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력으로 튀는 ‘김진태 사태’의 불똥
레고랜드, 아니 ‘김진태 사태’의 전말은 이렇다. 아래 번호 순서대로 살펴보자.
(1) 레고랜드 시행사인 강원중도개발공사(이하 시행사)는 KIS춘천개발유동화(PF 대출자)라는 회사로부터 레고랜드 건설을 위한 자금 2050억원을 빌리기로 한다(PF 대출). 시공사(동부건설·현대건설)가 레고랜드 건설에 필요한 건축비 등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다. 강원도는 혹시라도 시행사가 돈을 갚지 못할 경우, 도(道)가 대신 갚을 것이라며 지급보증을 섰다. PF 대출자는 강원도를 믿고 안심하며 자금을 대출해주었다. 시행사는 이후 레고랜드에서 벌어들이는 돈으로 이 대출금을 갚아나가면 될 것이다.
PF 대출자는 가능한 한 빨리 대금을 회수하고 싶어 하지만 부동산 PF 대출은 대개 회수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린다(레고랜드에서 벌어들이는 돈으로 그걸 언제 다 갚나). 그래서 빠른 시간 내에 대출금을 ‘현금화’할 수 있도록 다음과 같이 대출금을 ‘유동화’하는 과정이 들어간다.
(2) PF 대출자는 시행사에 빌려준 PF 대출채권을 특수목적법인(SPC)인 ‘아이원제일차(이하 아이원)’에 양도(매각)한다. 이는 시행사에 빌려준 돈을 상환받을 권리(채권)를 아이원에 넘긴다는 뜻이다. 이로써 시행사는 아이원으로부터 돈을 빌린 셈이 된다. 따라서 시행사는 ‘차주(돈을 빌린 주체)’, 그리고 아이원은 ‘대주(돈을 빌려준 주체)’가 된다. 다만 아이원은 PF 대출채권을 넘겨받은 대가를 PF 대출자에게 갚아야 한다.
(3) 이를 위해 아이원은 PF 대출자로부터 받은 ‘PF 대출채권’을 담보로 기업어음을 발행한다. 이처럼 담보에 기초해 발행하는 기업어음을 ‘자산담보부기업어음(ABCP)’이라고 부른다. 이 경우, ABCP의 기초가 되는 담보가 부동산 PF 대출채권이니 이를 PF-ABCP라고 부를 수 있겠다. 앞서 설명했듯 PF 대출은 중장기 대출로 상환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린다. 레고랜드에서 벌어들인 돈으로 천천히 받게 되어 있었다. 그러나 PF-ABCP를 발행하는 식으로 대출을 증권화(securitization)해서 팔면 PF 대출금을 만기까지 기다릴 필요 없이 곧바로 회수할 수 있다.
(4) 왜 곧바로 회수할 수 있느냐고? PF-ABCP를 사들이고 싶어 하는 투자자들이 있기 때문이다. 신한투자증권이 550억원어치를 매입하는 등 미래에셋, 한국투자, NH투자를 비롯한 10개 증권사와 1개 운용사가 이 PF-ABCP를 사들인 것으로 알려졌다. 이 PF-ABCP의 담보인 PF 대출은 강원도의 지급보증을 받았으니 매우 안정적인 것으로 여겨졌다. 그 덕분에 아이원 발행 ABCP는 신용등급이 ‘A1’인 우량채로 모두 매각될 수 있었다.
채권시장에 어떤 ‘난리’가 났는가
(5) 그리고 매각 자금은 PF 대출자에게 지급되었다. 중장기에 묶여 있어 당장 현금화하기 어려운 (즉 ‘비유동적인’) 자산(대출)은 이처럼 증권화를 통해 현금, 즉 ‘유동적’인 자산으로 바꾸어진다. 이 같은 과정을 ‘자산 유동화’라고 부른다.
