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읽기] 인권운동가는 위장되지 않는다

기자 입력 2023. 9. 25. 2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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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끝이 있었다. 윤석열 대통령의 광복절 경축사 이후다. 공산전체주의 세력이 인권운동가로 위장한다는데, 웃어넘기려니 숱한 조작 사건이 떠올라 섬뜩했고, 진지하게 반응하려니 도무지 진지한 말이 아니었다. 사람들은 어딘가 암약하고 있을 공산전체주의 세력보다 현실과 동떨어진 주장을 하는 윤 대통령의 세계관을 불안해한다. 정부가 홍범도 장군 흉상을 철거한들 역사가 철거될 수는 없다. 그런데도 마음이 개운하지 않았다.

서준식을 떠올렸다. 그는 ‘인권운동사랑방’을 만든 활동가 중 한 명이다. 박근혜 퇴진 촛불이 한창이던 2017년 1월 JTBC 뉴스룸 앵커브리핑에 그의 이름이 등장했다. 전 대통령비서실장 김기춘이 “사복을 입은 채로 조사를 받고, 난방이 가능한 구치소에서 생활할 수 있게 되었”던 것이 “간첩단 사건의 피해자 서준식씨를 비롯한 인권운동가들의 노력” 덕분임을 환기하며 ‘민주주의의 품격’을 말하고 있었다. 많은 인권활동가들이 감옥인권운동을 키우고 이어왔지만 그 출발선에 있던 서준식은 따로 언급할 만하다.

민주주의를 갈망하던 많은 이들이 각종 죄목을 뒤집어쓰고 감옥에 갇혔다. 감옥 밖에서는 이들의 무죄를 주장하고 감옥 안에서의 부당한 처우에 항의하고 지원하는 일이 이어졌다. 독재에 온몸으로 맞선 이들에 대한 존경과 부채감이 동기다 보니, 갇힌 이들이 ‘그런 대접 받을 사람이 아니’라는 보이지 않는 경계가 있었다. 유학생 간첩단 사건으로 수감돼 보호감호 처분까지 받아야 했던 서준식도 존경만 취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경계를 부쉈다. 어떤 이유로 감옥에 갇혔든 사람다움이 부정되는 모욕과 폭력은 안 된다고. 인권의 감각이다.

그런데 서준식이 처음부터 인권운동을 하려고 했던 것은 아니다. 그는 사회주의자다. “자본주의 구조가 악의 구조라고 생각”하고 “자유와 평등의 참뜻이 사회주의적 발상에서 올바르게 구현된다”고 믿었다. 그가 인권운동을 하게 된 계기가 ‘강기훈 유서대필 조작 사건’이었고 당시 사건을 진두지휘했던 법무부 장관이 김기춘이라는 사실도 아이러니하다. 세월호 참사 이후 유가족과 시민들을 종북세력으로 몰아간 감시와 탄압의 컨트롤타워였던 반공주의자 김기춘이 사회주의자 서준식의 덕을 보게 되었으니 말이다. 촛불 이후 얼마나 달라졌는가.

자유주의는 역사적으로 제 모습을 변형시켜왔다. 그러나 한국에서 자유를 앞세우는 정치세력은 끊임없이 냉전 자유주의 시대의 반공주의로 회귀한다. 여기에 맞서는 세력도 그 이념을 짐작하기 어렵다. 반공주의에 친일파 낙인으로 응수할 뿐이다. 자유주의든 민주주의든 민족주의든 시대가 변화하며 제기되는 과제에 응답이 보이지 않는다. 이념이 희미한 자리에 인물과 진영만 선명하다. 자유주의를 두고 반공주의와 반일주의로 다투는 정치 지형은 우리 사회 이념의 빈곤을 애처롭게 드러낸다. 언론의 자유를 파괴하며 자유주의를 자처한들, 차별금지법 제정도 회피하며 민주주의를 외친들, 역사가 그들 뜻대로 흘러가지는 않을 것이다.

개운하지 않은 이유를 알게 됐다. 한쪽은 ‘철 지난 이념’을 공격하고 한쪽은 ‘해묵은 이념 타령’을 비판하는 동안 사회주의가 의문의 1패를 당하고 있었다. 기후위기가 전 지구적 화두가 되면서 자본주의 너머를 전망하는 일은 더욱 긴급해졌다. 함께 돌보고 살리는 세계로 나아가는 데 사회주의의 역사적 경험과 공산주의의 상상력은 어느 때보다 절실하다. 페미니즘과 생태주의도 긴요하다. 정치에는 이념이 필수적이다. 이념을 우러르기 위해서가 아니라 해방의 역사를 이어가기 위해서다.

윤 대통령에게 알려주고 싶다. 사회주의자는 위장하지 않으며 인권운동가는 위장되지 않는다. 시대를 직시하며, 인간의 존엄을 해치는 질서에 몸을 부딪쳐 싸우는 이들이 역사를 쓴다. 해방을 향한 열망은 이념에 물들지 않는다. 이념을 이끌어 가만히 나아갈 뿐이다.

미류 인권운동사랑방 상임활동가

미류 인권운동사랑방 상임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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