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죄 난 박유하 교수 “좌도 우도 ‘제국의 위안부’를 誤讀했다”

박유하 세종대 명예교수 2023. 10. 30. 0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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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년대 도쿄 위안부 증언 집회
눈물 흘리며 통역한 게 첫 인연
하지만 ‘제국의 위안부’ 펴낸 후
있는 그대로 읽은 독자는 소수
9년 4개월 만의 무죄 판결
집필 동기 이해받았다는 심정
할머니들은 늘 소외돼
그분들의 명복과 평안을 빈다
박유하 교수가 26일 서울 서초구 대법원 앞에서 저서 '제국의 위안부'에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를 '매춘' 등으로 표현한 것과 관련 무죄 판견을 받은 뒤 대법원 법정을 나서고 있다./연합뉴스

위안부 할머니의 명예를 훼손했다며 형사고발당한 지 9년 4개월 만에 대법원의 무죄취지 파기환송 판결을 받았다. 판결문에선 나의 집필 동기와 글의 의도가 명확히 파악되고 있었고, 학문과 역사에 대한 깊은 고찰도 담겨 있어 반갑고 고마웠다.

30년 전의 일이 떠오른다. 90년대 초, 일본 유학 마지막 무렵 즈음에 위안부 문제가 처음 제기되었다. 도쿄에서 열린 위안부 증언 집회에서 나는 무료로 통역 봉사를 맡게 되었다. 눈물을 흘리며 통역하던 경험이 바로 이 문제와의 첫 만남이다. 귀국 후 나눔의 집을 방문해 할머니들의 이야기를 듣기도 하고 증언집을 읽기도 하면서, 나는 세간에서 위안부 문제가 소비되는 방식에 조금씩 의문을 갖게 되었다. 2005년에 펴낸 책 ‘화해를 위해서’에서 나는 그런 의구심을 처음 세상에 제기했다. 언론에서도 호의적으로 다루어지고 ‘문광부 우수교양도서’로 선정되기도 했지만, 책은 많이 팔리지 않았고 널리 읽히지 않았다.

이후에도 위안부 문제를 둘러싼 한일 대립은 격화되어가기만 했다. 국내에 소녀상이 세워진 직후부터, 나는 위안부 문제에 대해 다시 한번 제대로 써야겠다고 생각했다. 목소리 큰 양극단의 싸움에 동원되어 똑같이 목소리를 높이는 사람들만 늘어가는 소모적 현실에 제동을 가하고 싶었다.

오랜 기간에 걸쳐 위안부 할머니들을 만나고 관계 서적 대부분을 읽어 온 내가 보기에, 할머니들의 삶을 온전히 보려고 하는 이들은 거의 없었다. 소중히 여겨지는 듯 하면서도 실상은 할머니들은 소외되고 있었고, 위안부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원인은 거기에 있다고 나는 생각했다. 2013년에 ‘제국의 위안부’를 펴내고 나서 다시 할머니들을 만났다. 그들은 여전히 소외되고 있었다. “적은 100만, 나는 혼자” “정대협 빼고 보상을 직접 달라”고 말하는 할머니들의 토로를 들으며, 나는 그간의 의구심과 판단이 맞는다는 확신을 얻었다.

양극단을 비판한 나의 책을 두고, 그 양극단은 자신들의 기존 주장에 맞춰 오독했다. 우파 일부는 내가 자신들과 똑같이 ‘위안부는 매춘부’라고 동의했다며 환영했고, 좌파 일부 역시 위안부를 매춘부라 비난했다면서 나를 공격했다. 급기야 내가 위안부 할머니들을 만나는 것을 노골적으로 불편해하던 ‘나눔의 집’은, 내가 할머니들의 명예를 훼손했다면서 형사·민사·가처분 소송을 제기했다. 책을 낸 지 10개월 후였다. 나와 가장 친했던 위안부 할머니가 작고한 지 일주일 만의 일이었다.

대법원의 이번 판결문은 “강제 연행 부인, 자발적 매춘, 적극 협력을 말하기 위해 해당 표현을 사용한 게 아니다”라고 명확히 밝혀주고 있다.

이번 사건은 위안부 할머니들과 나의 싸움이 아니라, 그렇게 주변인들과 나의 싸움이었다. 그리고 그 주변인들의 진짜 불만은 자신들과 ‘다른 해결 방법’이 모색되고 받아들여진 데에 있었다.

위안부 문제는 흔히 한일 문제로만 여겨지지만, 실은 냉전 체제와도 깊이 연계되어 있다. 위안부 문제가 시작된 1990년대 초는 북한이 일본과 국교 정상화 협상을 벌이던 시기였고, 북한은 위안부 문제를 식민지 지배에 대한 ‘불법 배상’을 받을 수 있는 좋은 기회로 여겼다. 1992년에 당시 정대협 간사였던 윤미향 전 대표가 북한이 조일 수교협상에서 ‘전쟁 범죄 배상’을 받아내려 한다면서 “남과 북 모두가” “배상을 받아내기에 충분한 주체 역량”이라는 용어를 사용한 배경이기도 하다. 위안부 문제 운동에 깊이 관여한 법률가들 역시 북한의 대일 협상력을 의식했다. 위안부 문제에서 보상 아닌 ‘배상’을 받으려면 ‘불법’이어야 하고 바로 그 때문에 어디까지나 ‘국가에 의한 강제 연행’이어야만 하는 구조가 그렇게 시작됐고 정착됐다.

하지만 정작 북한은 2002년 평양 선언에서 그 주장을 접고, 경제적 보상을 받는 방식으로 돌아섰다. 그러나 이후에도 윤미향 대표 등 주변 관계자들은 ‘불법 배상, 강제 연행’ 주장을 이어갔다. 이들이 박근혜 정부 시절의 한일 합의를 결사 반대한 이유이기도 하다.

동아시아의 안정과 평화를 위해 나는 북일 수교를 기대하는 쪽이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국가의 자존심을 살리는 수단으로 위안부 할머니들은 전혀 원하지 않던 ‘성 노예 프레임’에 갇히게 되었다. 그리고 다시 국가에 동원되어 오랜 세월 거리에 서야 했고, 이제는 많은 분들이 세상을 떠났다. 내가 ‘제국의 위안부’를 쓴 건, 그분들이 전쟁의 희생자가 아니라, 식민지 지배의 희생자들이라는 사실을 밝히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돌아가신 할머니들의 명복을 빌고, 남은 할머니들의 평안을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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