(6) 이제 차주인 시행사가 대주인 아이원에 돈을 갚는 일만 남았다. 문제는 PF-ABCP의 담보인 PF 대출채권이 부실화된 것에서 시작된다. 시행사는 이 대출을 레고랜드의 영업활동과 부대시설 판매 등으로 벌어들인 돈으로 갚을 계획이었다. 그러나 레고랜드가 벌어들이는 돈이 영 시원치 않았다. 놀이기구 관련 기술적 사고가 잦고 주차비를 너무 비싸게 책정했다는 등의 비난이 들끓더니 방문객 수가 기대했던 연인원 수준인 200만명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고 말았던 것이다. 게다가 부동산 시장은 전반적으로 침체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상태였다. 시행사가 빌린 돈을 갚지 못할 위험이 커져 PF 대출이 부실화되니 그걸 기반으로 발행한 PF-ABCP 역시 부실화될 수밖에 없었다.
(7) 아이원은 시행사로부터 대출금을 받아야 PF-ABCP의 원리금을 신한투자증권 등의 투자자들에게 지급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투자자들은 PF-ABCP의 만기가 다가옴에 따라 당연히 강원도가 PF 대출의 지급보증을 이행할 것으로 기대했다. 그러나 취임한 지 채 석 달도 되지 않은 김진태 강원도지사가 그렇게 하지 못하겠다고 나섰다. 지난 9월 말 강원도는 시행사인 강원중도개발공사의 회생신청을 법원에 제출했다. 이로써 신용등급이 A1에서 C로 급락한 PF-ABCP는 10월5일 최종 부도처리되었다. 사흘 뒤인 10월8일, 취임 100일을 맞은 김진태 지사는 〈강원도민일보〉와의 인터뷰에서 말했다. “‘김진태가 하니까 좀 달라졌다’라는 평가를 받고 싶다.” 그가 자신의 말을 책임지고 실현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한국인들이 깨닫는 데는 일주일도 걸리지 않았다. 채권시장에 난리가 난 것이다. 그제야 김진태 지사는 “조금 미안하다”라며 뒤늦게라도 지급보증을 이행하겠다고 번복했다.
자본시장에선 신뢰를 잃으면 모든 것을 잃는다. 주식의 경우에도 신뢰가 중요하지만 채권시장에서는 특히 그러하다. 주식과 달리 채권에 투자하면 앞으로 받을 금액이 ‘이미 정해져’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얼마를 받느냐’가 아니라 그 금액을 과연 ‘제때 모두 받을 수 있을지’가 문제다. 이건 정확히 신뢰의 문제다. 빌려주었는데 나중에 원리금의 일부라도 돌려받지 못할 가능성이 크다고 예측되는(즉, 신용위험이 큰) 상대에게 돈을 빌려줄 사람은 없다. 또 ‘저 사람이 빚을 안 갚으면 내가 대신 갚아준다’고 큰소리치며 빚보증을 서준 사람을 믿고 돈을 빌려줬는데 차입자와 보증인 모두 돈 갚을 생각을 하지 않는다면(또는 못한다면), 돈을 빌려준 사람은 다시는 그들을 믿고 금융거래를 하지 않을 것이다. 최근 강원도의 지급보증 의무 불이행으로 발생한 신뢰 상실로 인해 채권시장이 전반적으로 큰 타격을 입고 있는 이유다.
그 뒤 채권시장에 어떤 난리가 나고 있는지를 훑어보자. 가뜩이나 금리인상으로 인해 채권 발행이 어려운 상황이었다(금리가 높을 때 채권 발행으로 자금을 조달하기 위해서는 더 높은 이자를 지급해야 한다). 그런데 채권시장에서 가장 신뢰도 높은, 즉 믿고 돈을 빌려줘도 된다고 여겨지는 지방정부가 ‘신뢰’를 걷어차버린 것이다. 채권시장은 빠르게 ‘말라갔다’. 채권을 발행하고 싶어도 이를 매입할 투자자를 찾기가 어려워졌다. 지방정부도 못 믿겠는데 어떻게 신용위험이 그보다 큰 회사들을 믿을 수 있겠는가. 채권 발행이 확 줄고 그 계획도 줄줄이 취소됐다. 돈이 필요한 회사들이 비명을 질러대자 정부가 돈을 풀겠다며 나섰다. 그런데 일이 좀 묘하게 진행된다. 이 사태의 시작은 분명히 강원도의 채무보증 의무 회피였다. 그런데 불똥은 애꿎게 한국전력(한전)으로 튀었다.
