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퍼 엔저]②日 경제위기 때마다 구원투수…엔저의 역사
이후 경제위기 때마다 엔저 유도해 경제부흥
엔저현상 장기화로 일본 국민 가난해졌다는 지적도
"엔저가 일본 경제를 망가뜨리고 국민들을 가난하게 한다. 일본의 1인당 국민소득은 한국에 역전당할 것이다."
일본의 원로 경제학자인 노구치 유키오 히토츠바시대 명예교수는 2022년 본인의 저서 '일본이 선진국에서 탈락하는 날'에서 일본 정부의 엔저 정책의 폐해에 대해 매우 강하게 지적했다. 당시 그의 주장은 일본에서 상당한 반향을 일으켰고 책은 베스트셀러가 됐다.
그의 예측은 금방 현실이 됐다. 한국의 1인당 국민소득(GNI 기준)이 지난해 사상 처음으로 일본을 앞섰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한국의 작년 1인당 GNI는 3만6194달러로 일본의 3만5793달러보다 높았다.
그 사이에 엔저현상은 더 심해졌다. 2022년 130~140엔대를 오가던 엔·달러 환율은 최근 160엔선을 넘어섰다. 1986년 12월 이후 37년 7개월 만에 최저치다. 지난주에는 엔화가 약간 강세를 보여 150엔대 후반으로 떨어지긴 했지만 엔화 약세 우려는 여전하다.
엔저현상이 일본의 국민소득을 더 떨어뜨렸다. 물가수준까지 감안한 실질 구매력을 기준으로 하면 엔화 가치는 사상 최저수준이다. 국제결제은행(BIS)에 따르면 지난 5월말 기준 엔화의 실질실효환율 지수는 64.45로 1970년대 이후 최저수준으로 떨어졌다. 실질실효환율은 한 나라 화폐가 상대국 화폐와 비교해 실질적으로 어느 정도의 구매력을 가졌는지를 나타내는 환율이다.
2020년 환율을 100으로 정해 수치가 100을 넘으면 기준 연도 대비 고평가, 100보다 낮으면 저평가됐다고 해석된다. 지난달 엔화 지수는 가장 높았던 1995년 4월 193.97과 비교하면 35.4% 수준에 그쳤다. 다른 나라 화폐에 비해 엔화의 가치가 그 어느 때보다 저렴해졌다는 의미다. 실질적인 가치로 비교해 보면 엔화는 1973년 변동환율제 도입하기 이전 유지했던 고정환율 1달러=360엔보다도 엔저 상태다.
올해 들어 엔화가치가 유난히 하락한 것처럼 보이지만 엔저의 역사는 굉장히 길다. 2차 세계대전 이후 1980년대 초반까지 엔·달러 환율이 200엔에서 300엔대를 왔다갔다 할 정도였다. 장기간 지속된 엔저에 힘입어 당시 일본의 자동차와 반도체 등 주력산업의 수출이 크게 증가했고, 일본은 미국에 이어 세계 2위의 경제대국에 올라섰다.
하지만 일본의 급속한 경제성장과 강달러 현상에 부담을 느낀 미국이 일본에 환율 조정을 강하게 요청해 1985년 플라자합의를 이끌어내면서 상황이 급변했다. 미국은 뉴욕의 플라자호텔에 일본, 영국, 독일, 프랑스의 재무장관을 불러 일본 엔화가 너무 저평가돼 미국의 무역적자가 심화되니 엔화 강세를 유도해 달라고 강력히 요청했다. 시장원리에 맡겨야 할 외환시장에 각국 정부의 개입을 요구한 것이다. 플라자합의 이전에 달러당 240엔대였던 엔화가 2년여 만인 1988년 120엔대로 두 배가량 절상됐다.
플라자합의 이후 갑작스런 엔고로 경기가 침체되자 일본 정부는 경기 부양을 위해 금리 인하와 부동산 대출 규제 완화라는 정책을 폈다. 이로 인해 1980년대 후반부터 1990년 초반까지 일본의 부동산 및 증시 폭등이 발생했고 일본에는 거품(버블)경제 시대가 찾아오게 된다. 당시 일본 도쿄의 땅을 팔면 미국 전체를 살 수 있다는 이야기가 나올 정도로 일본의 부동산 가격이 폭등했다.
이렇게 자산시장에 거품이 끼자 일본 정부는 이를 막기 위해 금리 인상을 단행했다. 하지만 급격한 금리 인상으로 인해 주식과 부동산 가격이 폭락했고 많은 기업과 은행들이 도산했다. 일본에서 이른바 ‘잃어버린 30년’이 시작되는 시점이다.
엔화가치의 급격한 상승과 급속한 경기침체, 1995년에는 고베 대지진까지 겹치자 일본 정부는 G7 정상회담에서 엔화 약세를 용인해달라고 주요국들에게 요청했다. G7 국가들은 과도한 엔화 강세를 제어하는 차원에서 일본의 요청에 동의했다. 이를 역플라자합의라고 부르는데 이후 달러는 강세, 엔은 약세로 돌아서며 일본 경제는 급속한 경기침체에서는 벗어나게 된다.
이후 1998년 아시아 외환위기를 겪으면서 엔화가치는 다시 상승하게 됐고 경기침체 우려가 발생하자 일본의 고이즈미 준이치로 내각은 2000년대 초반부터 1차 양적완화를 통해 엔화가치 하락을 유도하는 정책을 사용했다.
일본이 양적완화 정책 하에서 제로금리를 유지하는 동안 미국 등 주요국은 정책금리를 인상해 금리격차가 크게 확대됐고 이로 인해 2004년부터 2007년까지 엔화가치는 달러화대비 8%가량 하락하는 엔저의 시기가 찾아왔다.
당시 엔저에 힘입어 일본 기업들의 이익은 크게 증가했고 수출 및 설비투자도 호조를 보이며 일본 경제의 회복세를 뒷받침했다.
그러나 2007년 글로벌 금융위기를 겪으면서 엔화가치는 다시 상승하게 되고 이는 아베 정권의 2차 양적완화와 엔저 유도 정책을 불러오게 된다. 특히 2011년 동일본 대지진으로 일본 경제가 크게 어려움을 겪으면서 아베 정권은 2012년 본격적으로 아베노믹스를 시작한다.
아베노믹스의 핵심은 엔화를 시중에 풀어 엔화의 가치를 떨어뜨리는 것이었다. 아베 전 총리는 “윤전기를 돌려서 일본은행으로 하여금 돈을 무제한으로 찍어내게 하겠다”고 말하기도 했다.
아베노믹스로 인해 일본의 경기는 개선됐다. 일본 기업의 수출이 늘고, 일본 증시도 상승했다. 하지만 수입 물가가 급등해 국민들의 생활이 어려워지는 반작용도 있었다. 아베노믹스의 대규모 양적완화 정책으로 인한 엔저현상은 일본 경제에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을 동시에 불러오며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노구치 유키오 히토츠바시대 명예교수는 “아베 정권의 엔저 정책으로 인해 수출기업들의 이익은 증가하고 주가는 올랐지만 국민들은 가난해졌다”며 “더 큰 문제는 손쉽게 이익을 얻은 기업들이 기술개발이나 비즈니스 모델 전환을 등한시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노구치 명예교수는 “현재의 엔저현상 역시 물가 상승을 통해 가계의 실질 소득을 감소시키고, 실질 소비를 감소시키고 있다”며 “일본 경제는 스태그플레이션에 빠진 상황”이라고 말했다.
이창환 기자 goldfish@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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