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소속기관 가리자 '연구비' 특권이 사라졌다
유명 연구기관 소속이 아니거나, 경력이 길지 않은 과학자에게도 ‘공평하게’ 연구비를 지원하려면 심사 과정에서 익명화해야 한다는 연구결과가 나왔다. 연구자의 이름이나 성별, 소속기관을 적지 않도록 하는 것만으로도 특정 연구자나 연구 기관에 지원비가 집중되는 불평등 현상을 줄일 수 있다는 것이다.
국제학술지 ‘사이언스’는 18일(현지 시각) 미국 아놀드앤메이블베크먼재단이 지난달 25일 생명과학분야 국제 학술지 ‘이라이프(eLife)’에 발표한 연구 결과를 소개하며 이같이 밝혔다. 연구진은 이름이 알려진 연구기관 소속 연구자가 연구비를 지원받는 데 유리하다고 분석했다.
베크먼재단은 매년 젊은 과학자들에게 연구비를 지원하는 베크먼영인베스티게이터(Beckman Young Investigator·BYI)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다. 연구진은 2020년까지 지원비를 받은 수상자들의 목록을 보다가 몇 명의 이름이 반복적으로 나오는 것에 의문을 가졌다. 그래서 재단에서 이 프로그램 지원자를 모집할 때 이름과 성별, 소속기관을 공개했던 기간(2017~2020년)과 공개하지 않은 ‘블라인드’ 기간(2021~2024년)의 결과를 비교 분석했다.
그 결과 블라인드로 지원자를 모집했을 때 덜 유명한 연구기관의 연구자가 지원금을 받은 비율이 다소 늘어났다. 신원을 밝혔던 기간 동안에는 수상자의 75%가 상위 25개 기관의 소속이었다. 하지만 블라인드 기간에 수상한 연구자 중 이들 기관에 소속된 비율은 45%에 불과했다.
앤 헐트그렌(Anne Hultgren) 베크먼재단 전무이사는 “이번 연구 결과는 앞으로 미래가 창창한 젊은 과학자들에게 ‘첫 번째 스파크’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대니얼 라레모어(Daniel Larremore) 미국 콜로라도대 컴퓨터과학과 교수는 18일 사이언스를 통해 “이번 연구 결과는 일부 지원자가 소속 기관 이름만으로도 연구비 지원을 받는 데 유리하다는 증거”라고 말했다.
라레모어 교수 연구진이 2022년 발표한 연구 결과에 따르면 미국 대학 교수의 80%가 단 20% 대학에 속해 있다. 그는 “이번 연구가 이러한 편견을 줄이기 위한 훌륭한 전략을 세웠다”며 “연구비를 지원하는 기관에서 지원자들을 검토하는 과정을 훨씬 공정하게 만들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미국 국립보건원(NIH) 연구진도 2021년 비슷한 연구 결과를 ‘이라이프’에 발표했다. 연구진은 흑인 연구자가 연구비를 받을 가능성이 백인 연구자보다 35%나 낮은 이유가 무엇인지 알아보기 위해, 지원자들에게 신원을 알리지 못하도록 했다.
그 결과 흑인 지원자들의 점수는 예년과 비교해 향상하지 않았지만 백인 지원자들의 점수는 감소한 것으로 나타났다. 당시 연구진은 백인 연구자들에게 점수를 후하게 주는 경향이 있었다고 분석했다. 또한 NIH의 자금 중 70%가 단 10% 기관에만 집중돼 있었다는 사실도 밝혀졌다.
결국 NIH는 지난해 10월 연구비를 공정하게 지원하기 위해 지원자들의 신원을 가리는 블라인드 방식을 적용하겠다고 홈페이지를 통해 밝혔다.
빌&멜린다게이츠재단도 2019년 비슷한 연구결과를 미국국립경제연구소(NBER)지에 발표했다. 연구진은 논문 심사 과정을 익명화했을 때와 하지 않았을 때를 비교 분석한 결과, 여성 지원자가 남성 지원자보다 낮은 점수를 받는 경향이 있다는 것을 알아냈다. 연구를 시작하기 전 연구진은 여성이 연구를 설명할 때 남성보다 더 범위가 좁은 주제별 언어를 사용해서 평가에 불리할 것이라고 짐작했다. 하지만 이번 연구를 통해 남성에게 유리한 편향이 실제로 있음을 알아냈다.
이 연구 결과들은 ‘유명하고 권위 있는 기관’에 소속된 ‘백인’ ‘남성’ 연구자일수록 연구비를 지원받기가 더 유리하다는 것을 나타낸다. 네이처는 특정 연구기관이나 연구자에게 자금이 쏠리는 현상을 줄이고 연구 주제와 아이디어 자체로만 공정하게 선별하기 위해서는 이름과 성별, 소속기관등을 익명화한 채 심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신원을 밝히지 않더라도 성별이나 소속기관들을 눈치챌 수 있게 나타낼 수 있기 때문에 연방과 민간 연구자금 제공기관은 지원서 심사 과정을 신중하게 설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참고자료
eLife(2024) DOI: https://doi.org/10.7554/eLife.92339
eLife(2021) DOI: https://doi.org/10.7554/eLife.71368
NBER(2019) DOI: 10.3386/w257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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