한국의 단기조달증권 시장(기업어음과 전자단기사채를 합친 만기 1년 이하의 채권시장) 규모(잔액 기준)는 2012년 32.2조원에서 매년 지속적으로 증가해 2022년 5월 현재 313.8조원으로 10배 가까이 커졌다. 이 중 한전 같은 ‘공사’가 발행한 잔액은 2021년 말 전체 단기조달증권 잔액의 14.0%에서 2022년 5월엔 17.7%로 대폭 늘었다. 에너지 가격 상승으로 인해 만년 적자에 허덕이던 한전이 그동안 단기채 발행을 크게 늘렸기 때문이다. 올해 10월까지 전체 공사채 순발행액은 29조9000억원인데 이 중 한전채가 20조2000억원으로 거의 3분의 2를 점유하고 있다.
한전채는 투자자들이 가장 선호할 만한 채권이다. 문제가 생길 경우 정부가 손실을 보전해주거나 추가 자본을 투입하는 등 안전성이 높다. 게다가 표면금리가 5.99%에 달해 일반 회사채와 별 차이가 없고 발행금리(채권 발행 시부터 만기까지 보유했을 때 얻을 수 있는 수익률) 또한 높기 때문이다. 안전한데 똑같은 수익을 얻을 수 있는 채권이 있다면(한전채), 같은 수준의 수익을 얻기 위해 누가 더 위험한 채권(회사채)을 사겠는가. 그런데 채권 투자를 위해 시중에 대기 중인 금액들이 한전채로만 몰리면 다른 회사채들은 충분히 판매되기 어려워진다. ‘유찰’ 가능성이 커지는 것이다. 이를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는 ‘한전의 회사채 구축효과’라고 표현했다.
‘구축(驅逐)’은 몰아서 쫓아낸다는 뜻으로, 한전채 때문에 채권시장에서 회사채들이 모두 쫓겨나게 생겼다는 말이다. 금융위원회가 국내 금융기관이나 공공기관에 ‘당신들이 발행하는 채권은 우량채들이니 한국보다 해외에서 발행하는 것은 어떻겠느냐’고 독려하게 된 배경이다. 그러나 최근 흥국생명의 영구채 미상환 사태(〈시사IN〉 제792호, ‘흥국생명 사태가 금융시장에 보여준 것’ 기사 참조)에서 보듯, 지금은 해외 채권 발행도 여의치 않은 상황이다. 흥국생명과 한전의 신용도에 커다란 차이가 있음을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가뜩이나 채권시장의 형편은 올해 초부터 썩 좋지 않았다. 올해 상반기 회사채 순발행액은 8조3532억원으로 2016년 이후 6년 만에 가장 낮은 수준이다. 하반기에도 좋아 보이지 않는다. 최근 금융투자협회의 ‘2022년 3분기 회사채 수요예측 현황’ 보도자료를 보면, 기업들이 발행하려 하는 회사채 종목 수가 지난해 같은 시기의 114종목에서 65종목으로 크게 줄었다.
영국 국채시장은 이미 한바탕 난리를 겪었다. 지난 9월 초 총리로 취임한 리즈 트러스는 공격적 감세안을 발표했다. 시장은 감세안으로 인한 재정적자를 감축하려면 국채 발행이 대폭 늘어야 할 것으로 기대했다. 이에 따라 영국 국채인 길트(Gilt)의 수익률이 폭증(가격 폭락)했다. 길트에 많은 금액을 투자해놓은 영국 연기금의 손실이 커졌다. 연기금 측은 투자한 파생상품에 대한 마진콜(그렇다. 영국 연기금도 수익률을 높이기 위해 파생상품을 이용해 레버리지를 일으켜 투자를 했다)에 대비해 현금이 필요했다. 그래서 국채를 내다 팔아 가격 폭락을 부채질했다. 이 같은 소동은 결국 영국 중앙은행이 개입하고 나서야 진정되기 시작했다. 트러스는 역대 최단기 재임 총리라는 신기록을 세우며 물러났다. 정치권의 분탕질이 금융시장을 어떻게 흙탕물로 뒤범벅되게 할 수 있는지 보여주는, 앞으로 오랫동안 기억될 사례일 것이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정치권이 자신들의 책임을 어떻게 져야 하는지 보여주는 사례도 된다는 것이다(이런 건 배워도 될 듯하다).
