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오기획] "진료·논문만 쓰던 시대 끝나".. 병원 중심 ICT·BT 융합 활기
개관 1년여만에 30여개 기업 입주
헬스케어 융·복합 핵심 거점 목표
산·학·연·병 전문가 역량 결집
신약 등 의료기술 새 돌파구 모색
기술 이전·창업까지 전과정 지원
3년간 20개 스타트업 육성 목표
고대 안암병원·연세의료원 등도
'연구중심' 패러다임 대전환 속도
헬스케어 클러스터 조성 잇따라
■성장동력ㆍ일자리 `바이오`에 답이 있다 (8) 바이오 혁신 중심지로 떠오른 병원
#미국 하버드 대학병원과 매사추세츠 공과대학(MIT)을 중심으로 1000여개 바이오 기업들이 모여있는 보스턴 바이오 클러스터는 지금도 연구와 창업이 끊임없이 이뤄지고 있다. 의사와 연구자, 기업가, 투자자들이 한 데 모여 역동적인 혁신을 이룬 덕에 보스턴은 세계 바이오 산업의 중심지로 떠올랐다. 국내도 가장 먼저 병원 중심의 바이오 클러스터 구축에 나선 분당서울대병원을 시작으로 '한국의 보스턴 바이오 클러스터'를 꿈꾸는 병원들이 속속 등장하고 있다.
"이곳에서 이뤄지는 연구의 방향을 표현한 상징적인 이름입니다."
13일 분당서울대병원 옆 LH공사 사옥 부지와 건물을 사서 조성한 '헬스케어혁신파크'를 찾았다. 이곳에서 만난 백롱민 분당서울대병원 연구부원장은 네온사인으로 '허브 앤 스포크'(Hub & Spoke)라고 적힌 간판을 가리키며 이렇게 말했다. 이곳은 식사나 차를 마실 수 있는 카페테리아로, 연구를 위해 온 병원 의사들과 입주 기업 관계자들이 자연스럽게 한 데 모일 수 있는 공간이다. 해외 유수 바이오 클러스터 관계자들이 공통적으로 꼽는 주요 시설 중 하나가 식당과 같은 편의시설이다.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들이 자연스럽게 소통하면서 아이디어를 창출하거나 필요한 인재를 찾기 때문이다.
지난해 2월 문을 연 헬스케어혁신파크에는 1년여 만에 30여 개 기업이 입주해 현재 상주 인원만 약 1500명에 달한다. 연면적 약 2만4000평에 달하는 공간이 벌써 부족할 정도로 관심이 뜨겁다. 백 부원장은 "물리적으로 가깝게 있으면 협력할 기회가 많아진다"며 "기업들이 제품을 개발하면 곧바로 병원에 가져가 적용해 볼 수 있고 의사들도 아이디어가 생기면 함께 연구할 기업들을 찾을 수 있다"고 말했다.
◇'연구'가 중심이 되는 병원=헬스케어혁신파크는 분당서울대병원이 가장 역점을 두고 추진하고 있는 사업이다. 개원 당시부터 눈여겨봤던 병원 옆 LH공사 건물과 부지를 사들여 자생적인 산·학·연·병 클러스터를 조성해보겠다는 꿈을 현실로 만들기 시작했다. 건물 리노베이션에만 600억원 이상이 투입됐고, 전체 사업비는 3000억원에 달했다. 병원 입장에선 경영 사정만 고려하면 결코 손댈 수 없는 사업이었지만, 의료의 미래를 보고 전 임직원이 뜻을 모았다.
헬스케어혁신파크의 역할에 대한 병원 내 설문조사에서 의사들은 '미래의학 준비'(80%)와 '산업과 학문의 연계'(62%)를 가장 중요한 일로 꼽았다. 백 부원장은 "앞으로 의료는 디지털 헬스케어를 기본으로 재생의료·유전체 의학·데이터 사이언스 등이 융합한 새로운 패러다임을 만들어 갈 것"이라며 "과거에는 각자 갈라져 있던 분야가 융합하면서 새로운 의미를 찾아가는 것이 미래 의료의 방향이기 때문에 이런 역량을 한데 모을 공간이 필요하다는 데 모두 공감했다"고 말했다.
혁신파크 3층의 중앙실험실에 들어서며 백 부원장은 "병원이 진료를 하고 논문만 쓰던 시대는 끝났다"고 강조했다. 이곳에는 200석의 연구 공간을 마련하고 중앙에 고가의 장비들을 공동으로 활용할 수 있도록 공개해놨다. 병원 내에 연구할 공간이 없어 전전하던 의사들이 환경이 변하자 달라지기 시작했다. 과거 의사들에게 연구는 대부분 승진 등을 위해 논문을 쓰는 과정 정도로 생각돼왔다. 지금까지 병원이 내세우는 역량은 '진료 잘하는 병원' 내지 '수술 잘하는 병원'이었다. 의사들도 당연히 연구보단 진료와 수술에 더 집중했다. 하지만 최근 몇 년 새 대형병원들은 '연구중심병원'을 표방하기 시작했다.
