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녀 꿈꿨던 외과의사, ‘유방암 환자의 성경’을 쓰다[홀오브페임]
<홀 오브 페임(Hall of Fa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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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부인과 병원은 ‘여의사 진료’라는 홍보문구를 내세운 곳이 많습니다. 반면 남성들이 비뇨기과를 찾을 때 여자 의사가 있으면 당혹스러워할 수도 있습니다. 사람의 몸을 다루고 의학에는 경계가 없지만, 아무래도 환자 입장에서는 부끄럽다고 생각할 수도 있을 테니까요. 책에서 배울 수 없는 부분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여성에게 유방이 없어진다는 상실감을 남자가 명확하게 공감하기엔 쉽지 않을 겁니다. 여성 의사가 거의 없던 시절에 유방암에 대한 경각심과 잘못된 오해를 바로잡는 데 앞장선 미국의 수전 러브(Susan Love) 박사가 지난 2일(현지 시각) 세상을 떠났습니다. 워싱턴포스트는 “러브 박사는 지칠 줄 모르는 외과의사이자 작가, 환자들의 보호자였다”면서 “수십 년간 유방암에 대한 십자군 운동을 주도한 인물”이라고 했습니다.
◇하버드 수석 졸업하고도 일자리 못 구해
수전 마거릿 러브 박사는 1948년 2월9일 뉴저지주 롱브랜치에서 태어났습니다. 세일즈맨 아버지를 따라 푸에르토리코, 멕시코 등에서 어린 시절은 보낸 러브 박사는 메릴랜드의 노트르담 대에서 2년을 보낸 뒤 뉴욕시에 있는 노트르담 수녀원에 들어갔습니다. 가톨릭 수녀가 되겠다는 오랜 꿈을 이루기 위해서였습니다. 하지만 몇 달 뒤 한계를 느껴 수녀원을 나왔습니다. 이때의 상황에 대해 그는 “나는 세상을 구하고 싶었지만, 그들은 자신의 영혼을 구하고 싶어했다”고 했습니다. 러브 박사는 이후 포드햄대 학사를 거쳐 1974년 뉴욕주립대 다운스테이트 의대를 졸업했습니다. 외과 레지던트는 하버드대에서 마쳤습니다. 1994년 잡지 피플 인터뷰에서 러브 박사는 “나는 남자들이 하는 만큼 중요하고 큰 수술을 할 수 있었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면서 “남성이 지배하는 의료 전문 분야의 여성이라는 사실을 절감했다”고 했습니다.
유방암 전문가가 된 것도 성차별의 결과였습니다. 러브 박사는 하버드 외과의 수석 레지던트였지만, 졸업했을 때 아무도 일자리를 제안하지 않았습니다. 구인 광고를 냈더니 러브 박사를 찾아오거나 소개받은 사람은 모두 유방 질환을 앓는 여성들이었습니다. 여성 외과의가 거의 없는 상황이 특별함이 된 겁니다. 러브 박사는 당시를 회고하며 “탈장 수술 같은 일반적인 외과 수술을 하는 것보다, 유방 질환 분야에서 내가 훨씬 더 큰 변화를 가져올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했습니다.
◇인기 높던 호르몬 대체요법 반박
러브 박사는 1987년 하버드 의대 외과 조교수가 됩니다. 그 다음해에는 보스턴 클리닉 포크너 유방센터가 건립됐는데, 당시 대부분의 의료진이 여성인 전 세계 유일의 병원이었습니다. 러브 박사의 원칙은 당시의 상식과는 완전히 달랐습니다. 20세기 후반 유방암 치료는 유방 절제술, 방사선 및 화학 요법이 주를 이뤘습니다. 일말의 위험을 제거하기 위해 유방을 잘라내는 것을 당연시하는 시대였습니다. 하지만 러브 박사는 이런 치료법에 대해 “베고, 태우고, 독살하는 것”이라며 강력히 반발했습니다. 뉴욕타임스는 “정통 의학의 흐름에 반발하는 행동”이라고 했습니다. 러브 박사는 항상 유방절제술보다는 부분 절제술과 종괴 절제술을 옹호했습니다.
러브 박사의 주장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습니다. 젊은 여성에서 유방암을 발견하기 위해 널리 쓰이던 유방조영술에 대해 부정적이었습니다. 젊은 사람의 경우 유방 조직의 밀도가 더 높기 때문에 눈에 보이는 단서를 찾기 어렵고, 오진도 많다는 겁니다. 당시만 해도 40세 이상의 여성에게 매년 유방 조영술이 권장됐습니다.