오락가락하는 금융 당국과 정치권
최근 재무경제학 분야의 최고 권위지에 발표된 한 논문은, 미국 연준이 팬데믹으로 쑥밭이 된 채권시장에 개입해 진정시켰던 경험을 자세히 살펴본다. 팬데믹이 벌어지자 투자자들은 현금을 확보하기 위해 갖고 있던 채권들 중 가장 유동성(liquidity)이 높은(즉 가장 ‘팔기 쉬운’) 것부터 내다 팔기 시작했다(이때 대량으로 매도된 증권의 하나가 미국채다). 거래비용이 폭증했으며 가격은 폭락했다. 급하게 팔다 보니 가격을 확 내릴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시장조성자들조차 ‘팔자’로 돌아섰으며 이는 이들의 채권 재고를 급격히 소진시켜 더 이상의 시장조성을 힘들게 만들었다. 이 같은 난장판은 연준이 발행시장과 유통시장에서 회사채를 매입하는 프로그램들을 들고 나온 뒤에야 회복되기 시작했다. 너도 나도 ‘팔자’일 때 연준이 ‘사주는 쪽’으로 나서줌으로써 거래가 정상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도록 ‘시장을 조성’하는 프로그램들이었다. 교훈은 명확하다. 이제 연준은 ‘최종대부자(lender of last resort)’로서 전통적인 역할뿐 아니라 ‘최종 시장조성자(market maker of last resort)’로서의 역할 또한 성공적으로 수행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한국의 금융 당국도 빠르게 움직인다. 50조원 이상의 자금을 채권시장에 투입하기로 했고, 95조원 또는 그 이상의 금액을 준비 중이라는 얘기도 들린다. 다만 인플레이션과 싸우기 위해 긴축 기조를 유지하고픈 한국은행이 ‘최종 시장조성자’ 역할을 수행하느라 채권시장에 돈을 뿌릴 수는 없다. 그래서 투입하기로 한 기금은 주로 은행권 등 민간 금융권이 갖고 있는 자금을 이용해 조성할 참이다.
‘한전채 구축효과’라는 말은 사실상 한국의 채권시장이 얼마나 ‘얕은 시장(thin market)’인지를 보여주는 표현으로 볼 수 있다. 대량으로 발행된 채권을 충분히 흡수할 수 있는 시장이 아닌 것이다. 신뢰 상실은 얕은 시장의 원인이거나 결과 혹은 둘 다일 수도 있다. 적어도 확실한 건, 얕은 시장에서 신뢰 상실이 얼마나 큰 재앙을 불러올 수 있는가다. 지금 한국의 채권시장이 그 좋은 사례다.
정책이 오락가락하면 신뢰가 추락한다. 금융 당국은 한전이 (한국에서) 채권을 발행하지 않기 바란다. 그렇다면 적자는 어떻게 하나? 전기요금 인상에 극구 반대하는 정치권은 한전이 계속 채권 발행으로 적자를 메울 수 있도록 채권 발행 한도를 8~10배까지 늘려주는 방안을 고려 중이라고 한다. 더 발행하라는 말인지 그러지 말라는 얘기인지 도대체 감을 잡을 수 없도록 정치권과 금융 당국이 혼선을 빚는데, 이래서는 채권시장의 신뢰성이 쉽사리 회복될 리가 없다.
중요한 것은 신뢰 상실이라는 폭탄은 얕은 시장에 던져질 때 훨씬 더 큰 파괴력을 갖게 된다는 점이다. 시장이 얕은 것만으로도 충분히 문제다. 얕은 신뢰는 회복시켜야 하지 않겠는가.
이관휘 (서울대 경영학과 교수)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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