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선 같았던’ 서울 강서구청장 선거, 그날의 풍경
“두 자릿수 차이로 크게 이길 거라고 확신한다. 지금은 표정 관리를 하는 게 중요하다.” 서울 강서구청장 보궐선거 개표를 하루 앞둔 10월10일 진교훈 더불어민주당(민주당) 후보 캠프의 한 관계자는 자신감을 감추지 않았다. 이변은 없었다. 국민의힘 소속 김태우 전 강서구청장이 유죄를 선고받으면서 시작된 강서구청장 보궐선거가 민주당의 승리로 끝났다. 진교훈 민주당 후보(56.52%)는 김태우 국민의힘 후보(39.37%)를 17.15%포인트 차이로 앞섰다.
이번 선거는 유권자 약 50만명이 기초단체장 한 명을 뽑는 보궐선거이지만, 정당들이 총력전을 펼쳤다. 민주당 내에서는 “구청장 선거가 대선 같다”라는 이야기가 곧잘 나왔다. 단식을 마친 이재명 민주당 대표는 10월9일 퇴원 후 곧바로 진교훈 후보 유세 현장을 찾았다. 홍익표 원내대표를 비롯해 민주당 의원 60여 명도 함께 지원 유세에 나섰다. 이날 이재명 대표는 마이크를 잡고 “강서구민 여러분이 나설 때”라며 정권 심판 구도를 부각했다. 진교훈 후보에 대한 언급은 “진교훈 후보를 압도적으로 당선시켜달라”는 것이 전부였다.
국민의힘도 지도부를 비롯해 권영세·나경원·안철수 등 전현직 수도권 중진 의원이 강서구에 총출동했다. 이재명 대표가 강서구를 찾은 10월9일 지원 유세를 위해 마곡나루역을 찾은 안철수 의원은 이철규 국민의힘 사무총장을 만나 “나는 오늘로 세 번째 왔다”라고 말했다. 거대 양당은 선거 막판까지 두 후보보다 ‘윤석열’ ‘이재명’을 호명했다. 이재명 대표의 ‘정권 심판’에 맞서 김기현 국민의힘 대표는 ‘이재명 심판’을 꺼내 들었다. 10월10일 마지막 유세에서 김기현 대표는 “부정부패 혐의를 받는 몸통(이재명 대표)의 아바타가 구청장이 되면 강서구가 어떻게 존경받을 수 있겠나”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선거 당일인 10월11일, 진교훈 후보 캠프 사무실은 투표가 끝난 오후 8시부터 국회의원들과 지지자들로 인산인해였다. 민주당 최고위원들은 “투표율이 높게 나와서 다행이다” “고생 많았다” “오랜만에 이겨야지”라며 들뜬 표정으로 지지자들과 인사를 나눴다. 민주당에 유리하게 나온 한 여론조사기관의 예측조사 결과를 두고 장내가 소란스러워지자 캠프 관계자가 자제시키기도 했다. 오후 8시20분께 전체 투표율(48.7%)이 발표되자 휘파람과 박수갈채가 쏟아졌다. 같은 시각 김태우 후보 캠프 사무실의 분위기는 정반대였다. 김기현 대표와 권영세·안철수 의원, 나경원 전 의원 등은 아예 사무실을 찾지 않았다. 주요 당직자 중 이철규 사무총장이 사무실을 찾아 지지자들을 격려한 뒤 30분 만에 빠져나갔다.
김태우 후보가 강서구청장으로 당선됐던 지난해 6월 지방선거 당시, 마곡동 등을 중심으로 한 개발 지역과 화곡동 등 전통적 민주당 우세 지역의 표심이 엇갈렸다. 이번 보궐선거에서는 강서구 모든 지역에서 진교훈 후보가 김태우 후보를 앞섰다. 진교훈 캠프 상임선대위원장을 맡은 김영호 민주당 의원은 선거 결과를 두고 〈시사IN〉에 이렇게 말했다. “투표율이 낮으면 정부·여당의 조직력을 못 이길 것이라는 두려움이 있었다. 그런데 역대 최고 사전투표율(22.6%)을 기록하면서 자신감을 얻었다. 우리 당은 두 자릿수 이상 격차면 윤석열 정부에 경종을 울리는 데 성공한다고 봤다. 17%포인트 차이가 나와 목적을 달성했다. 강남 3구 말고는 (서울) 대부분 이 정도 여론이 있다고 봐야 한다.”
