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룸] 북적북적 140 : 세계사 단 한 번의 그 학교가 사라진 후에..'프라하의 소녀시대'

권애리 기자 2018. 6. 3. 0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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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도 리차는 한 번도 봤을 리 없는 그리스 하늘을 '그건 말야, 정말 쨍하고 깨질 듯이 파래' 라며 자랑스러워 죽겠다는 듯, 긴 눈썹으로 테두른 새까만 눈동자를 반짝였다. 그러곤 마치 지금 그리스의 창공이 눈부시다는 듯이 눈을 가늘게 뜨는 것이었다."

북적북적 140번째 방, 오랜만에 신간이 아닌, 서가에서 때때로 다시 꺼내읽어온 책을 골랐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일단 한 번 알게 된 사람들은 높은 확률로 열성팬이 돼 전작을 읽게 된다는, 일본의 러시아어 동시통역사 겸 작가, 요네하라 마리의 자전적 논픽션 '프라하의 소녀시대'입니다. 일본에선 2002년에 출간돼 오야 소이치 논픽션상을 받았고, 한국어로는 2006년에 번역됐습니다.

북적북적 77번째 방에서도 요네하라 마리의 '미식견문록'을 소개한 적이 있습니다. 당시 심영구 기자는 이 작가의 여러 작품 중에서 '미식견문록' 외에도 '프라하의 소녀시대'를 특히 좋아한다고 꼽았지만, "소녀들이 너무 많이 나와서 낭독을 포기했다"고 고백했습니다. 저라고 소녀들의 수다를 재연하는 게 부담스럽지 않은 건 아니지만, 그래도 성별은 같으니까, 큰 맘 먹고 도전해 봤습니다.

요네하라 마리는 인류 가운데 극소수만이 겪은 희귀한 소녀 시절을 보낸 작갑니다. 1950년생인 요네하라 마리의 아버지는 일본의 한 대지주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물려받은 부를 다 버리고 일본 공산당 운동에 투신했던 인물입니다. 1960년대, 세계 각국에서 공산주의 체제에 대한 추진이 활발하던 시기, 프라하에서 만들어졌던 공산당 이론지의 일본 대표로 선발돼서 활동했습니다. 이때 10대가 된 딸 마리는 세계 50여 개국에서 모인 공산당 대표들의 자제들과 함께 프라하의 소비에트 학교란 곳에서 소녀 시절을 보냅니다. 말하자면, '만국의 노동자가 단결하는 국경 없는 세상'을 만들 수 있다고 믿었던 사람들이 인터내셔널 공산당이라는 전무후무한 공동체를 이루기 위해 세계 각지로부터 모였던, 굉장히 짧게 끝난 일종의 세계사적 실험을 10대 시절에 실제로 경험했던 사람인 겁니다.

물론 그 실험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그 양상대로 끝났습니다. 요네하라 마리가 프라하에 있던 시기부터, 이미 그 공동체에 나타났던 균열과 위기가 책 속에서도 조금씩 보입니다. 그런데, 그 짧은 시기, 인류 역사상 희귀한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10대 시절을 함께 보낸 아이들은 그 후 어떻게 되었을까요.

이 책은 요네하라 마리가 자신과 친구들의 소녀 시절, 그리고 30여 년 후의 재회에 대해서 남긴 기록입니다. 옛 공산 동구권의 와해가 막바지로 치닫던 90년대 후반, 요네하라 마리는 소비에트 학교의 친구들 중 그리스인 리차, 루마니아 인 아냐, 그리고 유고슬라비아 연방 출신의 야스나를 불안한 마음으로 찾아 나섭니다. 마리가 그들을 찾아내는 과정 자체가 흥미진진합니다.

그리고 별거 아닌 것 같은 상황이나 대화들도 가만히 들여다보면, 그야말로 격동의 연속이었던 현대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이들 한 명 한 명의 삶이 얼마나 영향을 받았는지... 우리가 교과서나 뉴스를 통해서만 배웠거나 마음으로 짐작할 수 있는, 또는 감히 상상할 수도 없는 슬픔들이 깊게 배어 있습니다. 상투적인 말이지만 한 번 집어 들면 참 내려놓기 힘듭니다. 그리고 마지막 장을 덮는 순간, 뭐라 형언하기 힘든 씁쓸하면서도 뜨거워진 마음으로, 이들 모두의 평안과 2006년 소천한 요네하라 마리의 영면을 기도하게 됩니다.

이중 어느 친구의 얘기를 읽을까 굉장히 고민하다가, 최종 북적북적에서는 맨 앞에 나오는 그리스인 리차의 얘기를 골랐습니다. 인터내셔널 공산당의 아이들이 모였던 소비에트 학교가 가장 활기찼던 시절을 엿볼 수 있고, 이 중에선 그래도 꽤 웃으면서, 마지막엔 조금은 흐뭇한 기분도 좀 느끼면서 읽어내려갈 수 있는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일본에서 처음 출간됐을 때는 제목이 '프라하의 소녀시대'가 아니라 '거짓말쟁이 아냐의 새빨간 진실'이었을 정도로, 두 번째 주인공 아냐의 삶은 동구권 몰락의 핵심을 묵직하게 관통하는 어떤 단면을 생생하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제가 원래 처음에 읽으려고 했던 세 번째 친구, 야스나의 이야기야말로, 정작 마리 씨가 가장 진심을 다해 집필했다는 것을 책을 읽으면 바로 느낄 수 있습니다. -잔혹한 인종학살이 자행됐던 유고슬라비아 내전에 대한 기초지식 없이는, 부분부분 발췌해 읽는 야스나의 이야기가 귀에 쏙 들어오지 않을 수 있다는 길지선 인턴 피디의 지적에 공감해 낭독할 부분을 급히 변경했지만- 야스나 단락이야말로 이 책의 에센스, 요네하라 마리에게 가장 아픈 손가락으로 남은 친구의 이야깁니다.

한 마디로, 버릴 데가 한 군데도 없는 책입니다. 기회가 되면, 아냐와 야스나도 꼭 한번 만나보시길 권하고 싶습니다.
 
*낭독을 허락해 주신 출판사 마음산책에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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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애리 기자ailee17@s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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