1990년대 베이비붐 세대 여성들이 중년으로 접어드는 시기에는 갱년기를 극복하는 호르몬 대체요법에 대해 반박했습니다. 의학계는 반발했지만, 수년 뒤 호르몬 대체요법의 부작용을 보고하는 연구결과가 쏟아지면서 러브 박사가 옳았다는 것이 입증됐습니다. 대규모 연구에서 호르몬 대체요법은 유방암, 심장병, 뇌졸중의 위험을 증가시키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유방암 환자의 성경’ 집필
러브 박사는 환자에게 보여준 부드러움으로도 명성을 떨쳤습니다. 수술이 시작되기 전 환자 옆에 서서 손을 잡고 마취가 시작된다는 사실을 알리면서 위로하는 그의 습관은 수많은 매체를 통해 권위적이지 않은 의사의 표상으로 표현됐습니다.
1992년 러브 박사는 로스앤젤레스 캘리포니아대(UCLA)의 데이비드 케펜 의대에 합류해 UCLA 유방 센터를 설립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바쁜 인터뷰 일정과 TV 출연 등으로 결근하는 일이 잦아지면서 1996년 센터를 사임해야 했습니다. 이후에는 의사의 업무 이외에 사회운동가의 역할도 했습니다. ‘러브 리서치 아미(Love Research Army)’를 만들어 유방암 연구 자원봉사자를 모집했고 지금까지 전 세계적으로 36만명 이상의 사람들이 이 캠페인에 합류했습니다. 설립 당시 러브 박사는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을 만나 유방암 연구에 대한 연방 지출을 늘려야 한다고 요구했고, 그 결과 1992년 9000만 달러였던 정부 예산은 1994년 4억2000만 달러까지 늘었습니다.
전미 유방암 연합(National Breast Cancer Coalition)을 공동 창립했고, 수전 러브 유방암 연구센터도 건립했습니다. 이 센터에서는 후진국의 유방암 환자가 종양이 양성인지 악성인지 판단할 수 있는 자가 판독 휴대용 초음파 장치를 개발해 전세계에 보급하기도 했습니다.
러브 박사가 1990년 카렌 린제이와 함께 쓴 ‘닥터 수전 러브의 유방 책’은 유방암 치료 및 예방에 대한 종합적인 정보를 제공하는 베스트셀러가 됐고, ‘유방암 환자의 성경’이라는 별칭까지 얻었습니다. 미국에서만 매년 약 26만4000명의 여성이 유방암 진단을 받고, 4만2000명이 사망합니다. 여기에는 500명의 남성 사망자도 포함돼 있습니다. 여성을 기준으로 둘째로 많은 환자와 사망자가 발생하는 암이기도 합니다. 러브 박사의 역할이 없었다면 이 숫자가 얼마나 늘었을지 모릅니다. UCLA는 추도 성명에서 “환자에게 결정권을 주고 질병에 대한 이해를 증진하려는 러브 박사의 헌신은 우리의 눈을 뜨게 했고 우리를 앞으로 나아가게 했다”면서 “그가 현상을 유지하려는 의학계에 도전한 덕분에 유방암 연구의 지형이 변화했다”고 했습니다.
◇”길을 닦는 것이 나의 의무”
러브 박사는 성소수자 권익 보호와 제도 개선도 이끌었습니다. 그 스스로 레즈비언이었습니다. 인공 수정으로 딸 케이티를 낳았고, 파트너인 동료 외과 의사 헬렌 쿡시와 함께 공동 양육하기 위해 법정에서 싸웠습니다. 그 결과 매사추세츠 대법원은 1993년 주 역사상 처음으로 동성 커플의 공동 입양을 인정했습니다. 왜 앞장섰느냐는 질문에 대해 그는 이렇게 답했습니다. “헬렌과 나는 돈과 특권이 있습니다. 그래서 길을 닦는 것은 우리의 의무입니다.”
러브 박사는 말년에 백혈병 재발 진단을 받은 뒤 뉴욕타임스 인터뷰에서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 중 누구도 계속 살 수 없고, 시간이 얼마나 남았는지도 모릅니다. 세상을 바꾸는 것이든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것이든 우리가 하고 싶은 일을 해야 한다고 딸에게 말하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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