이재명 대표는 강서구청장 보궐선거 결과를 ‘국민의 위대한 승리’라고 규정했다. 강서구 가양2동에 거주하는 김 아무개씨(29)는 정작 이번 선거에 크게 관심이 가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는 “권리 행사를 위해 투표하긴 했지만 절망스러운 마음이다. (진교훈과 김태우) 두 후보 중 누가 구청장이 되건 구민의 삶은 크게 변하지 않을 거다. 특히 두 후보의 연설을 기사로 보다 보면, 강서구청장이 되기 위해 선거를 치르는지 아니면 상대 정당과의 싸움에서 이기기 위해 선거를 치르는지 헷갈렸다”라고 말했다. 구청장은 구민 삶의 현장과 민원에 밀착해야 할 ‘생활 정치인’이라는 지적이다.
진보정당, 내년 총선에서 대안 될까?
강서구청장 보궐선거에 출마한 진보정당들도 이 지점을 파고들었다. 선거 기간 ‘친윤도 친명도 아닌 오직 주민 편(정의당)’ ‘잘 가라 용산 독재(진보당)’ ‘강서에 필요한 구청장은 검·경이 아닌 보통의 시민(녹색당)’ 등의 현수막이 강서구 곳곳에 걸렸다. 이들은 양당정치의 한계를 지적하고 대안으로 자신을 선택해달라고 호소했다.
득표율은 1%대에 머물렀다. 정의당 권수정 후보 1.8%, 진보당 권혜인 후보 1.4%, 녹색당 김유리 후보 0.2%. 각 진보정당은 총선을 앞두고 마지막으로 치러진 선거에서 “진보정당으로서 위상과 지위를 확고히(정의당)” “수도권에서부터 제3당의 지위 확보(진보당)” “기후 정치를 위한 진보 진영의 단일화(녹색당)”를 목표로 했지만 결과적으로 유권자에게 가닿지 못했다.
이번 선거는 진보 진영에서 정의당과 진보당 중 어느 쪽이 주도권을 확보할지 견줄 승부처이기도 했다. 개표 결과 두 정당 모두 “정의당 지지율인 4~5%는 확보(정의당)” “진보정당의 대표 정당 교체(진보당)” 등 목표 달성에 실패했다. 진보정당들은 강서구청장 보궐선거를 앞두고 후보 단일화를 시도했지만 결렬됐다. 단일 후보로 누구를 낼지 견해차를 좁히지 못했다.
10월10일 저녁, 연달아 세 정당 모두 화곡역 사거리에서 마지막 유세를 펼쳤다. 정의당은 심상정·류호정·장혜영 등 국회의원이 나섰다. 6월30일부터 일찍이 선거운동을 시작한 권혜인 진보당 후보는 “선거운동을 하려다 보니 도움이 되고 싶어 쓰레기를 줍기 시작했다”라고 말했다. 녹색당은 민들레 홀씨 모형을 들고 유세 차량 없이 자전거에 스피커를 싣고 유세를 펼쳤다.
6개월 후 총선에서는 진보정당들이 연합해 거대 양당의 대안이자 새로운 선택지가 될 수 있을까? 강서구청장 보궐선거 진보정당 단일화 논의에 참여했던 각 당 관계자의 말이다. “진보 진영이 작은 차이와 기득권을 내려놓고 기후 정치를 위해 연대하고 연합해야 한다(박제민 서울녹색당 공동운영위원장).” “민주노총은 2026년 지방선거까지 길게 보고 (연합을 위해 노력)하기로 결정했다. 이건 이대로 존중하면서 진보당은 연대를 위한 노력을 이어가겠다(오인환 진보당 서울시당 위원장).” “연합한다면 정의당을 플랫폼으로 제공할 테니, 정의당으로 들어와서 선거를 치르고 각 당으로 돌아가면 된다(정재민 정의당 서울시당 위원장).”
이은기 기자 yieun@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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