고질적인 저수가와 건강보험 재정의 한계, 경기침체로 인한 환자 수 감소 등으로 몸집을 키워 환자를 더 끌어오는 방식은 이미 포화상태라는 판단을 했기 때문이다. 대안으로 떠오른 게 연구였다. 의료와 정보통신기술(ICT), 생명공학기술(BT) 등이 융합한 새로운 의료 패러다임이 제시되면서 디지털 헬스케어와 바이오신약 개발 등 첨단 의료기술 연구가 새로운 돌파구가 될 수 있다는 인식이 확산하고 있다.
혁신파크에선 의사가 연구하다가 제품이나 서비스로 발전시킬 아이디어가 떠오르면 동물실험과 임상시험, 지식재산화, 시제품 제작, 인허가, 기술이전과 창업에 이르는 사업화 전 과정을 지원한다. 연구분야에 맞는 기업들과 공동연구도 곧바로 추진할 수 있다. 배우경 건강증진센터 교수는 에이티젠과 자연살해(NK) 세포 활성도 검사와 연관된 건강상태를 파악하는 기술을 함께 개발하고 있고, 김지항 영상의학과 교수는 OBS코리아와 인공지능 딥러닝에 기반한 폐기종 진단 애플리케이션을 개발하고 있다. 혁신파크 내에는 조만간 창업을 원하는 의사들이 사업을 준비할 수 있는 별도 공간도 마련할 계획이다.
백 부원장은 "연구 결과물을 지식재산으로 만들고 기술이전과 창업까지 연결할 수 있는 연구 산업화 생태계를 만들 것"이라며 "한 해 적어도 5개 이상의 창업을 지원해 3년 동안 최대 20개 스타트업을 키울 계획"이라고 말했다.
◇'데이터' 쥔 병원 중심으로 바이오 클러스터 확산=헬스케어혁신파크는 지금도 꾸준히 진화하고 있다. 뒤쪽에는 동물실험시설과 영상실험센터 등 국내 최고 수준의 전임상실험 시설을 갖춘 '지석영 의생명연구소' 건설이 한창 진행 중이고, 병원 본원과 연결되는 터널 공사도 조만간 시작할 예정이다. 하지만 이곳은 분당서울대병원이 그리는 바이오 클러스터의 시작점일 뿐이다. 주변 부지에 더 많은 바이오 기업·연구시설·교육기관 등을 유치하고, 궁극적으로 병원 전방 50㎞에 위치한 광교·판교 테크노밸리와 연구소, 기업체 등을 연계한 헬스케어 융복합 연구의 핵심 거점으로 만드는 게 최종 목표다.
분당서울대병원이 헬스케어 클러스터 조성에 자신감을 가질 수 있었던 가장 큰 원동력은 '데이터'다. 미래 의료의 핵심인 데이터를 병원만큼 많이 발생하고 축적한 곳은 없다. 분당서울대병원은 개원 당시부터 '100% 디지털 병원'을 표방하며 의료 IT 분야에 집중적으로 투자해왔다. 헬스케어혁신파크에는 국내 최초로 중동 진출에 성공한 병원정보시스템과 스마트병원 솔루션을 개발한 '헬스케어 ICT 연구소'와 바이오 데이터의 수집과 분석, 플랫폼 기술 등을 한데 모은 '바이오 빅데이터 센터'가 들어서 있다.
백 부원장은 "헬스케어 서비스와 제품의 대상이 되는 환자가 있는 공간이며 이들에게 실제 서비스를 제공하는 사람만 6000명에 달한다"며 "여기서 생기는 데이터가 한곳에 모이는 병원이 미래 헬스케어 산업의 중심지가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설명했다.
최근 대학병원들이 저마다 헬스케어 산업 클러스터 조성에 앞장서고 있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고려대 안암병원은 2300억원을 투입해 인공지능(AI)과 신약, 신의료기기 연구 시스템을 갖춘 '최첨단융복합의학센터'를 짓고 홍릉 일대 한국과학기술연구소(KIST), 한국과학기술원(KAIST), 서울바이오허브 등 외부 연구소·기업과의 공동 연구를 늘려나간다는 방침이다. 또 고려대 구로병원은 인근에 위치한 서울디지털산업단지 내에 들어선 IT 및 바이오 기업과 병원을 연계해 메디컬 클러스터를 조성할 계획이다.
연세의료원은 2020년 용인동백세브란스병원을 빅데이터와 인공지능에 기반한 진료서비스를 제공하는 디지털병원으로 건립하면서 이 일대 약 6만3000평 부지에 제약·의료기기·바이오산업 등 의료연관 분야 기업을 입주시켜 '용인연세의료클러스터'를 조성할 방침이다. 최종 입주 기업은 100개사 이상이 될 전망이며, 8000∼1만명의 고용을 창출할 것으로 병원 측은 기대하고 있다.
중앙대병원은 경기도 광명시 KTX 광명역세권지구 일대 '광명 의료 복합클러스터'에 2021년 3월까지 3000억원을 투입해 700병상 규모의 종합병원 설립을 추진하고 있다. 병원 인근에는 의료 연구개발(R&D) 시설과 의약품·의료용품·의료 IT 개발업체, 의료 벤처 창업지원센터 등이 입주하는 지식산업센터가 구축된다.
백 부원장은 "헬스케어의 미래를 보고 앞으로 연구 분야에 계속해서 투자할 것"이라며 "빠르면 5년, 늦어도 10년 후면 세계에 내놓을만한 연구나 사업화 성과가 나올 것"이라고 말했다.
남도영기자 namdo0@d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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