관을 시켜 백악산 남쪽에 오얏나무를 심고 나무가 자라면 그때그때 베어내서 이씨의 기운을 억눌렀다. 조선이 개국하고 무학대사에게 도읍지를 정하도록 했는데, 무학이 궁궐터로 정한 곳이 다름 아닌 고려 때 오얏나무를 심었던 곳이더란 이야기다. 이 역시 근거 없는 참언이지만, 고려에 이어 이씨 왕조가 실제로 들어섰으니 거짓이라고 할 수만도 없는 노릇이다. 그러나 역사 속에서 적중한 예언은 십중팔구 결과가 나온 뒤에 만들어진 것임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

묘청 서경 천도 좌절 후 2대 도시로
숙종의 남경 천도가 중단된 뒤 얼마 안 가 묘청이 서경 천도를 주장하다가 뜻대로 되지 않자 반란을 일으켰다. 그때도 개경의 지덕이 쇠했다는 풍수론이 근거가 되었다. 반란이 진압되면서 서경은 몰락의 길을 걷게 되었고, 서경을 대신해서 2대 도시의 자리를 차지한 것이 바로 남경이었다. 남경은 개경 못지않게 국토의 중앙에 위치했을 뿐 아니라 한강과 서해의 뱃길을 이용해서 상인들이 활동하기 좋은 입지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3경 가운데 서경과 동경이 풍수나 역사 전통에 근거해서 권위를 누렸다면, 남경은 자기 실력으로 성장한 도시였다. 그래서 고려 말에도 수차례 남경 천도 논의가 있었지만, 그때까지도 풍수와 비록을 근거로 들었다. 서울은 결국 새 왕조 조선의 수도가 되는데, 당시 실력자 정도전은 이렇게 말했다. “신은 음양술수의 학설을 배우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나라가 잘 다스려지고 어지러움은 사람에게 달렸지 땅의 성쇠에 있지 않습니다.” 500년 풍수의 영향을 깨트린 획기적인 발언이었다. 서울은 이렇게 인문주의를 바탕으로 탄생했다.

이익주 역사학자·서울시립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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