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기도 뚫어줬다, 개인비서 전락" 원어민 교사 싫다는 학교들

이가람 2023. 12. 25. 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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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희연 서울시교육감이 지난달 29일 오전 서울 종로구 서울시교육청에서 지구촌 시대로의 전환에 대응하기 위한 '서울교육 국제화 추진방안'과 '서울 영어 공교육 강화 방안'을 발표하고 있다. 뉴스1

서울 강북구에 위치한 A초교는 2019년 이후부터 학교에 원어민 영어보조교사(원어민 교사)가 없다. 기존 원어민 교사와의 계약 기간이 만료된 이후 학교가 교육청에 새 교사의 배치를 신청하지 않아서다. 교무부장 김모씨는 “그동안 코로나19의 영향도 있었지만, 앞으로도 학교에서 원어민 교사를 받을 계획은 없다”고 말했다. 이어 “행정실을 비롯해 다른 선생님들도 모두 원치 않는 이유가 가장 크다”고 덧붙였다.


확대 정책에도 서울 공립초 30% ‘원어민 교사 0명’


초등학교에서 원어민 영어보조교사가 수업을 진행하는 모습(사진은 기사와 관계 없음). 프리랜서 오종찬
영어 사교육을 줄이기 위해 공립 학교에 원어민 교사의 배치를 확대하려는 정책이 나오고 있지만, A초교처럼 현장에선 다른 분위기가 감지된다. 일부 학교에서 원어민 교사의 배치를 거부하고 있는 것이다.

서울시교육청에 따르면 올해 기준으로 서울의 공립초 564곳 중 원어민 교사가 없는 학교는 169곳(30%)이다. 2018년에는 561개교 중 210개교(37%)였다. 5년 사이 7%포인트 줄긴 했지만, 여전히 공립초 10곳 중 3곳은 원어민 교사가 없는 셈이다. 2019년 464명이던 원어민 교사의 수는 코로나19 대유행 이후 출입국이 자유로워졌음에도 올해도 432명으로 다소 감소했다.

신재민 기자

서울에서 원어민 교사의 수가 줄어드는 건 이례적이다. 원어민 교사는 교육부 산하 국립국제교육원이 각 교육청의 수요에 맞춰 선발 후 전국에 배치하는데, 서울은 선호 지역으로 지원자들이 몰리는 곳이기 때문이다. 서울시교육청 관계자는 “원어민 영어보조교사는 희망하는 학교에 한해서 신청을 받아 배치한다”며 “서울은 서로 오려고 하지만, 원어민 교사를 원치 않는 학교들도 있어 배치 확대에 어려움이 크다”고 말했다.


“대신 변기 뚫어준 적도”… 각종 업무 부담에 원어민 기피 현상


학교가 원어민 교사를 기피하는 이유는 뭘까. 떠맡지 않아도 될 업무 부담이 생기기 때문이라는 게 일선 학교에서 나오는 얘기다. 원어민 교사는 한국에 입국한 뒤 국립국제교육원에서 약 일주일간 연수를 받은 뒤 학교에 배치된다. 서울의 한 공립초 교감인 문모씨는 “교육청과 고용 계약을 맺지만, 집을 구해주는 것부터 시작해서 각종 한국 생활 조력 등을 학교가 모두 떠맡아야 한다”며 “원어민 교사 1명이 오면 학교가 투입해야 할 행정력이 어마어마하다”고 말했다. 원어민 교사의 주거비는 지역에 따라 매달 40만~70만원이 교육청 예산으로 지급되지만, 부족할 경우 학교 예산으로 지원해야 한다.

학교에선 주로 영어 교과 전담교사가 원어민 교사의 담당자로 지정되는데, 이들의 역할이 ‘매니저’와 다름없다는 불만도 있다. 서울 양천구의 한 공립초 영어 교과 전담교사 이모씨는 “각종 계약과 행정 업무도 다른 사람들과는 영어로 의사소통이 안 되기 때문에 전담교사 몫이 된다”며 “개인비서마냥 수시로 연락이 와 신경 써야 할 일이 한둘이 아니지만, 별도 수당이 있는 것도 아니라 원어민 교사 담당은 모두가 기피한다”고 말했다.

지방도 예외는 아니다. 전남의 한 공립초에서 원어민 교사를 전담하는 교사 김모씨는 “주말에 숙소 화장실 변기가 막혔다고 급하게 연락이 와 대신 뚫어준 적도 있다”며 “갓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한국에 온 원어민 교사는 한국에서 첫 독립을 하는 셈이라 하나부터 열까지 다 알려줘야 하는 아이와 비슷하다”고 말했다.


마약·폭행 등 범죄 리스크도 커


부산시교육청은 지난 6월부터 기존에 받던 ‘주거 제공 동의서’에 “퇴실 전 청소 상태를 점검 받아야 하고 불량할 경우 담보 금액에서 청구하거나 부족할 경우 추가 청구가 가능하다”는 문구(빨간 박스)를 추가했다. 부산시교육청 홈페이지
원어민 교사의 일탈 행위도 학교 입장에선 큰 부담이다. 국회 교육위 소속 서병수 의원실(국민의힘)이 교육부로부터 받은 ‘원어민 영어보조교사 비위 및 조치 현황’에 따르면 코로나19 대유행 기간인 2019~2020년 사이 0건이었던 원어민 교사의 비위 행위는 최근 3년간 매년 발생하고 있다.

2021년 경남도교육청 소속 원어민 교사는 마약 복용과 주거지 방화 혐의로 경찰에 체포돼 계약이 해지됐다. 2022년에는 강원도교육청에서 원어민 교사의 무면허 운전으로 인한 보행자 상해 사건, 올해는 전북도교육청에서 동료 교사 폭행 사건이 벌어졌다.


영어 튜터 로봇 등장에 “원어민 교사 완전 대체 불가”


조희연 서울시교육감이 지난 5월 31일 오전 서울 관악구 신성초등학교를 방문해 태블릿 PC, 챗GPT 등을 활용한 인공지능 융합 4학년 영어 수업을 참관하고 있다. 뉴스
일부 시·도교육청에선 대안으로 학생들의 영어회화 학습을 도와줄 인공지능(AI) 기술에 주목하기도 한다. 서울시교육청이 50억 원의 예산을 투입해 내년부터 5개 학교에서 시범 운영에 들어가는 ‘영어 튜터 로봇’이 대표적이다.

하지만, 원어민 교사의 역할을 완전히 대체할 수 없다는 지적도 나온다. 김해동 한국외대 영어교육과 교수는 “AI가 많이 발전하긴 했지만, 발달 과정에 있는 아이들의 경우 실제 사람과 상호작용을 하면서 의사소통을 해야 어휘 습득이나 언어 발달에 더 유리하다”며 “대체재를 찾기보단 행정 업무를 경감하기 위한 지원책과 우수한 원어민 교사를 선발할 수 있는 프로세스를 더 강화하는 방식으로 보완해야 한다”고 말했다.

서울시교육청 관계자는 “학교의 행정업무 부담을 완화하기 위해 원어민 교사의 전담 조직을 설치‧운영할 예정이다”며 “영어 튜터 로봇은 시범운영 결과 실효성이 입증된다면 원어민 교사를 원치 않는 학교에 또 다른 선택권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이가람 기자 lee.garam1@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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